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한테 맞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환자가 정신병이 있다 보니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 못하고 예전에 누가 때렸다고 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환자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시간을 알지 못했고, 우리는 그의 시간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쩌다가 중증조현병 환자가 돼 거리를 떠돌게 됐는지, 어쩌다가 하나뿐인 아들마저도 거주 불명이 됐는지 아무도 말해줄 수 없다. 병원에서 보낸 말년의 시간만 기록에, 그것도 자신을 죽음의 문턱으로 데려간 다른 환자의 형사 기록에 남았다.
--- p.19
국가의 형벌이 한 가족에게, 특히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 사건 전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일개 국선변호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너무 거대한 화두였다. 절절하게 안타까웠던 당시의 마음도 밀려드는 사건에 묻혀 기억에서 서서히 잊혔다.
--- p.31
피고인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변론을 준비하는 대부분의 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에서는 내가 그의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는 게, 그래서 꽤 긴 시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연구했다는 게 억울했다.
--- p.43
“그게 아니고요. 감옥에 오래 있었으면 해서요. 무기징역이나 최소 20년 정도 나올 수 있나요?” 상대방의 예상치 못한 말에 수사 기록에서 본 정신감정 보고서 내용이 퍼뜩 생각났다. 수화기를 고쳐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버지가 집에서 폭력을 행사했나요?” 전화기 저쪽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되도록 중형을 받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을 피하는 목소리는 예의 바르고 차분했다.
--- p.49
“낙숫물이 결국 바위를 뚫지 않습니까. 제게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형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저도 제 몫을 하고 싶습니다.” 반듯한 신앙인으로 살아와서 아직 현실을 잘 모르는 20대 초반 청년이 하는 말이라 여기면 특별할 것도 없는 상황에 나는 뜻밖에도 말문이 막혔다. 삶의 효율에 관해 물었는데 삶의 자세에 대해 답한 우문현답이어서였을까.
--- p.75
집 근처까지 오니 요란했던 소나기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내 몰골은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였다. 집에 들어가 젖은 옷을 베란다에 널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신발에는 신문지를 채웠다. 가방을 열어보니 휴대폰은 다행히 많이 젖지 않았는데 사건 기록은 엉망이었다. 기록을 하나하나 펴서 말리다 그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력도, 과거 병력도 없었던 그녀는 어쩌다가 잠시 피할 데도 없는 소나기에 갇혀버린 걸까.
--- p.124
“밤에 대리 기사 알바 하거든예. 새벽 6시쯤 일은 마쳤는데 그때 자면 오전 10시 재판 시간 맞춰 못 올 거 같아서예. 밤새고 일찍 왔더니 졸리네예.”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고단한 삶의 무게가 드리워진 얼굴이었다. 사기꾼 하면 연상되는 교활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보증금 70만 원을 마련한 젊은이들에게 사기 친 그 파렴치한을 떠올리니 다시 혼란스러웠다.
--- p.145
그는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방심하고 있는 여자들 앞에서 ‘보여줌’의 권력을 즐기면서도(아마 볼품없고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그가 권력자가 되는 유일한 순간일 것이다) 막상 심판대에 서면 피해자들에게, 변호인에게, 판사에게, 자신이 당한 과거의 피해를 들이밀었다. 한때 피해자였던 그는 이제 가해자이면서도 ‘나는 피해자’라는 굳건한 틀 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선고 결과는 징역 2년이었다.
--- pp.171~172
“아빠~ 잘.못.한. 거. 맞.지? 밤.에. 골.목.에.서. 잘.못.한. 거?” 그 말에 대한 답변은 평소 연습이 됐는지 그가 금방 답했다. “응, 내가 잘못한 거여. 다시는 안 그럴 거여.” 그렇게 간신히 재판을 마쳤다. 변호인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피고인의 변명을 듣고 이를 법률적 용어로 바꿔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할을 하려면 전제가 있다. 바로 피고인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격증만 있는 허수아비였다.
--- pp.187~188
‘그래도 내가 변론해서 벌금이 절반이나 깎였잖아, 그 사람도 만족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선고 결과 확인이나 항소 여부는 보통 피고인이 직접 챙기고 결정한다. 상담할 때 이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한다. 항소장을 대신 제출해달라고 부탁하면 당연히 해주지만, 피고인에게 선고 결과를 알려줄 의무나 항소기간 중에 다시 항소 여부를 결정하라고 알려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했다. 내가 잘난 척하며 결과를 예단해서 말한 게 화근이었다.
--- p.247
그녀에게 과연 국가란 무엇이었을까. 정책을 잘못 입안해 시위하게 만들고,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무차별적으로 시위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무수한 SNS와 대조하며 단순 시위 참가자를 찾아내 기소하고, 한편으로는 국선변호인을 붙여주면서 방어하게 하고, 대법원에서 새 법리가 나왔으니 무죄라고 하고, 채증이 위헌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반대 의견으로 당신 말도 일리가 있다며 위로하는, 이 모든 모순이 가능한 존재. 그게 바로 국가였다.
--- p.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