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유럽의 병자(病者)다. 경제학자들은 프랑스의 경쟁력이 추락했다고 진단한다. 평론가들은 프랑스가 쇠락했다며 입방아를 찧는다. 외교관과 군인 들은 프랑스의 대외 전략 수준이 낮아졌다며 조용히 한탄한다. 심리학자들은 프랑스의 염세주의를 걱정한다. 여론 조사 전문가들은 프랑스의 미래가 절망적이라고 내다본다. 고매한 영혼들은 프랑스의 자폐성을 규탄한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은 고국을 떠난다. 프랑스를 매우 사랑하는 외국인들은 프랑스의 학교, 문화, 언어, 풍경, 음식의 쇠퇴를 걱정한다. 프랑스는 걱정하게 만든다. 프랑스는 걱정하게 되었다.
---「머리말」중에서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전쟁의 희생자들이었다. 세대, 성별, 계급을 둘러싼 전쟁이었고, 파스칼 판사와 프롤레타리아 좌파당의 옛 동지들이 승리한 전쟁이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백인 남성은 이제부터 평생 죄인일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유죄이며, 절대적으로 유죄이며, 영원히 유죄이다.
---「1970~1983: 역사는 우리의 법전이 아니다」중에서
드골 장군은 제5공화국의 기관들을 새로운 집정 정부처럼 구상했다. 그것은 당파, 파벌, 재벌들의 놀이에 휘둘리는 정부에게 행동의 자유와 효율성을 되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경고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선 프랑스가 있는 것이고, 다음이 정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둘의 주요한 이해관계가 보호되는 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의 죽음 이후, 우리는 피라미드를 뒤집어 놓았다. 우선 법이 있고, 이어서 국가가 있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개적으로 모욕당하지 않을 때 프랑스가 있다.
---「1970~1983: 역사는 우리의 법전이 아니다」중에서
두 번째 프랑스적 모순이 발생한다. 프랑스인 조상을 갖고 있는 전통적인 가족은 개인주의적인 압력 아래 “진보”라는 명분에 항복해야만 한다. 같은 시기에, 가장 시대에 뒤떨어지고, 가장 가부장적인, 즉, 가장 전통적인 마그레브 가족은 프랑스적 가족을 계승하라고 초대된다. 상징적으로 그리고 인구 통계적으로 보상하기 위한 것처럼. 그들은 프랑스 가족을 구원하러 오라고, 비어 있는 자리들을 채우라고, 프랑스 가족을 대체하라고 초청받는다.
---「1970~1983: 역사는 우리의 법전이 아니다」중에서
바르는 굴복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1978년 그는 가족과 함께 돌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1만 프랑의 수표를 지급하는 “본국 귀환 장려책”을 개시했다. 의무가 아닌 선택이라는 프랑스적인 소심함은 그 법안의 발기인들을 배신했다. 스페인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은 수표를 받아들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그들이 남기를 바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떠나기를 원했던 마그레브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1970~1983: 역사는 우리의 법전이 아니다」중에서
바로 같은 해인 1980년, 미국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중에서 도 아내에 의해 버려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려주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똑같이 보여 줬다. 20년 후, 세골렌 루아얄은 아버지들에게 11일간의 육아 휴직을 허가했다. 남자는 평범한 엄마가 되었다
---「1970~1983: 역사는 우리의 법전이 아니다」중에서
유럽 내 국경 폐지, 금본위제의 종말, 유가 등의 경제적 격변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에 척추를 제공한 계층적 구조가 68혁명에 의해 참수당한 것이 왕정복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대혁명과 제국 이후의 카페 왕조가 증명했다.
---「1970~1983: 역사는 우리의 법전이 아니다」중에서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 지도자들은 권력이라는 단어(독일어로 히틀러적인 울림을 가진 ‘마흐트(Macht)’)를 피하려는 독일식 편집증을 취할 것이며, “책임에 관한”이라는 끔찍한 표현을 선호할 것이다. 기업들의 단어에서 빌려온 “거버넌스”라는 단어는 “정부”를 대체했다. “국익”은, “유럽의 일반적 이익”, “협력”과 “평화” 뒤로 사라져야 하는 “국가 이기주의”가 됐다.
끔찍한 것들을 글로 새기면, 그것들은 결국 일어난다
---「1970~1983: 역사는 우리의 법전이 아니다」중에서
1986년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의미다.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아무도 혁명을 원하지 않았고, 이해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우파에 의해 결정된 민영화는 1981년 좌파의 국유화에 대한 응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념적이고 역사적인 역할극에 빠져 있다. 미테랑의 사회주의자들이 레닌을 연기했던 것처럼 시라크의 우파는 대처를 연기한다.
---「1984~1992: 대의를 섬기고 봉사하자」중에서
이것은 사실 계급 투쟁의 극치다. ‘메이드 인 프랑스’ 프롤레타리아들의 작업 도구를 빼앗은 뒤, 환경, 위치, 신원 보증이 파괴됨으로써 평범한 평화까지도 엉망이 된 그들의 생활 양식을 감히 방어하려 들면, “인종주의자”로 취급된다.
---「1984~1992: 대의를 섬기고 봉사하자」중에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아서 잘못을 범한 사람은 더 이상 불법 체류자가 아니라, 신분증을 그에게 주지 않은 잘못을 저지른 정부였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궤변가들의 이 놀라운 전복을 요약했다. “신분증이 없는 자들은 불법 체류자가 아니다 […] 그들 대부분은 일하고 살고 있으며, 수년간 대낮에 살고 일했다 […] 원래 존재하지 않던 곳에 종종 은밀성을 발생시키는 것은 신분증이 없는 자들에 대한 정부 탄압의 불공정성이다.”
---「1993~2007: 아버지들은 너무 덜 익은 포도를 먹었고, 아이들의 이빨은 시큰거린다」중에서
개혁하기 전에 진단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40년 동안 좌파와 우파는 서로 거짓말을 하는 모험을 한다. 우리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아마도 좌파와 우파는 똑같이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1993~2007: 아버지들은 너무 덜 익은 포도를 먹었고, 아이들의 이빨은 시큰거린다」중에서
우파는 세계화의 이름으로 프랑스를 배신하고, 좌파는 공화국의 이름으로 프랑스를 배신한다. 우파는 자유주의라는 명목으로 국가를포기했고, 좌파는 보편주의라는 명목으로 민족을 버렸다. 우파는 CAC 40을 대표하여 국민을 배신했고, 좌파는 소수를 대표하여 국민을 배신했다. 우파는 자유의 이름으로 민중을 배신했다. 약자를 억압하고 강자를 공고히 하는 잘못 이해된 자유. 모든 공동체 로비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긍정적인”이라는 형용사로 비종교성을 장식하도록 강요하는 타락한 자유. 좌파는 평등의 이름으로 국민을 배신했다.
---「1993~2007: 아버지들은 너무 덜 익은 포도를 먹었고, 아이들의 이빨은 시큰거린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