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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 정수일 회고록

[ 양장 ]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396
베스트
인문/교양 top100 1주
정가
42,000
판매가
37,800 (10% 할인)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2월 0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604쪽 | 1042g | 152*225*42mm
ISBN13 9788950942755
ISBN10 895094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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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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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良識)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를 한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천혜의 행운 속에 나름대로 떳떳한 시대인으로서 삶의 궤적을 개척하느라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와서 이러한 궤적과 행운으로 내 삶의 좌표를 두루 자리매김해 봤을 때, 과연 이 시대가 요청하는 시대인의 반열에 낄 수 있을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 대한 답안은 바로 이 회고록의 전편을 갈무리하고 있는 화제의 총결산에서 얻을 수 있다.

내가 살아온 약 100년의 세월(1934~)은 수천 년 인류 문명사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하지만, 세계사나 민족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난세와 격동으로 점철된 시대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나를 포함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그만큼의 어렵고 복잡한 시대적 소명을 부과하고, 그 수행을 사명으로 기제하고 있다. 그러나 개개인이 처한 구체적 환경과 인성(人性)이 천차만별이라 부과된 시대적 소명을 받아들이는 입장과 태도, 실천하는 의지와 결과는 각인각색일 수밖에 없다.
--- p.18

일체성이 확보된 인류의 미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해답을 내놓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과된 막중한 시대적 소명이다. 나는 작금 새롭게 열린 문명담론의 장에서 그리고 그 담론의 당위성을 현장에서 검증하는 종횡 세계 일주의 과정을 통해 종래의 진부한 정치적·경제적 내지는 군사적 패러다임이나 방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이른바 ‘문명대안론(文明代案論)’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각각 상이한 문명권 사이에 활발한 문명교류를 통해 인류 모두에게 유용하고 수용되는 ‘보편 문명’을 창출함으로써 공생 공영의 미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비전과 실현 방도도 밝혔다.
--- p.32

돌이켜 보면, 나는 세계사와 민족사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격랑을 헤가르며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는 한 시대인으로서 미미한 족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나름 미력하나마 기를 쓰며 살아왔다.이제 내일의 여명을 점지(點指)하면서 저물어 가는 저 노을에 한생을 묻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어언간 황혼기에 접어든 지도 한참이 되었으니.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도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없다. 절명을 각오하면서까지 이루려 했던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그 짐을 후세에게 넘겨주는 것이 가장 아쉽고 통탄스럽다. 못다 한 일, 바라던 일은 쇠잔하는 인생과 더불어 지는 노을이 잉태하고 있는 여명이 트면 누군가에 의해 이어지고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p.33

이렇게 나는 비록 낯선 이역이지만 전통적 민족 정서와 분위기가 그대로 짙고 훈훈하게 깔린 유민 사회 특유의 배경 속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서당을 다닌 일은 지금껏 유년 시절을 기릴 만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부모님에게는 비록 무학이지만 자식들만은 꼭 공부시키고 출세하게 만들겠다는 남다른 소망과 교육열이 있었다. 더불어 사회봉사 정신으로 우리 집 윗방에 서당을 차려놓고 훈장님을 모셔다가 숙식을 함께하면서 동네 또래 아이 10여 명의 부모님들과 힘을 합쳐 서당을 꾸려나가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열렬한 호응과 열성적인 참여 속에 서당은 2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훈장님은 유가(儒家)에 일가견이 있는 노선비로서 현거(懸車, 나이 칠십)를 넘겼지만, 매사에 엄격한 분이셨다. 두메산골 후진 농촌의 자그마한 사설 서당이지만, 훈장님의 가르침에는 한 치의 느슨함도 없었다. 도식대로 회초리를 옆에 두긴 했지만 한 번도 휘두르신 적은 없었다.
--- pp.87~88

사실 나의 고급중학교 시절의 대부분은 두만강 너머 지척에서 일어난 민족상잔의 전쟁과 병행했다. 전쟁이 발발한 첫날부터 시종여일 내 머리를 휘감고 있던 것은 전쟁의 종언과 더불어 오게 될 통일의 그날, 어떻게 ‘겨레 헌신’이라는 초지를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걱정이었다. 나는 민족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이 전쟁이 불원간 민족의 재통일로 결말이 날 것이라는 예단(豫斷)을 내렸다. 뒷일이 보여주다시피 이 예단은 성급하고 미숙한 오판이었다.
--- p.166

이역 중국에서 살아가는 30년간 나는 한시도 내가 당당한 단군의 후예인 조선인(한국인)이라는 점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며, 종당에는 고국에 돌아가 헌신하고야 말겠다는 심지를 줄곧 굳혀왔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가지 특전을 누리면서 모두가 선호하던, 외교관이라는 전도양양한 직업도 보장받았다. 초대 한국 주재 중국 대표인 서(徐) 씨는 베이징대학 동방학부 아랍어과의 후배다. 당시 중국 외교부 내에서는 나만큼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외교관이 별로 없어서 한 몸에 촉망받던 때도 있었다. 지금쯤 카이로대학 유학 시절의 후배들은 모두가 중국 관부의 고위직에 있을 것이다. 외람되지만 자화자찬하는 듯한 넋두리를 염치없이 좀 늘어놓았다. 젊은 시절의 나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데 필요하지나 않을까 해서다. 오늘의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쥘 수 있는 탄탄 가도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주저 없이, 후회 없이 단념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굳이 내가 그렇게 한 것은 지성인으로서 시대와 역사 앞에 지닌 민족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 p.286

드디어 1963년 4월,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 겨레의 품에 안겼다. 파릇파릇 봄기운이 감도는 조국의 산천은 나를 무척 반겨 맞아주었다. 북녘에 돌아와서도 애국 애족의 초지(初志)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현실이고 보면, 그러한 초지는 더더욱 절박하기만 했다. 천리마의 기세로 비상하던 1960년대 초의 북녘은 나의 지적 기여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개인의 전도(前途) 같은 것은 아예 묵살하고 이역을 떠나 낙엽귀근(落葉歸根)의 모국의 품에 안긴 터라서 초지만 실천할 수 있는 일자리라면 가리지 않았다. 평양에 도착한 후 환국자들을 관리하는 ‘교포사업총국’에 제출한 나의 사업 지망란에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국 통일 성업에 이바지하는 어떠한 일”이라고 하고픈 일을 오롯이 밝히면서 그 일을 실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은 1000여 년 통일 민족사에 오점으로 남아 있는 이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비극을 우리 세대에 꼭 종언하고자 하는 일관된 의지와 신념에서였다.
--- p.287

우리는 왜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갈라진 민족을 다시 하나로 묶는 통일에 이르려고 하는가? 물론 더러는 지쳐서 통일을 포기하거나 통일에 회의적이기도 하지만, 통일이 대세임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 중국이나 일본과는 아닌, 남과 북으로 갈라진 동족이 다시 하나로 되자는 것이다. 요컨대, 통일의 근원적이며 일차적인 당위성은 그 어떤 다른 이슈가 아니라, 하나의 민족이라는 데 있다. 우리에 앞선 독일이나 베트남, 예멘의 민족 통일이 바로 이를 명증한다. 그런데 근간에 ‘타민족론’이나, ‘탈민족주의’ 같은 엉뚱한 분단론 망령이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주눅이 들어서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아예 벙긋하지도 못하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럴진대, 우리는 더 늦출 겨를 없이 공명정대한 민족론의 재생에 불을 댕겨야 할 것이다. 사그라드는 분단 극복의 원동력을 민족이나 민족주의 샘에서 새롭게 퍼 올려야 할 것이다.
--- p.329

‘다민족’과 ‘다문화’는 각이한 민족들의 정체성이 존중될 때만이 비로소 시대정신이 될 수 있다. 젊은 작가들이 민족을 혐오한다면,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무엇에 의해 ‘작가다움’을 유지할 것인가. 작가든 학자든 자기 몸에 선천적으로 배어 있는, 그래서 가장 잘 사고하고 표현할 수 있는 민족어로 글을 쓰고 학문을 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작가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문학이나 학문의 보편 가치는 그 표현 수단의 일치성이나 공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 가치의 공통성에 있다. 한국에서의 노벨문학상은 인류의 보편적 정신 가치가 관류된, 한글로 쓰인(물론 외국어로 역출된) 작품에 주어질 수밖에 없다.
--- p.340

서구적 개념을 좇아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를 대치시키면서 민족주의는 ‘보수’로, 국제주의는 ‘진보’로 흑백논리화하는데, 이 역시 시정해야 할 착각이다. 나의 체험으로서도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이고, 참된 국제주의자는 참된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이라는 것’은 역사적 경험이 응축된 동서고금의 대명제다.
--- p.346

진보를 표방하는 어느 한 정당의 정책연구소가 펴낸 홍보책에는 남북한이 ‘1민족 2국가’라는 특수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형제이자 주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극단 상황을 극복하는 데는 남북 관계를 특별한 ‘친구 관계로 전환’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형제이자 주적’이라는 동서고금에 유례없는 반인륜적 관계를 ‘친구’라는 미명으로 포장하려는 얄팍한 꼼수다. 형제면 영원히 형제여야 하지 어떻게 좀 귀찮다고 해서 형제가 ‘친구’로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가. 따지고 보면, ‘친구론’은 ‘분족론’의 아류에 불과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남북한은 하나의 민족으로, ‘친구’ 아닌 형제로, 피를 나눈 혈육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세세연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신념이 없이 민족의 다시 하나 됨을 외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며, 이러한 신념을 굳건히 간직할 때 ‘분족론’은 퇴치될 것이다.
--- p.370

세상이 비바람으로 인해 난세가 되더라도,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에 격폐되어 있어도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깨끗하며, 피는 꽃처럼 낙천적이고 종당에는 결실한다는 멋진 인생철학과 슬기가 담겨 있다고 나는 풀이한다. 그래서 나는 ‘빈 산에 사람 하나 없어 공산무인’의 신세일망정 ‘수류화개’를 감히 내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어서 변질하고 악취가 나며, 꽃은 피지 않으면 꽃이라 할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평범 속에 비범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시 속의 철학이고, 철학 속의 시’이다. 그래서 철학 없는 시는 시가 아니고, 시 없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고들 한다. 인생에서는 늘 그 무엇인가가 살아서 숨 쉬고 움직이며, 커져서 조금이라도 보태지는 새것이 생겨날 때만이 하루하루의 삶이 지겹지 않고 무료하지 않은 법이다. 또한 토실토실한 꽃망울에서 꽃잎이 터져 나와 향기를 뿜다가 튼실한 열매나 씨앗을 남겨놓듯이, 인생에서도 간단없는 노력으로 무언가 하나씩 이루어진다면, 비록 고난의 시련 속에 있다 하더라도 어느 때인가 삶에서 보람과 의욕이 생기고 내일의 희망이 다가오게 마련이다.
--- pp.386~387

돌이켜 보면, 나는 일찍부터 내 삶의 좌우명을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으로 겨레에 헌신하다’로 잡고 그 실천을 위해 나름대로 사심(私心)을 버리고 우여곡절과 간난신고를 마다하지 않은 채 자진해 가시밭길을 뚜벅뚜벅 걸어왔으며, 이 한길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했다. 그러나 ‘유종의 미’다운 ‘미’를 거둔 것은 별로 없는 성싶다. 다만 이 나이까지 살아서 한생을 돌아보게 된 것만도 축복받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 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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