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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발신’ ‘발휘’ ‘발산’, 그 에너지원을 찾아 / 김충식
추천사: 생명, 제자 사랑에 모두 바치다 / 김병종 1장 · 미운 오리 새끼 2장 · 왈가닥 모범생 3장 · 전쟁과 가난, 그리고 의대생 4장 · 봉사 활동에 눈을 뜨다 5장 · 낯선 천국 미국으로 6장 · 이길여 산부인과 7장 · 종합 병원을 꿈꾸다 8장 · 길병원의 성장 가도 9장 · 성공시대 10장 · 어미새의 노래 11장 · 가천의 이름으로 |
저이길여
관심작가 알림신청저김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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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훨씬 일찍 태어났거나, 다른 지식이나 정보를 접했다면 그런 의식이 형성됐을 수도 있었겠지요. 사람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고, 또 한 개인이 겪은 유년 체험이 나머지 생애를 좌우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우리 집안만 해도 동학 운동을 하신 할아버지는 나라 잃은 슬픔을 평생 가슴에 안은 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당신의 일본 유학을 허락하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환경이 달라서, 공부밖에 몰랐고요.
---「격동의 시대를 산 삼대(三代)의 삶」중에서 저는 그래서 시대상이나 당대의 분위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총장님의 성공 스토리도 그렇습니다. 총장님이 ‘이길여 산부인과’를 개원하면서 ‘보증금 없는 병원’을 써 붙였지만, 시대상을 모르면 그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담은 시대상을 조명하고 세대 간의 공감을 넓히는 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과의 ‘이별 여행’」중에서 한 계단, 한 계단씩 난관을 극복하고 매 순간마다 가슴 떨리는 결단을 통해 이뤄낸 성과였기 때문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길여 산부인과, 동인천길병원, 중앙길병원, 가천길대학, 가천의대…… 이런 벽돌, 디딤돌, 어느 것 하나라도 거치지 않았다면 가천대학교는 없었을 겁니다. 저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최고가 되는 꿈을 꾸며 살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밤잠을 잊고 노력했습니다. ---「통합 가천대학교 출범」중에서 맞바람이 바람개비를 돌리듯이, 사람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 삶의 동력을 얻는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그것이 언제나 나를 나답게 단련하고, 성취로 이끄는 동력이 됐거든요. ---「미래 내다보며 오늘도 달린다」중에서 |
영화 〈국제시장〉 또는 〈포레스트 검프〉의 ‘이길여 버전’
일본어만 써야 했던 초등학생 시절, 이길여는 무심코 우리말을 썼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뺨을 맞는다. 그것도 같은 조선인 교사로부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무렵에는 일본군 ‘정신대’ 징발로 온 동네에 난리가 난다. 딸이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혼 바람이 불었다. 이길여의 나이가 서너 살만 많았다면 진작 시집을 갔을 것이고, 지금의 길병원 설립자 이길여, 가천대학교 총장 이길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해방이 되고 이리여중에 입학했을 때 좌우익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어느 날은 좌익 선배 언니의 강권으로, 또 어느 날은 우익 언니의 손에 이끌려 시위 현장에 나선다. 전쟁이 터진 뒤,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한동네에 살던 ‘차순이’, ‘신순이’가 징집됐고 한 사람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학도병으로 나간 또래 학생들, 서울대 의대 동기 남학생들이 전쟁터로부터 영영 돌아오지 않아 가슴이 아팠다. 서울대 의대와 병원이 ‘도떼기시장’으로 불리던 부산 국제시장 부근에 있던 시절, 이길여는 영도다리를 지나 범일동 ‘하꼬방’ 자취집을 오가며 학교를 다녔다. 세 명이 비좁은 방에 누워 잘 수 없어 돌아가며 한 명은 앉아서 공부를 해야 했다. 서울로 환도했을 때 꽁꽁 언 잉크병에 입김을 호호, 불어 가며 공부를 했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매듭지어진 후 영국 등에서 온 퀘이커 의료 봉사단과 함께 군산도립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했고, 인천 용동 우물가에서 ‘이길여 산부인과’를 열었다. 선진 의료를 배우고 싶어 미치도록 미국에 가고 싶었다. 비틀즈가 미국을 ‘침공’(브리티시 인베이전)하던 그해(1964), 미국에 갔다. 뉴욕 맨해튼과 브로드웨이를 거니는 날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산더미 같은 병원 일에 파묻혀 살았다.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조국을 향한 그리움은 〈미션 임파서블〉 같은 미국 드라마로 달랬다. 물론 이때의 〈미션 임파서블〉에는 톰 크루즈가 나오지 않는다. 킹 목사가 암살됐을 때는 워싱턴 D.C.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전쟁이라도 난 것 같은 총소리를 들었고, 로버트 케네디가 저격당했을 때는 뉴욕 퀸스병원 로비에서 동료 의사들과 생중계를 봤다. 그의 증언은 ‘기록 유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일제 강점기, 해방과 분단, 6·25 전쟁과 휴전, 전후의 폐허와 가난 등 시대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원로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역사적 사건과 현장 속에 있었던 그의 증언은 ‘기록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증언들을 누구로부터 들을 것인가. “일제강점기 초등학교의 모범생이었기는 한데 지금 생각해 보면 먹먹한 일입니다. (초등학교) 급장이어서 그랬던 것 같기는 해도 저는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열창했습니다. 아이들이 납작 엎드리도록 하는 교육을 받은 거예요.”(p.63) “저 같은 (중학교) 1학년은 그런 것은 모르고 선배 언니들이 가자는 대로 따라나선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상황도 꽤 있었어요. 어떤 날은 좌익 쪽의 선배가 나가자니까 찬탁 쪽에 서 있고 또 어떤 날은 그 반대(반탁)고…….”(p.69) “(문) 의대생 3명의 자취방이 너비 90센티미터, 길이 180센티미터더군요. 그 넓이에서 어떻게 세 명이 잘 수 있습니까? (답) 짐은 벽장에 두고, 앉는 책상은 벽 쪽에 세워 두고 교대로 잤습니다. 어차피 공부는 해야 하니까 한 명이 앉아 공부하면 그 뒤에 두 명이 나란히 자고, 그러다가 한 사람 깨워 교대하고…….”(p.103) “(1960년대) 한국에서는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미국에 가서 보니 모두 다 초라하고 비참한 수준이었습니다. 인천의 병원에서 쓰던 주사기, 장갑, 거즈, 기저귀. 이런 것들은 미국에 비교하면, 질이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거즈나 기저귀 같은 것은 누더기가 될 때까지 삶아서 다시 썼고요. 주사기는 어머니랑 언니가 매일 밤 소독을 했습니다. 주사 바늘은 숫돌에 갈아 재사용했고요. 그런데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에서는 한 번 사용한 주사기는 그냥 버리더라고요. 세상에.”(p.162) 한류 콘텐츠의 힘, 디테일의 재미 ‘응답하라 시리즈’는 1997, 1994, 1988년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무엇보다 ‘그때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 그리고 정서(情緖)와 분위기를 환기했기 때문이다. 대담자 김충식 교수의 의도 가운데 하나는 이길여 총장의 삶의 궤적과 시대적 상황과 맥락을 교차 비교하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애초부터 “이길여 총장의 삶의 궤적을 아주 세세하게, 그러니까 디테일하게 기록으로 남겨야겠다”(p.21)고 다짐했다. 그런데 추천사를 쓴 김병종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이길여 총장은 “놓치지 않고 챙기는 섬세한 디테일은 사실 보통 사람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p.16)의 인물이다. 그러니 이 책은 디테일의 책이기도 하다. 이길여 총장은 한국 콘텐츠의 디테일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에게 읽어 주었던 『심청전』을 어머니 무릎에 누워 들었던 그는 “저만큼 『심청전』에 대해 애착을 가진 사람도 드물 겁니다. 다들 『심청전』의 역사적 디테일을 모를 거예요. 우리나라 고전 소설은 줄거리와 주제만 갖고 판단해서는 안 돼요. 『심청전』의 진정한 묘미도 디테일에 있거든요.”(p.364-365)라고 단언한다. 그만큼 그는 한국 콘텐츠의 디테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길여 총장의 ‘응답’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1988년은 물론, 1978년, 1968년, 심지어 일제강점기인 1938년까지 ‘소환’할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1978년 이길여 총장은 국내 여성의사로서는 최초로 의료법인을 설립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맥락이 숨어 있을까. 이에 대해 이길여 총장은 “의료 법인이 아니면 ‘병원’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고 한 단계 낮은 ‘의원(醫院)’이라는 이름을 써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의사들이 의료 법인 설립을 기피했던 이유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p.260)라고 설명한다. 1968년 이길여 총장은 미국에 남으라는 주변의 강권한 만류를 물리치고 귀국을 결단한다. 가난한 한국보다, 더 가난한 조국의 환자들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의 귀국을 미국 동료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길여 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저를 딸처럼 아꼈던 퀸스병원 병리과 주임과장) 설리번 박사도 눈시울을 붉혔고요. 그분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가난한 나라, 언제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더 슬퍼했는지도 몰라요. 저의 귀국은 그분들에게 그런 의미였습니다.”(p.194) 1938년 이길여 총장은 ‘미취학 아동’이었다. 그는 동네 친구들과 의사놀이를 했다. 그의 회고다. “그때는 아프면 귀신이 붙어서 그런 거라고 믿었습니다. 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당골(무당)이 와요. 당골이 광목에 쌀 한 됫박을 싸서 이걸 “쒜, 쒜, 쒜” 하고 흔든 다음에 머리에 문지르면 아픔이 싹 가셔요. 차가운 쌀을 머리에 대면 일단 시원하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이 방식을 의사놀이에 써먹은 겁니다. 쌀 한 됫박은 너무 무거우니까 저는 그릇에 담은 쌀을 헝겊에 쌌습니다. 당골 흉내를 내면서 그걸 아이들 머리에 문질러 주고 “이제 귀신이 물러갔다~” “너는 다 나았다~” 선언하는 겁니다. 어떨 때는 “야, 너는 목이 아프다고 해” “너는 손이 아프다고 그래” “너는 배가 아프다고 그래” 하면서 환자를 제가 만들었습니다.”(p.88) K무비와 K드라마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한국 콘텐츠가 지닌 디테일과 섬세한 감정 표현이 비결이라고들 말한다. 이 책에는 위에서 소개한 일화 이외에도 무수한 디테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하나만 들면 1964년 가을 이길여 총장은 30대 초반의 아리따운 여성 친구 두 명과 함께 난생 처음 카바레에 들어가려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유는 ‘여자끼리 와서’였는데 과연 MZ세대가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에는 그에 대한 해답도 있다. 이길여로부터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시인 서정주가 ‘자화상’에서 설파한 것처럼 사람은 ‘읽고’, ‘읽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 세대는 이길여 총장으로부터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우선 ‘애국심’이 가장 쉽게 읽힌다. ‘애국’은 이길여 총장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하나다. 두 가지 언급만 옮겨본다. “누차 말씀드렸던 것처럼 봉사는 의사로서의 마음가짐이고, 정신적 모토였습니다. 애국은 6·25 때 남학생 학우들 학도병 출전하고 돌아오지 못한 이후로 다짐했던 것이었고요.”(p.266) “해마다 학생군사훈련단(ROTC) 입영 훈련장을 찾는다. 서울 의대 동기들이 6·25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애국’을 다짐한다.”(p.491 사진 캡션) ‘사랑’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단어다. “때를 놓쳤다기보다는 너무 깊숙이 환자들에게 빠져 버렸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나는 환자에 미쳤었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만 사실 환자도 저에게 미쳤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를 정말 아끼고 사랑해 주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니면 진찰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 환자를 놔두고 나만 잘살려고 미국으로 다시 떠난다?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p.224-225) “무료 검진이 본업은 아니었고, 여력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으로 한 것이지요. 외딴 섬마을 무료 진료를 하다가 양평, 철원 같은 취약지 병원에 앞장서게 되었고, 그러한 환자 사랑은 나의 철학일 뿐만 아니라 길병원 역사의 자랑이라고 생각합니다.”(p.287) “사실 저는 공익 경영이니 윤리 경영이니 하는 전문적인 용어는 잘 모릅니다. 다만 사랑으로 경영했을 뿐이에요. 무당벌레 버스 같은 것도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p.505) 어떤 이는 이길여 총장으로부터 ‘통찰’을 읽을 수도 있다. 가령 그는 일본의 국력과 기세가 무섭게 뻗어 나가던 1970년대 수도 도쿄에서 일본의 단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특성인데요. 너무 폐쇄적이었습니다. 학술 콘퍼런스에서 느낀 것인데 일본 학생들의 수준은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굉장히 높아요. 그런데 원어로 하지 않고 전부 일본어로만 하는 거예요. 의학 용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학도 세계를 향해 열리는 것이 아닌, 일본식 의학 같았어요. 한계가 있겠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p.247-248) 이길여 총장은 한국이 미국보다 의료 선진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 어떤 분야에서도 우리나라가 미국을 앞선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2006년경에 한 적이 있다. “그때 제가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의료 선진국일 수 있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 나이면 2년마다 무료 건강보험 검진을 받잖아요. 미국에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p.469) 또 어떤 이는 그로부터 ‘성공 노하우’와 ‘보스 기질’, 또는 ‘카리스마’를 읽으려 할지도 모른다. “저는 뭐든지 대장이어야 했어요. (웃음) 어릴 때부터 이런 게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대장이야, 할머니는 부지런한 분이야, 그런 기억이 입력돼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마을 부녀회장을 맡으셨는데 집안 어른이든, 동네 어른이든 간에 어머니가 앞장서서 ‘하자’고 하면 그게 곧 동네의 결정이 되는 거였습니다.”(p.39) “제가 그래서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하면 운도 자기 편’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p.395) 저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최고가 되는 꿈을 꾸며 살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밤잠을 잊고 노력했습니다.”(p.478) “빈말이 아니라 저의 성공 비결 중의 하나가 잘 웃는 거였습니다. 웃음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열지 못하면 다 드러나요. 진정으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활짝 웃으며 다가가면 상대방도 나를 좋아하게 돼 있어요. 제가 만난 환자가 그랬고, 의료 또는 교육 관계자, 기자들이 그랬습니다.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분들이 저를 좋아한다는 걸 제가 느끼겠더라고요.”(p.483) “한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날 저녁 6시쯤에 부동산 업자로부터 (가천대 하와이연수원으로 쓸) 적당한 매물이 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간부들에게 함께 가자니까 다들 지쳐서 ‘제발 살려 달라’고 하더군요. (웃음) 결국 저 혼자 갔습니다.”(p.486) 이 밖에도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이길여 총장에 대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그에 대해 온전히 담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길여라는 사람’의 매력이다. 다만 매력은 느낌과 같은 것이어서 그런 느낌을 받은 독자가 있다면 “매력이 있다는 말이 특히 마음에 드네요”(p.508)라고 말했던 이길여 총장은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