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안성한과의 연애는 내가 산 가짜 명품 핸드폰 케이스 같은 거였다. 애들에게 “나 남자친구 생겼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다.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선언한 이후, 애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내게 빈말로라도 남자친구의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을 정도로 내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연애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을 때 “넌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는 말은 듣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쇼윈도 커플이라도 남친이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우고 일방적으로 헤어지자는 통보를 한다? 그것도 메시지로? 그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그건 내가 안성한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 이전에, 상대의 똥매너에 대한 당연한 분노였다.
--- p.17
“혹시 모티즈 씨?”
누군가 나를 부르며 앞에 와 섰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선 사람을 봤다. 그 순간 도망가지 않은 나 자신을 격하게 칭찬해 주고 싶어졌다.
‘대박. 존잘.’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한 줄기 남은 이성의 끈을 꽉 부여잡고 간신히 참았다. ‘인형’은 잘생겼다. 만난 지 몇 초밖에 안 되었지만 그 사실만은 확실했다. 인형이 내 맞은편에 앉았을 때, 뒤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완전 잘생겼다. 연예인인가 봐.” “연습생 아냐?” 사람을 앞에 두고 외모 평가라니 참 무례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해는 된다. 나 같아도 저런 얼굴이 주변에 나타나면 연예인인가 싶어서 봤을 거다.
“예, 맞아요.”
“어, 맞구나. 안녕하세요. 제가 오늘 만나기로 한 인형입니다.”
--- p.33
[커플 V- log] 인형 & 모티즈. 인티즈 고딩 커플 일상
모난이 : 안녕하세요. 모티즈입니다. 말티즈를 닮았다고 해서 모티즈! 인형아, 너도 이쪽 봐. 손 좀 흔들어 봐.
(셀카봉을 들고 있는 게 확연한 구도. 내 얼굴만 화면 가득 잡힌다. 화면이 흔들리고, 인형의 얼굴이 잠깐 비쳤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곧 화면이 전환되고 나와 인형의 얼굴이 함께 화면에 잡힌다. 인형은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
이인형 : 나 이런 거는 좀.
모난이 : 왜? 데이트할 때 찍어 두면 나중에 추억도 되고, 재미있잖아. 여러분, 얘가 제 남자친구 인형이에요. 저랑 얘랑 오늘부터 1일! 제 남자친구 완전 잘생겼죠? 인형아, 손하트 해 봐. 인형이가 부끄럼을 좀 많이 타요.
(내키지 않는 듯 휴대폰 쪽을 보다가, 나를 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 하트를 해 보이는 인형. 나는 웃으며 카메라에 손을 흔들어 보인다. 화면이 종료된다.)
--- p.41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중에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책이 있다. 한 마을에 쥐가 너무 많아져서, 피리 부는 남자에게 쥐를 없애 달라는 부탁을 한다. 남자가 피리를 불자 쥐 한 마리가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그 뒤를 또 한 마리의 쥐가 따라가고, 그 뒤에 줄줄이 쥐들이 따라붙었고, 그렇게 마을의 쥐가 모두 피리 부는 남자를 따라갔다는 이야기다. 그 수많은 쥐가, 모두 피리 부는 남자의 연주가 좋아서 따라갔을까. 그중에는 그냥 다른 쥐들이 가니까 따라간 쥐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댓글이라는 건 그 쥐들 같다. 이인형과 같이 옷 쇼핑을 했던 브이로그를 기점으로 ‘인티즈’ 채널에 달리는 댓글의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내 외모를 욕하는 댓글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귀엽다거나 응원한다는 긍정적인 댓글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우리를 ‘푼수까칠 커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p.57
찍혔다. 저 표정.
나는 올라온 브이로그 속 인형의 표정을 봤다. 내게 버블티를 돌려주는 인형의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원래는 인형만 나를 찍고, 인형은 카메라에 찍히지 않기로 되어 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나는 꼭 한 번은 인형의 그 표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나를 볼 때면 짓는, 살짝 입을 벌린 표정 말이다. 인형이 자기가 찍히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면 좀 더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중간에 살짝 카메라 방향을 돌렸다. 그렇게 해서 인형이 화면에 찍힌 건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댓글창의 절반이 인형의 표정에 대한 것이었다.
‘봐. 네가 나빠, 이인형. 네가 너무 연기를 잘해서 문제야.’
나는 ‘멈춤’ 버튼을 누르고 화면 속 인형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진짜 좋아하는 티가 나기는. 속고 있다고요, 여러분. 우린 가짜란 말이지요. 가짜 커플.”
--- p.79
라이브 방송 종료.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침대에 엎어지듯 쓰러졌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블로그 링크까지 남긴 건 좀 오버인가. 아냐, 그거라도 읽으면 이인형이 나올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질 수 있잖아.’
계속 드러누워 있을 순 없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섰다.
‘이인형이 라이브를 봤을까? 못 봤을 수도 있어.’
혹은 내 라이브를 봤어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공원으로 향했다. 이인형에게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말한 대로 저녁 아홉 시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아홉 시까지 이인형이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발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올까? 오기를 바라는 게 뻔뻔한 걸까?’
--- p.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