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만 년 전, 세계 각지로 퍼져 사는 현재 인류의 직접적인 선조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이란 뜻)가 동아프리카 지구대에 드디어 출현합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일부는 약 10만 년 전 악화된 자연환경을 피해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북쪽 끝인 시리아에서 아프리카 북부와 서아시아의 건조지대로 이주했고, 그곳이 새로운 세계사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위대한 여정(The Great Journey)’을 떠나 지금과 같은 지구촌 규모로 거주공간을 확대했습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에서 뻗어나간 세계」중에서
이집트의 통치자인 파라오(왕)는 관료와 신관을 지휘하고 신으로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수확물의 약 20%를 세금으로 징수했고 상업도 통제했지요. 이집트는 사막, 바다, 폭포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나라였고,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되기까지 26개의 왕조가 교체되었습니다. 나일 강이 간선 도로(수로)로서 동지중해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경로였습니다.
---「건조지대의 4대 문명」중에서
기원전 6세기, 이란고원을 나온 페르시아(이란)인이 군사 정복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각 문명을 통합하고 ‘세계 최초의 제국’인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페르시아 제국)를 성립했습니다. ‘왕중왕’이라 불린 왕은 조로아스터(Zoroaster)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의 대리인으로서 군림했습니다. 각지의 주요 거점을 잇는 ‘왕의 길’을 정비하고 주지사에 해당하는 사트라프(Satrap, 왕의 대리인)를 각 주에 파견해 연간 약 36만 7,000킬로그램의 은을 세금으로 징수했습니다. 또한 동전을 만들어 전 제국에 유통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과 로마 제국」중에서
4세기 초에 들어서자 갠지스 강 중유역에서 굽타 왕조가 성립했습니다. 굽타 왕조 시대에는 전통적인 브라만교를 중심으로 한 서민 신앙과 불교, 자이나교(Jainism)가 섞이면서 우주 만물의 윤회를 설파하는 힌두교가 성립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는 민중과의 연결고리가 약해 이 시대에 힌두교에 흡수되었습니다. 또한 ‘공(空)’의 관념에서 영(0)의 개념을 도출해, 인도 숫자에서 생겨난 아라비아 숫자와 함께 세계로 퍼졌습니다. 굽타 왕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침입한 유목민인 에프탈(Ephtalite)족에게 서쪽 영토를 빼앗긴 후 쇠퇴하여 550년경 멸망했습니다.
---「인도 제국과 중국 제국」중에서
대규모 영역을 지배하며 풍요로워진 이슬람 교단에서는, 유력 부족이 교단을 지배해야 한다는 수니파와 마호메트의 평등주의를 주장한 시아파의 대립이 격렬해졌습니다. 수니파 호족이 시리아를 중심으로 우마이야 왕조를 창건했습니다. 그러나 8세기 중반, 반체제파가 페르시아인과 손을 잡고 이라크에 아바스 왕조를 세우며 칼리프라 칭했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아랍인이 세운 정복 국가였던 우마이야 왕조를, 이슬람교도가 모두 평등하게 대우받는 이슬람 제국으로 바꾸고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를 건설했습니다. 그 결과 정복과 전쟁의 시대가 경제의 시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유목민 ‘폭발’의 시대」중에서
원나라의 지배를 벗어나려 했던 홍건의 난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주원장(명나라를 세운 태조. 홍건적 곽자흥의 수하로 들어간 후, 홍건적 군벌 중 가장 강력한 3대 세력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이후 나머지 두 세력을 제치고, 강남을 평정해 명나라를 건국했다)은 호풍(유목 문화와 제도)을 철폐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명나라를 건국했습니다. 그리고 징세와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이갑제라는 조직으로 위에서부터 농업 사회를 재편했습니다. 해금정책(민간 상인의 해외 무역을 금지하는 정책)을 취해 유라시아 경제에서 벗어났고, 중화사상에 기초한 조공 무역(감합 무역)으로 전통적 국제질서를 재건했습니다. 3대 영락제(永樂帝)는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베트남을 정복했습니다. 이슬람교도였던 환관 정화에게 27,000명의 장병과 60여척의 함대를 내리고 인도 서안과 페르시아만(일부는 동아프리카)으로 남해 원정을 떠나게 한 결과, 조공 사절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각지에서 재건된 초거대 제국」중에서
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의 엔히크(Henrique) 항해 왕자가 아프리카 서안을 탐험하면서 시작됐는데,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가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발견하면서 더욱 탄력이 붙어 1490년대, 단번에 발전했습니다. 1490년대에 일어난 탐험 항해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하며 중국 및 ‘황금의 섬 지팡구’로 항로를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실제로는 ‘신대륙’이었지요). 1493년, 콜럼버스는 다시 항해해 카리브해에 위치한 에스파냐 섬(아이티 섬)에 스페인의 거점을 건설했습니다. 1497년, 영국 왕의 지원을 받은 베네치아의 항해사 캐벗(Cabot, John)이 ‘황금의 섬 지팡구’를 찾아 뉴펀들랜드(캐나다)에 도달했습니다. 같은 해,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da Gama, Vasco)가 희망봉을 우회해 아시아 해역에 진입했고, 그다음 해인 1498년 인도 서안에 위치한 캘리컷에 도달했습니다. 이어서 스페인 왕의 명을 받아 향료 제도로 향하는 서쪽 우회 항로를 개발하던 포르투갈인 마젤란이 1521년 태평양의 존재를 밝혔습니다.
---「대항해 시대와 팽창하는 세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