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난 마법의 선물이란 말을 좋아했다. 누군가에게 마법의 선물을 주려면, 우선 온갖 기괴한 재료를 섞어 푹푹 끓여낼 수 있는 딸기색 가마솥이 있어야 하겠지. 그리고 어디로 배달을 나갈지 목적지를 알려주는 수정구슬도 필요할 테고. 그렇게 해서 약을 짓고 목적지를 확인하면 난 멋들어진 깜장망토를 두르고 고깔모자를 쓴 다음 마법 지팡이를 타고 하늘을 날아올라 마법의 약을 배달 나가는 거다. 와인이 엎질러진 색깔의 하늘이나 블루 벨벳이 내려앉은 것 같은 밤하늘을 휘휘 날아서 말이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흔을 진득하게 끓여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글을 계속 쓰기 위해서는 솥단지에 넣어야 할 다른 재료들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백 년 묵은 지네랑 말린 두더지, 오래된 박쥐 이빨이나 순금색으로 피어나는 매그놀리아 꽃잎 같은. 그건 어린 시절 직접 겪었으나 세월에 따라 자기 내부의 심해에 침전한 기억이거나 끝내 토로하기 망설여지는 은밀한 죄 같은 거다.
--- p.9~10
누구나 생에 한 번쯤은 강렬하게 무언가에 매료된 적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내 영혼을 잠식하는 다른 사람의 글이었다. 이를테면 나에게 그 글은 J. D. 샐린저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였고, 아서 C. 클라크와 김용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다른 것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자신의 내밀한 꿈은 그 자신이 진정으로 매료된 것에 닿아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재능이 온전히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신이 매료된 것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것에 불씨를 당겨 자신의 영혼에 달아오르는 숯불로 오래 품도록 만드는 것. 만약 《꿈을 실현하는 완벽한 매뉴얼》이란 책이 있다면 이 두 가지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이리라.
--- p.28
세상에 태어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지구에 잠깐 들른 여행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모든 인간은 잠시 출발지를 잊었으나(모든 여행객들은 여행 기간 동안 고향을 잊는다) 두근두근 기대감을 가지고 여행지 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생명을 얻은 것도 굉장한 행운인데 지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목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최초의 근원은 사춘기 시절 읽은 생텍쥐페리의 문장 때문이다. “가장 멋있게 인생을 사는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동시대의, 그리고 먼 훗날의 여행자들에게) 다정하게 조언했다.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불만을 가질 순 있을 것이다. 마치 여행지에서 풀어본 캐리어에 미처 담아오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고 속상해하거나 부족한 여행 경비에 아쉬움을 갖는 것처럼. 학창시절의 나로 말하자면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상에서 불가사의하게 사라지는 것으로 인생을 마무리한 비행사이자 작가인 생텍쥐페리의 조언을 늘 새기고 있었기에 난 직장에 충실하면서도 아름다움과 진리의 목격자로 살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내가 얘기하는 목격자는 니체가 얘기한 위버멘시에 견줄 수 있겠으나, 내가 꿈꾼 것은 낭만적인 위버멘시였다.
--- p.40~41
그러니 이제야 말할 수 있겠다. 세상에 쓸모없는 책은 없다. 좋은 책과 더 좋은 책이 있을 뿐이다. 더불어 그 시절 ‘말들의 정류소’에 고여 있던 언어들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쯤에게는 승천(昇天)하는 꿈의 전령이 되어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어느 비 오는 새벽, 내가 어머니와 잠시 재회한 것처럼 말이다.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간절함을 전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기에 말은 탄생했을 것이다. 무심코 털어놓은 진심의 문장들, 머뭇머뭇 눈빛으로 보내는 침묵의 말들, 비 내리는 새벽 다녀간 흔적으로 남기는 꽃잎의 언어들, 고통과 상흔을 달래는 손짓들. 잠시 말들의 정류소에 거주하고 있다가 이윽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음을 전하는 나와 당신의 가여운 언어들.
--- p.75~76
그런 이분법에 속하는 이름 중에 루카치가 있다. 즉 ‘루카치를 읽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아니 루카치를 읽어본 사람이라도 더 엄밀하게 구분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루카치를 읽으며 울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다. 내 인생에 있어 루카치를 읽으면서 눈물을 글썽인 사건은, 이를테면 장준하나 노무현이 남긴 투박한 편지 혹은 체 게바라나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문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힌 경험과 등치된다. 한 인간의 열정을 내 내면의 거울로 삼아, 인생의 지도로 여기는 이러한 경험은 우주와 세계에 대한 일종의 존재론적 각성인 것이다.
사실 이런 경험을 종교적인 개념으로 치환한다면, 이는 신학에서 말하는 자연계시에 가까운 경험이리라. 어쨌거나 루카치를 읽으며 눈물을 글썽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온갖 종류의 불온한 프로파간다가 만연한 사회에서 루카치는 인간이 신성한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영혼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루카치는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들 사이에 은밀한 연대의식을 부여한다는 것을.
--- p.140~141
소소한 인연이 닿아 황현산 선생의 강의를 몇 번 들은 적이 있기에 당신을 선생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존경할 선생이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큰 행운일 것이다. 슬픔이 범람할 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진심을 담은 글들이 나의 서가에 수호천사처럼 다정하게 꽂혀 있다는 것도. 그렇게 나를 일깨워주셨던 황현산 선생이 이제 돌아가셨다. 황현산 선생이 좋아했던 폴 발레리의 시 가운데 “낯선 영혼을 영원회귀로 끌어들이고”라는 구절이 있다. 시가 가지고 있는 우아한 장점 중의 하나가 영혼을 영원으로 이끄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문장이다. 비록 그것이 유리창으로 번지는 빗방울처럼, 알아챌 수 있는 눈치를 지닌 이들에게만 보이는 것이라도. 나에게는 황현산 선생의 글과 강의가 그랬다. 선생의 문장은 이미 내 피와 살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당신 영혼의 이 그램 정도는 내 속에 살아 있음을 믿는다.
--- p.188
스틸리 댄이 데뷔한 1970년대 미국 사회는 화려했던 이전 시대의 히피 문화를 마감하고 로널드 레이건류의 정치적 보수주의로 회귀할 무렵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식의 해방 정신은 아직도 젊은 세대의 기억 속에 찰랑거리고 그 마지막 불꽃을 위태롭지만 차마 꺼트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등장한 스틸리 댄이 지적인 세련미를 풍기는 화음과 가사를 통해 당시 인텔리전스를 휘어잡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난 개인적으로 스틸리 댄 말기의 최대 히트작 〈Aja〉는 매우 독창적이던 그들의 음악이 스스로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대중들의 기호에 영합한 타락이었다는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그들의 음악은 신비롭다. 가사는 W. B. 예이츠의 시처럼 상징적이고 화음은 차분히 가라앉는 냉소를 띠었다. 그건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는 허위의식이었을까? 설사 그렇다 해도 그들의 보컬에는 욕망에 대한 어렴풋한 향수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유리된 도시의 비애가 아로새겨져 있다. 사상사적으로 라오쯔(노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서구문명의 감수성이 그 정점에 달해 도시 문명의 욕망과 작위성을 돌아본다면 어떨까? 그렇다. 어느 늦가을 밤, 그러한 시대정신이 다운타운에서 헛되이 쌓아놓은 바벨의 탑을 맞닥뜨린다면 아마도 비애에 젖어 나직한 한탄처럼 월터 베커나 도널드 페이건류의 음악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 p.208~209
하지만 인생이 재밌는 것은 누구나의 삶에서나 적어도 한 번쯤은 ‘구련보등’이나 ‘국사무쌍’과 같은 패를 쥐어본다는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 패와 마주쳤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그 기회를 무심코 흘려보내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오늘 저녁에 파스타를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거절한 것이(그 레스토랑에 갔으면 끝내주게 판타스틱한 일이 생겼을 텐데), 혹은 혼잡한 지하철에서 옆에 있던 사람이 우산을 두고 내렸는데 그걸 일러주지 못한 것이(그렇게 해서 알게 된 인연이 나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채지 못하고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다. 그건… 자신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패’를 잡은 것을 알고 있어도, 불행히도 그 게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대타의 경기라는 걸 알 때인 것. 마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초반부의 츠네오처럼 말이다. 파스타로 유명한 레스토랑이나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처럼 차라리 모르고 지나쳤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이 잡은 경이로운 패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안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도 슬픈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그 패가 내 손에 들어온다면 난 가만히 그 감촉을 즐겨볼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해 엄청난 아쉬움으로 마음의 엔진은 격렬하게 타들어가더라도 난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다. 삶의 우연 혹은 운명이 지어내는 미학(美學)이 잠시 내 뺨을 희롱하고 스쳐 지날 때, 난 그 바람이 닿는 곳을 향해, 할 수 있는 한 힘껏 팔을 뻗어볼 뿐이더라도 말이다.
--- p.24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