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1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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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52쪽 | 554g | 125*188*27mm |
ISBN13 | 9788950942977 |
ISBN10 | 8950942976 |
발행일 | 2022년 1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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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52쪽 | 554g | 125*188*27mm |
ISBN13 | 9788950942977 |
ISBN10 | 8950942976 |
저자의 말 1부 제1, 2차 중동전쟁(1948전쟁, 수에즈전쟁) 01 1940년대의 팔레스타인 - 들끓는 용광로 02 '떠돌이' 유대인의 역사 - 영원한 이방인들 03 '팔레스타인'이어야만 했던 이유 - 시온으로 돌아가자 04 영국의 이중계약 - 거대한 전쟁의 서막 05 팔레스타인인 VS 유대인 - 다윗과 골리앗 06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동시 독립 -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라 07 도시 전쟁과 도로 전쟁 - 도시 전쟁의 승자 08 도시 전쟁과 도로 전쟁 2 - 도로 전쟁의 승자 09 데이르야신 마을의 만행 - 폭주하는 기관차 10 팔레스타인 난민의 탄생 -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11 건국과 함께 시작된 제1차 중동전 - 이스라엘을 삼등분하라 12 제1차 중동전 1라운드 - 파라오의 군대 13 요르단군의 돌발행동 - 전쟁의 열쇠를 쥔 남자 14 예루살렘 탈환 작전 - 성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15 버마 도로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뚫어라 16 알탈레나 사건 - 하나의 이스라엘군 17 2라운드, 나사렛과 팔루자 - 북부 영토 사수 대작전 18 3라운드, 이스라엘의 대공세 - 분노의 질주 19 이스라엘의 대승 - 치밀한 폭력 20 나세르의 부상 - 이집트 새 주인의 도발 21 아카바만 봉쇄와 카데시 작전 - 또 한 번의 도발 22 영국, 프랑스의 72시간 공습 - 수에즈를 사수하라 23 제2차 중동전 결과 - 최종 승자, 나세르 2부 제3, 4차 중동전쟁(6일전쟁, 욤키푸르전쟁) 01 아랍연맹의 결성과 균열 - 살라딘의 깃발 아래 02 이스라엘의 선제공격 - 시리아 증후군 03 아랍의 총공세와 이스라엘의 공포 - 진짜 전쟁의 시작 04 이스라엘 공군의 완벽한 기습 - 작전명 모케드 05 이스라엘 공군의 레전드 작전 - 시나이 전격전 06 성지를 탈환하라 - 예루살렘 공방전 07 골라니 여단의 신화 - 북부 전선 08 나세르의 운명 - 소모전쟁 09 이스라엘의 변태 - 6일전쟁, 그 후 10 이집트의 환골탈태 - 사다트의 이집트, 다시 전쟁 11 그들이 변했을 리 없다 - 이스라엘의 오판 12 48시간 - 욤키푸르의 포성 13 '승리의 역사'의 승리 - 골란고원전투 14 뒤바뀐 전황 - 수에즈 동편의 전쟁 15 되살아나는 잠룡 - 전세 역전 16 욤키푸르 전쟁이 남긴 것 -전쟁사의 교훈 17 끝나지 않는 비극 - 욤키푸르전쟁, 그 후 18 에필로그 - 지금 INFOGRAPHY 참고문헌, 도판 및 사진 출처 |
새장 안의 새는 우주의 움직임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자신이 생각하는 하늘을 향해 날 뿐이었다. (p.101)
인간은 멀리 있는 폭력에는 공분하지만, 근접한 폭력에는 두려움을 느낀다. (p.163)
저자의 '시간순삭 전쟁사' 시리즈의 첫출발이었던 '병자호란'을 읽고 '잊지 말아야 할 과거, 내일을 위에 딛고 일어서야 할 바닥의 역사'를 무척이나 깊게, 제대로 알게 해준 책이라고 리뷰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1년이 가까이 흘렀다. (22년 3월) 작가의 유튜브도 즐겨보는 편이기에 다음 편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두 번째 출간 소식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런데 두둥, '중동전쟁'이라니. 수많은 전쟁, 복잡한 갈등구조, 엄청난 무기들이 동원된, 그러면서도 부족민들까지. 과연 내가 이 방대한 전쟁사를 읽어낼 수 있을지 겁부터 났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임용한이 임용한 했다'고 말하고 싶다. 평소에도 방송을 통해 세계사를 가장 맛있게, 가장 제대로 알려주던 기량을 책에서도 마음껏 펼치셨으니 말이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실로 방대하지만, 작가의 문장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니 막연하고 어렵기만 하던 '중동전쟁'이 조금은 더 가깝고, 알만한 역사로 바뀌었다.
이야기는 1차, 2차 중동전쟁에서 시작되어 6일 전쟁과 욤키푸르 전쟁에 이르기까지 '4차 중동전쟁'을 모두 풀어낸다. 첫 장에서는 근대의 열쇠를 쥔 유대인들이 일으키는 파장의 시작부터 풀어내기에 긴장감이 가득한데, 특히 마을에 총격을 퍼부을 때는 심장이 옥죄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재앙'으로 불리는 건국 기념일은 전쟁이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모습을 남겼는지 알 수 있는 극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이동이라는 슬픈 역사를 만든 1차 전쟁이 끝이 났다. 그러나 10년도 지나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 미국까지 합세한 2차 수에즈 전쟁은 또 한 번 주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된다. 사실 2차 전쟁은 자세한 내용을 몰랐던 터라, 다른 전쟁에 비해 짧았음에도 고전하며 읽었는데,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내용이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충돌로 발발된 3차 전쟁을 가장 생생하게 그려주시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원래도 믿고 읽는 작가님이지만, 3차 전쟁을 읽으며 어떻게 문장을 이토록 생생하게, 영화를 보듯 쓰실 수 있는지 여러 번 감탄의 마음이 들더라. 정확하게는 문장에 대한 감탄과 전쟁에 대한 잔혹함을 번갈아 느꼈다. 이게 소설이라면 엄청나게 '맛깔나는' 이야기겠지만, 이것은 엄청난 난민을 만든 '잔혹 현실'이니 말이다. 작가님의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어 순식간에 욤키푸르 전쟁까지 진행된다.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뒤편에는 전쟁이 남긴 교훈과 현실을 담담히 이야기하시는데 이 부분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과연 피 위에 그려진 평화가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오래된 의문도 다시 떠올려보며 말이다.
종교, 경제, 국제관계 등을 얽어 서로 뺏고 빼앗기고, 공격하고 공격당하며 중동의 역사를 써왔으나, 결국 승자는 이스라엘이었다. 수많은 목숨을 잃게 한 사건을 두고 '승자'라는 표현은 사용할 때마다 슬픈 일이지만, 이것을 그저 슬퍼하기만 한다면 그 불안정한 땅은 또다시 피로 물들게 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여전히 '휴전' 중인 우리도 과거의 것을 슬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4차' 전쟁을 통해 생각해본다.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라는 작가의 말이, 쉬이 들리지 않는 것은 오늘날에도 세계 모든 곳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기 때문은 아닐까. 정치와 외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두번째 편이 나왔다. 이번 전쟁의 주제는 #중동전쟁. 뭔가 예상외였다. 첫번째 편이 병자호란이었어가지고, 난 당연히 국내 전쟁사가 나올 줄;; 생각해보면 <토크멘터리 전쟁사>만해도 국내 전쟁뿐만 아니라 외국 전쟁까지도 총 망라했었으니, 당연히 외국의 전쟁이 나올 거라 생각했어야 했는데...ㅋㅋㅋ 뭐 여튼, 갑작스런 중동전쟁이라 당황했지만, 중동전쟁도 흥미로운 전쟁사 중 하나니까!
아유 근데, 임용한 교수님 또다른 신간 「세계사를 바꾼 전쟁의 고수들」도 아직 못읽었는데, 허허허허. 뭐... 뭐든 읽으면 되니까..하하하.허허허.
나한테 중동전쟁은 꽤..... 거리가 먼 주제라서 잘 모르는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왠걸. 은근 이런저런 세계사책을 자주 읽다보니 중동전쟁에 대해 얻어걸린 내용들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착착착! 덕분에 이 책을 읽는데도 막힘없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중동전쟁에 대해 배경지식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읽어도 전혀 문제 없는 세계사책이긴 하지만, 난 뭐랄까. 한국사를 제외한 세계사는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이러는 편이다. 그래야 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야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번 봐야 중요한 인물들의 이름이 눈에 잘 들어온다. 예컨데 이 책 「중동전쟁」에선 이스라엘 쪽 중요 인물인 벤구리온, 메나헴 베긴 ... 같은 뭐 그런 이름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쓰잘데기 없는 TMI.
중동전쟁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국가를 세우기 위해 아랍국가인 팔레스타인과 벌인 전쟁이다. 공식적인 전쟁의 승리는 당연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운 유대인 사회다. 근데...이게 쉽게 말하기가 참 어렵다. 중동전쟁 자체가 총 4차례나 일어났기 때문이다. 네 번의 중동전쟁은 유대인 사회가 팔레스타인 땅을 일부 뺏어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건설한 것에 국한되지 않고, 더 많은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 땅으로 확장시켰다. 즉, 중동전쟁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땅 따먹기라고 해야할까?
어찌보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돌 빼내는 형국인데, 이게 또 그렇게만 보기에도 어렵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 가나안(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 먼저 살았던 사람들은 히브리인(유대인)이다. 아 물론 히브리인 역시 이집트에서 박해받다가 가나안으로 넘어오면서, 가나안 원주민을들 쫓아내고 점령한 것이긴 하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가나안에서 잘 살다가 여러 이유로 가나안에서 쫓겨나서, 우리가 아는 영원한 이방인, 유대인이 된 것이다.
히브리인의 왕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아시리아의 신바빌로니아왕국에 의해 멸망했다. 그 뒤로 유대인 자치령은 있었지만, 왕국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 땅은 필리스티아인의 이름을 따서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나라를 잃고 세계 전역으로 흩어졌지만, 놀랍게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했다. p 022
※이집트에서 박해받던 히브리인은 가나안으로 도착. 가나안 원주민을 쫒아내고(!) 도시를 세웠으나 이스라엘(사마리아인)과 유다(유대인) 두 왕국으로 갈라지고 결국 나라가 사라짐. 현재는 ‘히브리인=유대인’으로 정착.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만든 특별한 조항은 바로 ‘토지 소유 금지’ 였다. 이것이 유대인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은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 토지를 소유할 수 없으니 농사도 지을 수 없었던 유대인은 중세시대부터 도시로 몰려들었고, 상인, 수공업, 고리대금, 무역을 장악했다. 당시만해도 산업의 중심은 농업이었다. (…) 유대인의 금화 주머니는 비상시에는 만인을 위한 금고가 되었다. 근대까지도 빈번하게 발생했던 유대인 학살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기근에 시달리거나 공권력이 허약해지는 등 집단의 야성이 이성을 무력화하는 상황이 되면 유대인을 향한 집단 공격이 어김없이 시작되어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지곤 했다. p 024
그렇게 유대인들은 유럽 여러국가에서 살았지만, 오만가지 박해를 받았고, 토지소유 역시 불가능했다. 그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단 한가지, 중세 유럽에 뿌리내린 신앙은 기독교, 즉 예수를 믿는 종교인데, 하필 고대에 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네? 그래서 유대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거다. 거기다 토지소유를 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당시 기독교에서 죄악시했던 ‘금융업, 고리대금업’ 등이었는데, 중세유럽인들은 가끔씩 돈이 부족하게되면 꼭 유대인 박해를 시전하며 그들의 돈주머니를 탈탈탈 털어갔던 것이다.
긴 고난 끝에 근대가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대라는 세계에 특화된 인종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1697년 런던 주식거래소 중개인 100명 중 20명이 유대인이었을 정도였다. 유대인은 빠르게 금융업을 장악해나갔다. 금융, 즉 ‘돈’을 쥐고 있으니 정보력도 늘어났고 시장의 세계화에도 자연스레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됐다. (…) 유대인들은 아직 국가가 없었기에 이런 방법(국제금융, 신용 등)만으로는 재산을 지키기 어려웠다. 따라서 유대인은 자신들만의 ‘지하세계’를 만들어나갔다. 군수품 조달, 밀수, 비밀조직, 정보기관의 전문가가 되었다. 고급 정보를 계속 조달해야 했기에 <뉴욕타임스>, <로이터 통신>등 언론사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도시에서 만개한 문화예술계 인사, 의사, 변호사, 교수 같은 전문직, 언론, 심지어 밀수와 도시 갱단에까지 농부가 대다수였던 토착민보다 유대인들이 앞서서 뿌리를 내렸다. p 026~027
박해받던 유대인들의 위치가 역전된건, 세계가 근대화가 된 이후였다. ‘돈’만 있으면 뭐든게 다 되는 세상, 심지어 지금까지도 동일한 그 세상. 유대인들의 돈주머니는, 자신들의 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된게 중동전쟁이다. 물론 이 외에도 중동전쟁 배경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그 배경에서... 영국이 빠지면 섭하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는 영국 유대인협회장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쓴다. (…) 이것이 유명한 벨푸어선언인데, 이 편지에는 중동 정세를 혼란에 빠트린 두 가지 교묘한 함정이 숨어 있었다. 첫째, 신생 유대인 국가에서 비유대인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필수 조건으로 설정하지 않고 ‘믿는다’, 즉 기대한다는 정도로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은 영국이 이 문제를 전적으로 유대인 국가에 일임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두번째, 영국이 밸푸어선언 이전에 아랍 국가들과 다른 약속을 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은 메카 후세인 빈 알리에게 전쟁이 끝나면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는 서한을 보냈다. (…) 맥마흔선언이 끝이 아니었다. 1916년 5월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가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흑해 남동부를 각각 나눠서 차지하고 위임통치를 시행한다는 ‘사이크스-피코협정’을 체결했다. p 038
정말 세계사에서 온갖 나쁜 사건, 또는 악행에서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 나라가 바로 영국! 원조 섬짱깨이기도 한 영국이다. 그런 영국이 중동전쟁에서도 어김없이 한 건 했는데, 아 한건이 아닌가? 영국은 유대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아랍국가에도 손을 내밀고, 심지어 프랑스+러시아와도 따로 손잡고...이건 이중계약을 넘어 삼중계약이다. 뭐, 당시 세계 정세가 1차 대전으로 인해 이리저리 위험천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러니 유대인 사회가 빡치고도 남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참고 참아온 유대인 사회는 결국 군사단체, 테러단체등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대표 무장조직: 하가나(대표적 무장조직), 팔마(정예특공대), 이르군(강경파 테러조직), 레히(이르군보다 더한 초강경파/슈테른)
중동전쟁의 서막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에 처음 시오니스트들이 나타났을 때, 순박한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손을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지역 중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고립된 곳이었다. 그들도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에 나라를 잃었다. 오스만제국 치하에 살고 있으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도 약했다. 20세기 초반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둘러싸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몰랐다. 이를테면 1차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협정을 맺어서 팔레스타인을 오스만제국에서 떼어내 분할하기로 한 일, 1917년 영국이 벨푸어선언을 발표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세우기로 결정한 일 등을 듣지 못했다. p 049
아랍민족주의는 시오니즘보다 30년은 늦게 개화했다. 오지인 팔레스타인의 자각은 더 늦었다. 1930년대가 되어서야 팔레스타인에 정치 단체가 결성되고, AHC(아랍고등위원회)가 결성되었다. (…) 반면 유대인들은 1930년대에 이미 정예 특공대와 무장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르군에서는 1943년에 전설적인 지도자가 나타났다. p 050
테러전쟁에서도 유대인들이 우위를 보였다. 펠레스타인은 정치든 군사든 끝내 통일된 조직을 만들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조직된 최대 군사 단체는 1945년에 무함마드 알하라위가 창설한 ‘알나나다’였다. ‘알나자다’는 이스라엘의 하가나와 비슷한 조직으로, 전성기에는 20여 개 지부에 8,0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렸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 혹은 훈련이란 퍼레이드나 아마추어 정찰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유대인은 전 세계에 뿌려놓은 디아스포라 덕분에 전문가도 많았고, 후원조직도 막강했다. p 052
유엔 결의안 탄생에는 유대인의 노력과 국제적 로비 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은 나중에 분할안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 신탁통치안을 검토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유대인 유권자들을 의식한 나머지 밀어붙치지 못했다. 또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의 충격도 무시할 수 없었다. (…) 전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전 유럽에서 골칫거리인 유대인을 차라리 팔레스타인에 뿌리내리게 해 지긋지긋한 고리를 끊자는 속셈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증오하고 반성하면서도, 심지어 유대인들이 굴지의 영화사와 언론사를 모두 장학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유대인 혐오는 여전했다. p 056
결국 1947년 5월, 유대인 국가의 수립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약 1년 후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훗날 ‘중동전쟁’이라 명명된 전쟁이 발발했다. 공식적인 개전 일자는 1948년 5월 15일. 그러나 전쟁은 그 전부터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p 058
전쟁이 시작되면서 더 흥미진진해지지만
그건.. 책을 읽어봅시다 ㅋㅋㅋ
중동전쟁의 결말은 위에서도 말했듯 유대국가, 이스라엘의 승리다. 물론 이스라엘이라고 모든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다름아닌 ‘정치’ 였다. 정치가 어떤식으로 전쟁에 개입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데,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정치논리를 적절하게 버무렸고, 반면에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연합은 말그대로 서로 정치싸움만 하다가 개판되었다. 그런데......이렇게 중동전쟁은 끝났게 맞나? 중동은 이제 평화가 찾아왔나? 음. 잊을만 하면 뉴스에 나오는 중동문제를 보면, 중동에 아직 평화는 찾아오지 못한 것 같고..
고대, 중세의 전쟁사와 달리 근대의 전쟁사는 이게 문제다. 끝이 끝이 아닌 기분. 아직도 그 여파가 지속되고 있는 기분.... 찝찌름한 그 기분^_T.
중동전쟁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이중계약부터 시작이 됩니다.
1. 후세인- 맥마흔 선언(1915)
제1차 세계댜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한 선언. 당시 중동에서 영국군 작전기지 역할을 맡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에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는 조건
메카의 샤리프 무함마드의 자손인 후셍인 빈 알리와의 왕복서신을 통해 시리아의 서부를 제외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독립지지를 약속/
2.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
1916년 5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은 남메소포타미아 지역, 프랑스는 시리아 지역, 러시아는 흑해 남동지역을 각각 차지한다는 터키 분할의 밀약영국대표 사이크와 프랑스대표 피코가 터키령인 아라비아 민족지역의 분할을 결정한 비밀협정
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 영국은 이라크, 요르단을 세렴범위로 하고, 러시아에게도 터키의 동부지방을 주며, 팔레스타인은 공동관리 한다는 내용, 그러나 영국은 아랍민족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독립 약속을 한 ㄷ귀의 조역이라 이중외교, 비밀외교로 이후 많은 문제를 야기시킴
3. 밸푸어 선언(1917)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 선언.
밸푸어는 그것을 시오니즘 운동의 후원자인 로스차일드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여기서 영국이 노린 것은, 유대인의 여론을 연합국측으로 끌어들이고 아울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입식을 통하여 중동정책의 포석을 굳히려는 데 있었다. 19121년 산레모회의에서 영국의 정식 외교정책으로 채택되었으며, 1922년 국제연맹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위임통치령으로 결정하였을때, 그 전문에 이 선언이 포함되었다.
중동전쟁
1차 중동전쟁(1948년 5월)
1948년 5월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영국군의 철수완료와 함께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 제국의 정규군(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이 팔레스타인에 참입하여 벌어졌다. 배경은 팔레스타인을 놓고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아랍인의 대립이였다.
유대인에 대한 국제적인 동정심과 지지가 강해지는 가운데 유엔총회는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아여 유대인과 아랍인의 독자적인 국가를 결의하기로 하였고 이후 이 지역에서 무수한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유대인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주변의 아랍국가들이 군사적으로 개입해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함
1949년 7월까지 순차적으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이스라엘은 유엔결의보다 더 넒은 지역을 확보하게된다. 요르단강 서안은 요르단이 점령하고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탕환하고 예루살렘을 분단되어 동측은 요르단 서측은 이스라엘이 지배하게 되면서 마무리가 됨
2차 중동전쟁(1956년 10월)
수에즈운하 문제가 발단이 된 전쟁. 이집트 낫세르 대통령은 1956년 7월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수에즈운하를 운영권을 가진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력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획책하였으며, 이집트와 대립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유인하여 같은 해 10월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강력한 개입과 소련의 흐루쇼프와 불가닌의 협박(수소폭탄 사용)으로 영국,프랑스, 이스라엘 3개국의 군대는 이집트에서 철수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중동에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고 대신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미소간의 냉전구조로 편입되어 갔다.
3차 중동전쟁(1967년 6월)
6일전쟁으로 불리며 말 그대로 6일만에 속전속결로 이스라엘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전쟁이다. 1960년대 아랍국가와 이스라엘의 대립을 더욱 심각해지고 아랍측에서는 PLO의 주체가 되는 팔레스타인 게릴라조직이 겨성되어 이스라엘에 대한 게릴라 공격을 거급하여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슬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되어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골란고원, 시나이반도 전역을 점령하게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6개월후 유엔안보리 결의가 성립하면서 이스라엘은 점령지역에서 철수하고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 평화롭게 지낸다는 '영토와 평화의 교환' 원칙을 확립하고 대패한 아랍국가들 사이에 세속적인 아랍민족주의에의 실망감이 확산되어 훗날 이슬람 부흥주의가 고조되는 주요한 요인이 되거 이스라엘에서는 점령지반환에 반대하는 우파의 대이스라엘주의가 대두하여 점령지로의 이주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4차 중동전쟁(1973년10월)= 10월전쟁, 라마단 전쟁, 욤키푸르전쟁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전격적인 기습공격으로 시작됨. 초반 이집트군이 시나이반도의 이스라엘군을 격파하는등 전과를 올렸지만 후반에는 이집트, 시리아군 모두 3차중동전쟁 휴전라인 이상으로 후퇴하여 고전한다. 하지만 초반에 이스라엘 불패신화를 무너뜨린 이집트의 위신을 급상승하고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고조된 위신을 배경으로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1979년 평화조약에 조인했다(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체결). 4차 중동전쟁에서는 아랍을 지지하지 않는 국가들에게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 정책이 발동되어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하며, 석유가격의 폭등으로 중동 산유국에는 막대한 오일머니가 유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