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가전제품 청소부의 진솔한 노동 이야기
이 책은 시인인 저자가 자신과 가족의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가전제품 청소 노동일을 하면서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그것이 가르치는 각별한 의미를 시인의 섬려한 감수성으로 해석해낸, 독특한 콘셉트를 가진 산문집이다.
저자는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같은 소형 가전제품을 청소하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이런 소형 가전제품을 비치해둔 일반 가정집, 사무실, 식당, 카페 등을 직접 방문하여 청소 노동한다. 저자는 이 청소 노동을 하기 위하여 고물 제품과 공구와 장비 들을 구입하여 수차례 분해와 조립을 거듭하며 기술과 감각을 익혔다.
저자가 접하는 가전제품은 금방이라도 고장이 날 것 같은 오래된 구형부터 최첨단 기능을 갖춘 최신형까지 다양하다. 노동의 현장에서 접하는 가전제품의 상태가 다양한 만큼 사람들도 다양하다. 저자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제품과 접촉하며 기계의 원리를 배우고 사람의 마음을 배운다.
저자는 때로는 가슴을 울리는 사연을 지닌 사람을 만난다. 때로는 냉정하고 욕심 많은 사람을 만난다. 때로는 썩을 대로 썩은 냉장고를 만나 새것처럼 깨끗하게 청소하고 때로는 수십 년 전에 생산되었지만 꽤 잘 버티고 있는 오래된 제품을 만나기도 한다. 저자는 시를 쓰는 마음으로 노동을 하고 노동을 하며 시의 세계를 확장한다.
문학이 말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 산문집에는 노동을 몸에 익힌 자만이 전할 수 있는 특별한 정서과 성찰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시인 조수형은 약관의 나이부터 다양한 노동 체험을 해왔다. 그는 이십대 중반부터 자동차나 기계에 주로 쓰이는 오토미션 수리점을 운영해보기도 했고 원양어선을 타보기도 했고, 또 룸살롱을 경영해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부침을 겪으면서도 노동 행위를 멈추지 않고 구리농수산물 도매시장 잡역, 보조 수리기사 등 자신과 가족의 삶을 책임지기 위한 생활에 성실하게 투신했다. 그것은 물론 사활을 건 고단한 노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2015년 부인과 함께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가정에 필수적인 전자제품을 청소하는 회사를 차리고 지금까지 그 현장을 지키고 있다.
보통 노동에 대한 자의식과 문학(예술)에 대한 자의식은 상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은 고도의 관념적 이데아에 대한 정신의 응전과 그 표현이고, 노동은 몸의 실용적 기능을 기계적으로 활용하는 물리적 행위로서 받아들여지는데, 이때 자의식은 그것에 대한 지위를 규정하기도 한다. 예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따라 문을 숭상하고 노동을 상대적으로 폄하해온 전통도 여기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나라에서 시인들의 직업은 글쓰기강사, 교사, 교수, 출판 편집인 등 몇 가지 유관 직종으로 제한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문학이 사회를 개조하는 무기로서 쓰이던 시절 인상적인 시업을 닦았던 노동자시인들은 죄다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특별한 직업을 갖지 않은 채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노동과 괴리된 문학이 말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 미학적 준거, 문학적 태도, 세계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노동하지 않는 삶에서 길러지는 모티프가 문학적 자의식을 성숙케 하거나 진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보편에 타당할 것이다. 인간은, 정직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독립시키고, 노동과 그에 주어지는 보상이라는 일종의 계약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자아를 구축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함께 쓰는 노동
저자와 같은 가전제품 청소업 종사자는 노동을 통해 수요자가 요구하는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다른 블루컬러와 다를 게 없지만, 노동의 현장이 의뢰인이 주거하는 내부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예외적인 요소를 갖는다. 육체노동은 물론이거니와 작업 환경의 특성상 의뢰인을 응대하는 감정노동까지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양한 화소話素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이를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감성으로 캐치하고 그것이 안겨주는 인사이트를 맛깔스러운 문장으로 묘사한다. 특히 저자는, 몸을 쓰는 노동이 사실은 몸만 써서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을 같이 쓰는 일이라는 비범한 메시지를 본문 속에서 풀어놓는데, 그 통찰의 벼림이 상당히 매혹적이다. 이를테면, 의뢰인이 자기 집 애완견에게는 연신 물과 간식을 주면서도 몇 시간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 중인 저자와 조력자에게 물 한 컵 가져다주지 않았던 일화를 전하면서 조력자(당시 일시적으로 일을 배우려고 왔던 초보)가 그것을 불평하자 저자는 그를 위로하고 달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노동이 환대받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노동 서비스 작업자들은 의뢰인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출장을 간 사람들이지 그 집의 노복이 아니다. 당연히 일을 의뢰한 것이 어떤 사회적 계급을 상정하는 것이 아닐 텐데,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스스로 확인시켜야 만족하는 분들이 있다.”
이밖에도 제품의 정확한 상태를 설명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작업을 의뢰 받은 세탁기와 너무나 연식이 오래되어 고장 우려가 큰 세탁기를 책임감 때문에 청소하다가 필연적으로 고장이 발생했을 때, 책임 전가나 회피 없이 상태가 나은 세탁기를 자비로 구매해 대체해준 일화도 들려주는데, 저자는 이를 통해 고객과 단단한 신뢰관계를 구축하면서 결과적으로 이기지 않으면서도 지지도 않는 삶의 기지를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책이나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임에 명백하다.
잔잔한 감동과 유머러스한 통찰, 일상생활의 지혜
봉사활동을 갔을 때의 일화도 인상적이다. 함께 동행했던 자원봉사자들이 바퀴벌레가 가득한 누추한 집안 환경 때문에 집주인을 책망하면서 불평을 터뜨릴 때, 솔선수범을 통해 일행들에게 넌지시 각성을 안겨준 것인데, “우리도 바퀴벌레를 무서워하지만 바퀴벌레도 우리를 무서워 할 것”이라는 유머를 곁들인 저자의 통찰은 이런 것이다.
“사람은 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부분도 있기에 내 마음의 상태가 상대방에게 내 마음처럼 전달될 수도 있고 정반대일 수도 있다. 표정관리를 한다고 해도 결국 ‘나’는 드러난다. 내 마음을 닦다 보면 내 표정이 뒤따라오는 것이니까 억지로 이해시킬 일이 아니다.”
곳곳에 소개되는 저자의 시와 더불어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의 관리법과 청소법이 번갈아 소개되어 있는 점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래고 보듬어가는 과정과 가전제품을 고치면서 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이 시인의 일상에서 중첩되어 나타난다. 시를 쓰는 것과 가전제품을 고치는 것은 괴롭고 어긋난 처지를 보통의 삶으로 되돌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행하는 구도의 과정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 책은 이렇게 한 성실하면서도 영민한 시인이, 육체 노동이 환대받지 못하는 시절의 노동자로, 그리고 고단한 가장으로 사는 일의 본질적인 형편과 그 실존의 태도를 낮고 정직한 문장으로 그려내는 책이다. 페이지의 행간마다 독자들 양심의 통점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착한 서정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