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떠한 유형의 예술도 역사 앞에서는 당대의 문화와 정서를 함축하고 있는 시대의 증언자로 모두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만 우선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예술의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역사와 시대 앞에 얼마만큼 보편성과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미술계에 입문한 이후, 80년대를 살아오면서 한국 현대미술사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의미의 현대미술이 있었던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을 한국 현대미술로 자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한국의 현대미술은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서구 형식 미학을 무작정 차용하고 트렌드를 따라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었던가……. 스스로의 물음에 답변을 내놓기가 매우 어려움을 확인하면서 상당 기간 동안 그동안 연구해 온 한국 현대미술사에 대한 혼돈스러움을 느끼게 됐다. 이제라도 당당하게 우리의 미학적 원형과 아우라(窓)를 찾아 바로 세워야 하며, 이러한 일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 pp.11~12, 「서문_민중미술의 출범과 가치」 중에서
오윤은 ‘민중’의 개념을 소외계층, 생산의 주체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민중의 개념, 즉 민중을 저항력이나 역사 변혁의 주체 등 민중 논리적 태도로 바라보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중 작가’라는 호칭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오윤은 인간의 존엄성을 민중 속에서 찾고자 했으며, 그것을 예술로 담아내고자 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의 문제와 본질에 관한 문제였고,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민중들의 분노, 슬픔, 저항은 인권과 존엄을 박탈당할 때 생기는 자연스러움으로 표현됐다.
그리고 그는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한 연장선에 두고 작품 활동을 했다. 다시 말해 예술을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했다고 보인다. 즉, 목판화 작품을 제작해 다량의 작품을 신속하게 제작, 민중 교육용으로 보급했다.
--- pp.48~49, 「민중미술의 지평을 열고 바람이 된 자유인 · 오윤」 중에서
강연균은 전라도의 향토적 서정과 풍광을 진실로 받아들였던 예술가였다. 80년 5월 광주를 직접 보고 느꼈던 그는 예술가로서 너무도 당연하게 5월의 아픔과 진실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당대의 예술가로 그 어마어마한 시대의 진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인간과 자연을 짓밟고 훼손하는 폭력의 고통에 대해 예술가로서 당연히 응답해야 한다는 예술가적 책무와 예술적 진리를 따랐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예술 세계는 더욱 장엄하고 귀중하며, 역사와 현실을 도외시하고 자연과 서정에만 집착하는 광주와 전라도의 수많은 예술가에게 모범을 보이며 경종을 울렸다.
--- p.90, 「향토적 서정주의의 경지와 예술가적 책무 · 강연균」 중에서
최병수는 80년대 민주화 과정 속에 사생아처럼, 어찌 보면 혜성처럼 나타난 기이한 화가이다. 그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서울, 한광전수학교) 2학년 중퇴로, 미술을 전공한 적이 없다.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일찍부터 식당과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온갖 잡다한 일을 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소년기인 10대 중반부터 밑바닥에서 온갖 막일을 하면서 인생을 스스로 추슬러왔고 이러한 삶은 청년기에 접어들어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줄여 말하면, 최병수는 미술 교육을 전혀 받아본 적이 없고 미술과 연관도 없었던 사람이다.
1986년, 그가 목수 일을 하고 있던 시절이다. 당시 홍익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친구로부터 벽화 제작을 도와달라(사다리 제작)는 부탁을 받게 된다. 이것이 그가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된 시작이었다. 이듬해 이한열 열사 사망 이후 목판에 제작했던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자그마한 판화 그림을 친구들의 권유로 크게 확대했다. 이렇게 확대한 걸개그림이 그를 오늘날 민중미술계의 스타덤에 오르게 한 것이다.
--- pp.126~128, 「성실성으로 현장을 지배하는 목수화가 · 최병수」 중에서
2000년도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탄부나 탄광촌의 인물들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마을 풍경이나 강원도의 눈 덮인 웅장한 산들이 주 소재가 된다. 이 시기에는 노동 현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강원도의 산하와 마을에 대한 서정성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당시의 작품들은 투박하고 정감 있는 서정성이 깃든 풍경화로 보일지 몰라도 그 산 속에는 20여 년 전 탄부들이 파 놓은 거미줄처럼 얽힌 굴과 수많은 막장이 숨겨져 있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과 산이 아니다. 과거 그 굴 속에서 피와 땀으로 범벅된 탄부들의 막장 인생의 시간들이 녹아 있는 바로 그러한 풍경이고 산들이다.
특히 그의 작품 〈산허리 베어 물고〉(1997∼2003년)는 강원도의 눈 덮인 산들과 골짜기에 조그마한 집이 외로이 골짜기를 지키고 있다. 웅장한 산들과 눈의 이미지가 투박한 질감과 함께 정감 있게 그려져 있다. 아름답게 보이는 산촌의 서정적 풍경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눈이라는 자본주의의 순백색에 광부들의 삶이 감추어져 있다.
--- pp.182~185, 「검은 막장에서 5월 광주를 보는 민중화가 · 황재형」 중에서
박불똥은 80년대 중반부터 서구에서 유행했던 콜라주 양식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여기에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현대적 조형 어법과 독창적인 재료가 사용되었으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작가적 상상력은 전제조건이었다.
가난한 젊은 예술가인 박불똥에게는 길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신문이나 잡지가 모두 콜라주의 재료이기 때문에 작품을 제작할 때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점과 장시간의 수공성을 요구하는 회화작품보다는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작품 제작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전업 작가로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했으리라 본다.
이러한 점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돼 시작하게 된 사진 콜라주라는 회화 양식은 당시 민중미술계에서 독자적이고 신선한 예술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그가 발언하고자 했던 직설적인 시대 정신 표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돼 빠른 시간에 미술계와 대중들에게 흡수됐다.
--- p.205, 「독자적 사진 콜라주로 ‘자본주의 비판’ · 박불똥」 중에서
그는 〈본질은 보이지 않는다〉 시리즈에 이어 최근에는 〈이주민〉 시리즈를 열정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그는 80년대 이후 자연 풍광과 거리의 모습을 작품에 담아내면서 동학혁명, 6·25, 5·18에 이르기까지 참혹했던 당시의 사실들, 그리고 시간 속에 망각되고 감추어진 것들을 우리의 일상 속으로 다시 불러왔다. 그리고 다시 이주민과 다문화라는 우리 사회의 현실 문제를 새롭게 이슈화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시대적 문제조차도 우리 사회가 아름다워지는 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시대나 사회 문제를 거시적 안목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손봉채의 태도가 있기에 그의 작품은 참혹했던 역사 현장일지라도 아름답고 따뜻하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러한 아름다운 풍광 뒤에 감춰진 역사적·시대적 사실성에 대한 본질을 탐색하고 날카롭게 포착한 입체 회화는 서정적 리얼리티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입체 회화는 현대 회화의 새로운 표현 기법으로 인정받아 지난해 중학교 미술교과서에 수록됐다.
--- pp.259~260, 「체인으로 엮인 보이지 않는 세상 · 손봉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