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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 향기

국화꽃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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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392쪽 | 448g | 134*200*20mm
ISBN13 9791165342203
ISBN10 11653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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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여자의 손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의 여자가 언뜻 정신을 차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자 남자는 허둥거리며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귀를 가져갔다.
“거…… 걱정하지 말라구? 그래, 걱정 안 해. 당신은 잘 해낼 거야. 난 믿어. 당신과 우리 아기 모두 잘 해낼 거야!”
남자는 글썽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삭정이처럼 마른 여자는 자신의 뼈마디만 남은 손을 움켜잡은 남자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었다.
여자는 깊은 눈빛으로 말없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납작하게 짓누르는지 허리와 어깨를 뒤틀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수술실 문을 여느라 잠시 침대가 멈췄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여자의 뺨을 감쌌다. 그 손바닥 안으로 여자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미주야! 나, 나, 여기 있을게. 잊지 마. 내가 지키고 있는 한 모든 게 잘될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여자는 바싹 말라 타들어 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침대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그 짧은 찰나에 그녀는 안타까이 자신의 손을 놓는 남자를 희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금니를 깨문 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던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펴들고는 여자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러나 여자는 너무나 다급한 표정으로 반쯤 허리를 일으키며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도 여자의 손을 향해 몇 걸음을 황급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실은 침대는 이내 수술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코앞에서 문이 닫히자 그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수술실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한동안 얼어붙은 듯 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벽에 기댔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쥔 채 복도 천장을 향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꽃잎 아기를 기다리며」중에서

승우는 팸플릿 뭉치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여자 뒤로 가서 섰다. 빈틈없는 자세였다. 전철이 흔들리자 문득 그녀의 머릿결에서 국화꽃 같은 향이 났다. 청명한 날씨의 푸른 들판에 핀 들국화 같은. 분명히 그 내음이었다. 놀라웠다. 지하철은 사람들의 냄새로 뒤섞여 향기란 게 제대로 느껴질 리 만무했다. 미량의 향기를 발산하는 그녀의 뒤에 선 승우는 가슴속 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떨림을 느꼈다.
161cm의 알맞은 키에 생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녀는 무거워 보이는 팸플릿 뭉치를 든 채 앞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면박을 당했던 처지라 ‘들어드릴까요?’라는 말도 주저되었다.
승우는 그녀의 머릿결 가까이에 코를 대고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 틀림없는 국화 내음이었다. 야생의 싱그러움과 햇빛 분말이 노랗게 날아다니는 듯, 은은하면서도 담백한.
요즘 국화 향이 나는 샴푸가 새로 나왔나?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 머릿결에서 국화 향이 나는 여자…….
멀대같이 큰 키에 부지깽이같이 기다란 다리를 가진 그는 껑충거리는 걸음으로 그녀를 이내 따라잡았다.
“저…… 뭐 좀 여쭤보겠습니다.”
“네?”
“이 근처에 〈황금 가면〉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생맥줏집이라던데요.”
승우는 혹시라도 자신이 지하철 안에서의 면박을 앙갚음하려는 속 좁은 인간으로 보일까 싶어서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 집을 낀 골목 끝에 〈매직 넘버〉란 카페가 있는데 오늘 그곳에서 모임이 있거든요.”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표정이었다. 미간과 코의 주름이 살포시 접혔다가 천천히 다림질하듯 펴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짐을 억울하다는 듯 잠시 보더니 갑자기 그에게 던지다시피 바닥에 내려놓았다.
---「국화꽃 향기」중에서

“미주야, 걔 그만 좀 놔줘라. 자고로 남녀란 살갗을 오래 붙이고 있으면 십중팔구 정분난다는 걸 모르냐?”
“얼씨구! 승우랑 나랑? 말도 안 돼. 얘랑 학번은 2개 차이가 나지만 내가 한 해 꿇어서 나이 차이는 3살이야. 이 짜식이 좀 괜찮긴 하지만 내 타입은 아냐.”
“네 타입은 어떤 남잔데?”
“승우 얘랑 반대인 남자. 왜 있잖아. 손오공에 나오는 저팔계처럼 못생겼는데 저돌적인 남자. 차이가 있다면 저돌성과 용감성에 지적인 면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거지.”
취해 있었다. 그러나 미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가 원하는 남자는 정글이나 다름없는 영화판을 함께 뚫고 나갈 수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승우는 검은 밤바다의 파도가 자꾸만 가슴속으로 들이치는 느낌이었다. 미주가 악의 없이 한 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미주의 남자 영역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면 웅담을 날것으로 씹은 것처럼 혀끝이 지독히도 씁쓰레했다. 밤의 짙은 명암 때문에 들키지는 않았지만 승우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사랑이었다. 깊은 사랑.
승우는 미주가 채워준 잔을 비우고 슬그머니 일어나 아무도 없는 해변가를 향해 걸었다. 바다를 향해 혼자서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정란은 어둠에 묻혀 사라지는 승우의 쓸쓸한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갑자기 코끝이 파도 한 줄기가 때린 것처럼 시큰거렸다. 남자의 등은 자기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부위였다. 승우의 등은 사랑에 상처 입은 자가 자기 스스로 가슴을 치유해서 미소를 머금고 돌아와야 하는 푸르디푸른 등이었다.
---「첫 키스」중에서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나는 매일 온전히 당신의 그리움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도, 어제도, 엊그제도 나는 매일 당신이 사는 집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하루해를 보내고 왔습니다. 당신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를 벌써 3달이 넘어갑니다.
사람들은 내게 말할지 모릅니다. 어리석다고,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고. 아니 당신까지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내 삶이 살아 있는 시간은 당신과 함께할 때뿐입니다. 나만의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 집 근처에서 일고여덟 시간을 서성이며 기다리면 당신을 겨우 볼 수 있습니다. 집에서 일하다가 슬리퍼를 신고 필요한 것을 사서 돌아가거나 어딘가로 외출하는 시간입니다.
바보처럼 숨어버린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행복에 겨워 돌아옵니다. 내가 당신 앞에 나서거나 더이상 전화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부담을 느낄까 봐 두려워서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이 글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까 두렵습니다.
나는 당신을 은혜하고 동경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쉼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내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향기로 이미 눈멀고 귀먹어버렸습니다. 당신이 내게 지상에 살아 있는 유일한 여자가 된 지 이미 8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주는 무심함이 내게는 참기 힘든 가혹 함이었지만 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10년을 채우고 20년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급하게 내 마음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내가 미력하나마 당신의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끝없이 추구해야 할 일이 있고 열정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혼자보다는 우리 함께한다면 당신이 꿈꾸는 세계를 조금 더 빨리 이루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일을 사랑하며 당신이 일하는 모습까지 더없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탁입니다. 나를 남자로 받아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는지, 이미 잠들었는지, 일에 열중하는지,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내 간절한 마음이 당신에게 전달되리라고 믿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스했던 바닷가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를 본다면, 당신은 내 마음이 그때 그곳에 영원히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나의 사랑은 어느 누구라 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은 절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만 뿌리박고 살 수 있는 한 그루 나무이니까요.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프로포즈」중에서

아마도 내 안에서 당신에 대한 DNA가 새로 생겼나 봅니다. 밥을 먹으려 숟가락을 국물에 담그면 당신 눈빛이 떠지고 책 페이지 사이사이마다 당신 얼굴이 전등 켜지듯 확 떠오릅니다. 길을 걷다가 당신 생각에 발부리가 걸려 넘어지기 일쑤고 전철을 타면 온통 당신이 가슴속에서 덜컹거립니다. 유리창마다 당신 모습이 얼비쳐져 있고 빈 벤치마다 어김없이 당신의 DNA가 내 속에서 갑자기 생겨난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내 모든 것이 당신만을 의식하게 됐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믿겨지십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당신이란 DNA를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만을 사랑할 수 있는 DNA를 가진 사람입니다.
---「바다가 들어오는 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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