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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두려워하는

빛을 두려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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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440쪽 | 458g | 128*188*21mm
ISBN13 9788984374362
ISBN10 8984374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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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신념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빅 픽처』, 『오로르』의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 장편소설. 화자인 브렌던은 우연히 목격한 화재 사건을 계기로, 임신 중절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된다. 자신의 믿음만을 지키려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신념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 긴장감 있게 그리는 책 -소설MD 박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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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S로 다른 길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 빌어먹을 GPS 좀 그만 들먹거려요. 지리도 모르면서 억지로 운전질을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요.”
마음 같아서는 나도 욕설로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항의 메일을 받게 될 테고, 결국 유일한 수입원인 우버 일을 그만두어야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화를 누르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로스앤젤레스 토박이입니다.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랐죠.”
“그런 사람이 하필 꽉꽉 막히는 길로 들어와 개고생을 해요?”
“사고가 나면 길이 갑자기 막히기도 하니까요.”
“결과적으로 당신이 길을 잘못 선택했잖아. 능력이 없어 운전질이라도 해처먹고 살려거든 지리라도 제대로 익혀둬야지. GPS만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거야.”
나는 ‘운전질’이라는 말로 거듭 뺨을 맞고 나자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뒷자리 남자는 ‘내가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몰라도 너보다는 세 계단쯤 높아.’하며 거들먹거리는 부류가 분명했다.
--- p.10~11

테이블에 놓인 계산서 위에 6달러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오토바이 한 대가 엘리스를 내려준 건물의 철문 앞으로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철문 바로 앞에서 오토바이를 멈춰 세운 남자는 헬멧을 쓰고 선바이저를 내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문 옆에 붙어 있는 인터폰에 대고 뭐라 말하자 문이 열렸다. 남자는 문이 닫히지 않게 발로 막아서더니 백팩에서 병을 꺼냈다. 주둥이에 헝겊이 씌워져 있는 화염병이었다. 남자가 병을 한 번 흔들더니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주둥이를 막고 있는 헝겊에 불을 붙였다. 남자는 불이 붙은 병을 철문 안으로 던지고 나서 재빨리 오토바이에 올랐다.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데 5초도 안 걸렸다.
나도 모르게 오토바이가 사라진 골목에 대고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목소리는 건물 입구에서 울려 퍼진 굉음에 묻혀 버렸다. 건물에서 큰 폭발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 p.67

남자 손님은 내가 유일했다. 식탁에 차려놓은 닭고기 요리, 파스타, 참치 샐러드, 깍지콩을 먹으며 대화가 오가고 나서 테레사가 연설을 시작했다.
“밤새 ‘십자가 자매’인 아그네스카와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조금도 겁먹지 않았고, 오히려 믿음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걸 느꼈습니다. 젊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내 몸은 나의 선택’이라는 진보주의자들의 불온한 생각이 깃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싸워나갈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으로 임신 중절을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역사의 쓰레기장으로 처박아야 합니다. 젊은 여성들의 삶을 망치는 〈플랜드 페어런트후드〉 같은 사악한 단체들도 미국 사회에서 더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멀리 쫓아내야 합니다.”
테레사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뒤이어 아그네스카가 무릎을 꿇고 묵주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얼른 그 집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 p.104

“임신한 지 얼마나 되었는데요?”
“벌써 10주나 지났답니다. 부모님이 애리조나 주 스코츠데일에 살고 있는데 보수적인 분들이라 임신 중절을 극력 반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나 봐요.”
“당사자도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아야 할지 망설이던가요?”
“아뇨. 임신 중절 수술을 받길 원했어요. 아이를 좋아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강간으로 생긴 아이를 낳아 키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여학생은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뒤 회복실에서 쉬다가 갑자기 괴로워하며 울기 시작했어요. 임신 중절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겪은 일들이 떠올라 설움이 북받친 거예요. 심리적으로 괴롭고 힘든데 옆에서 위로해줄 가족이나 친구도 없으니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안쓰럽더군요.”
“그 여학생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아직 병원에 있다면 당장 되돌아가 여학생을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싶었다.
--- p.141~142

챈들러는 이혼 직후 켈러허가 자신에게 가한 신체적 감정적 학대가 이혼 사유였다고 주장했다. 그 반면 켈러허는 챈들러의 외도가 직접적인 이혼 사유였다고 주장했다. 켈러허는 챈들러와 두 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던 동료 배우 제이슨 미스를 불륜 상대로 지목했다.
켈러허는 제이슨 미스를 ‘그다지 비범하지 않은 왕자 역으로 두 번이나 성공을 거둔 남자’라며 비아냥거렸다. 챈들러가 바람을 피우다가 발각되자 친자 검사를 회피하려고 고의적으로 아이를 지웠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아이 아빠가 켈러허인지 제이슨 미스인지 확인할 수 없도록 미리 지웠다는 주장이었다.
챈들러는 가당치않은 모함이라고 반박했다. 제이슨 미스도 챈들러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챈들러는 동료 배우와의 불륜설이 널리 퍼지면서 인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챈들러는 이혼할 당시 위자료로 1천만 달러를 받았는데 켈러허의 자산에 대비해보면 교통 위반 범칙금 수준에 불과했다.
챈들러의 불륜사건이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된 이후 2년이 지나고 나서 챈들러는 제이슨 미스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p.172~173

“차를 최대한 천천히 이동시키세요. 순교자가 되겠다는 듯 차를 향해 갑자기 달려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려놓고 천천히 차를 이동시켰다. 경찰이 시위대 사람들이 저지선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시위대 사람들은 하나같이 빨간 장미를 들고 인간 방벽을 만든 가운데 구호를 외쳐댔다.
“임신 중절 수술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 임신 중절 수술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
나는 병원 입구를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여경 두 명과 사복경찰 한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엘리스가 말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지 설명할게요. 제가 병원에 있는 동료들에게 문자를 보낼 겁니다. 동료들이 나와 우리를 병원 안으로 에스코트하는 동안 경찰이 시위대를 막아줄 겁니다. 시위대 사람들은 우리에게 장미를 던지며 계속 구호를 외치겠죠.”
재키가 말했다.
“누군가 휴대폰 카메라로 제 사진을 찍으면 어쩌죠?”
“경찰이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제지해줄 거예요.”
“누군가 내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큰일 나요. 임신 중절 수술을 받으러 병원을 방문한 내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면…….”
--- p.205~206

“강간당해 생긴 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아기를 낳아도 함께 살 집이 없어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데 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임신 중절 수술을 선택한 여자들을 돕는 게 잘못일까요? 이 힘들고 위험한 세상에서 아이를 낳아 키울 만한 형편이 안 돼 어쩔 수 없이 임신 중절을 선택한 여자들을 돕는 게 왜 나쁘죠? 인간에 대한 연민도 없고, 남에게 친절을 베풀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 교리에 집착해 임신 중절 반대운동을 벌이는 짓이야말로 반인권적인 행위라고 봐요. 쾌락을 위한 섹스를 했으니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건가요? 제가 또 쓸데없는 독설을 퍼부었군요. 아무튼 종교적 교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요. 아무튼 브렌던 씨는 그런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집에도 들어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잖아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제 아내도 포함돼 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브렌던 씨의 부인은 임신 중절 반대운동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거예요. 혹시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어요?”
“인생에 낙이 없으니 그러겠죠.”
“딸을 낳아 키우고 있는데 왜 인생의 낙이 없을까요?”
“아그네스카에게는 딸이 괴로움을 주는 존재죠.”
“정말이지 안타까운 인식이네요.”
“클라라는 나름 제 엄마랑 가깝게 지내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 반면 아그네스카는 좀처럼 여지를 주지 않죠. 엘리스 씨와 딸의 관계와는 정반대인 셈이죠.”
--- p.239~240

“사람들은 누구나 빛을 찾아요. 그렇죠? 빛을 찾으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나 봐요.”
내가 말했다.
“인생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압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확실한 해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브렌던 씨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죠. 빛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달라요. 우리와는 달리 확신을 갖고 있어요. 저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이 두려워요.”
“그 사람들의 확신이 엘리스 씨가 인생에서 찾은 해답과는 달라서요?”
“그들이 찾은 해답은 일방적이죠.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배웠어요. 자기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죠.”
--- p.31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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