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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316g | 128*188*20mm
ISBN13 9791187514923
ISBN10 118751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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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갔다.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태어나 처음이었다.
---「첫 문장」중에서

구매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구매였다. 아무리 봐도 조르지오 아르마니 바지와 낡은 운동화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구두도 한 켤레 샀다. 그러나 큰마음 먹고 돈 좀 써보겠다는 호기도 돌체앤가바나 구두 앞에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첫눈에 반해버린 구두였다.
--- p.11

모든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트렁크를 닫았다. 설정해둔 비밀번호로 트렁크가 열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세 자리의 숫자 다이얼을 돌렸다. 트렁크는 찰칵, 하고 열렸다. 단호한 만큼 명징했다. 그는 배신 없이 열리는 트렁크를 보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비밀번호로 태어났어야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비밀번호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그들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을 테니까. 다시 트렁크를 닫고 숫자 다이얼을 흐트러뜨렸다. 이제 이 트렁크를 열어볼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것이다.
--- p.17

이미 짐작했다시피 그는 흑인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검둥이 새끼’라고 부른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는 검둥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순수 한국 혈통이기 때문이었다.
--- p.23

흑인 아들을 낳았다고 늘 억울해하던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도 죽을힘을 다해 이렇게 항변했다. “분명히 말한다만, 난 검둥이와 자지 않았다. 누구보다 결백해. 믿어줄 수 있지?” 그는 울먹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 “난 정말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넌 니 아버지 아들이고 내 아들이야…….” “안다니까.”
--- p.24

자신을 잡상인으로 오해할까 봐 그는 얼른 말을 이었다. “이 트렁크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핸드폰에 가 있던 몇몇 시선들이 그를 향하기 시작했다. 고무된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와 하루 동안만 같이 있어주시는 분께는 트렁크는 물론, 이 안에 든 것까지 몽땅 드리겠습니다…….”
--- p.26

구두를 꿰어 신고 벤치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또 물었다. “혹시 스페인어 할 줄 아세요?” 뭐지? 자기한테 물어보는 게 맞나 싶어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그뿐이었다. 그런데 영어도 아니고 뜬금없이 스페인어라니. 게다가 여자는 그의 피부색을 보고도 그냥 한국말로 묻고 있었다. 그가 졸린 눈을 끔뻑이며 “스페인어요?”라고 되물었다. “네.” 여자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p.49

그가 물었다. “근데 미겔은 왜 이 년 만에 답장을 보내온 걸까요…….” 자기도 그게 궁금하다며 그녀의 눈이 가로등 불빛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저 편지에 들어 있을 테죠…….” 그의 시선이 미겔의 편지로 향했다. 비슷한 처지임에도 그와 다른 삶을 살아냈을지 모를 미겔이 떠올라서였을까. 내내 잠잠하던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두통이 밤의 우울과 짝을 이루려는 순간이었다.
--- p.82

“아, 그러면 되겠다. 제가 식탁 하나 만들어줄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가 “네?” 하고 반문했다.
“저 트렁크요, 아무 대가 없이 갖기엔 너무 고가잖아요.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그가 나무라듯 말했다. “대가 없이 받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소라 씨 시간을 저한테 쓰는 거라니까요.”
그래도 이건 도리가 아니라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근사하게 하나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괜찮아요. 아니, 필요 없어요…….” 그는 극구 손사래를 쳤다.
--- p.110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채 말했다. “그건 핑계고, 혼자라 육 인용은 필요 없다 그거죠?”
속내를 들켜버린 그는 차마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엿들으면 안 되는 비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모르죠? 제가 만든 식탁은 이상한 마력을 가졌다는 거요.”
“그게 무슨…….”
“식탁 주술가라는 말도 못 들어봤죠?”
“주술가?”
“제가 바로 그 식탁 주술가예요. 장담컨대 제가 만든 육 인용 식탁을 집에 들이는 순간 그 의자를 채워줄 사람들이 분명 나타날 거예요.”
--- p.111

G를 처음 만났을 때 G는 벤치에 홀로 앉아 새우버거와 캔 콜라를 먹고 있었다. 그가 바라본 G의 첫인상은 정말 못생겼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발걸음은 성큼 G에게로 향했다. 못생긴 여자라서 G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탈 인형을 쓴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탈 인형을 쓰고 나면 그는 ‘장세오’도 ‘검둥이’도 아닌 그냥 ‘호랑이’가 되었다. 그래서 탈 인형 너머의 그는 언제나 자신감으로 넘쳐났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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