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암 진단을 받으셨어도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고생하고 계시지만 언젠가 다 나으실 거란 생각을 당연하게 했다. 엄마가 폐암과 싸우실 때 안 좋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좋은 생각을 하는 게 맞지만, 나는 그저 현실감이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괜찮아지셨으니 이번에도 괜찮아지시겠지 한 거다. 엄마가 얼마나 아프고 두려우신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했다면 어땠을까? 살아오면서 창피한 일이 많았고 앞으로 얼마나 더 창피한 일이 많을지 모르지만, 나는 엄마의 아픔을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 모습을 가장 한심하고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 p.9, 「프롤로그」 중에서
밥을 먹는 도중에 아빠가 담배를 피우고 오셨다. 엄마는 “당신 정말 끊어야 해, 아직 정신 못 차렸네”라고 말씀하셨다. 웃음과 함께였지만 아마 쓴소리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나는 흡연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담배를 태우고 싶어진다는 게 조금 무섭다. 나도 아빠에게 끊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지만, 아빠를 위한 나의 말이 아빠의 스트레스가 될까 봐 말을 못 하겠다. 병원에서 엄마와 함께 대기할 때 아빠가 안 계신 틈을 타 말씀하시길, 아빠가 걱정되는데 아빠는 자꾸 검사를 안 받으시려 한다고 하셨다. 아마 아빠는 겁이 나서 검사를 받지 않는 것이실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안 좋은 결과라면 우리 가족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아빠를 제외한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것보다 아빠의 건강이 중요한데 아빠는 당신이라도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서로 바라보는 방향은 같은데 닿고자 하는 방법이 다르다.
--- p.18, 「2017년 3월 14일 일기」 중에서
집에 돌아오니 모두 잠들어있었다. 엄마만 빼고. 혼자 잠 못 들고 계신 엄마를 보니 마음이 꾹꾹 아려왔다. 엄마를 안아드리고 뽀뽀도 해드렸다. 엄마는 그제야 눈물을 흘리셨다. 가족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당신이 가장 힘든데도 눈물을 참고 참으셨나 보다.
--- p.19, 「2017년 3월 14일 일기」 중에서
엄마가 아픈 몸으로 자꾸 집안일을 하시려 해서 예민해진 아빠가 짜증을 내셨다. 엄마도 아빠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 그러시는 건데, 서로에게 짜증을 내게 되는 모습이 안쓰럽다. 차라리 누군가가 마음먹고 우리를 이간질하고 괴롭히는 상황이면 좋겠다. 다 같이 화낼 대상이라도 생기게….
--- p.34, 「2017년 3월 27일 일기」 중에서
메신저로 엄마가 ‘S 농협은준롕’을 보내셨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아빠에게 전화했더니, 엄마가 쓰신 거라고 한다. 알고 보니 아빠가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내보라고 시키신 거였다. 엄마의 소통 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아직 원인은 모르겠다. 중환자실과 병원에 대한 후유증인지, 뇌 기능의 저하인지 모르겠다. 그저 마음이 아프다. 엄마도 할아버지처럼 알츠하이머가 오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엄마의 인지 능력과 의사 표현 능력이 저하되는 것이 당황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 p.198, 「2017년 11월 28일 일기」 중에서
엄마의 메신저 계정이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집에 와서 엄마 스마트폰을 찾아 충전시키고 전원을 켜보았다. 2월부터 요금이 미납되었다고 한다. 내일 요금을 내고 다시 인증받으면 계정이 다시 돌아올까. 엄마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엄마라고 저장한 계정이 ‘알 수 없음’으로 변한 것뿐인데, 너무 섭섭하다. 이건 미련일까.
--- p.249, 「2018년 9월 13일 일기」 중에서
양말 긴 거.
감자. 고구마.
콩나물 국밥.
노란색 포스트잇에 적힌 알 수 없는 메모.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스마트폰의 잠금 화면은 항상 같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사다 달라고 하신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적은 것이었으니, 아마 17년 여름 즈음 적어놓은 거겠지?
콩나물 국밥은 사다 드렸고, 양말 긴 거는 수면양말로 갖다드렸다. 감자와 고구마는 사다 드리지 못했다. 그때 못 사다 드린 게 아쉬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 같은 화면으로 두었다. 이걸 계속 보고 기억하는 것이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잊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 메모를 보고 뭐 이렇게 악필이라는 둥, 이걸 왜 아직도 해놓고 있냐는 둥 물었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아 매번 딴소리만 했다.
--- p.270, 「2020년 12월 16일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