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덱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이죠. 문화를 기록한 장표, 거창해 보이는 이 문서는 기업이 만들 수 있는 기록물의 끝판왕과도 같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제도와 업무 방식, 복지, 온보딩 프로세스(입사자의 적응을 돕고 조직의 규율과 업무 방식을 일원화할 목적으로 일정 기간 진행되는 일련의 프로세스)는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회사의 지향점과 핵심 가치, 암묵적 문화와 예의까지 회사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것을 기록해놓은 것이죠. 크게 보면 하나의 목적지를 위한 선명한 등대와 같고, 작게 보면 파일 전달 방법까지 알려주는 소소한 가이드북이기도 합니다. 기업의 의지와 규정들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셈이죠. 이 때문에 컬처덱은 기업의 ‘법전’이라고 표현합니다.
---「CHAPTER 1 WHAT FOR?」중에서
컬처덱을 누가 처음 만들었느냐에 대해서는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넷플릭스가 ‘자율과 책임’이라는 프레젠테이션 문서를 공개하며 화제가 되긴 했지만, 이는 넷플릭스의 문화가 그간의 ‘복지와 화합’ 중심의 스타트업 문화와 상반됐기에 더 눈에 띄었던 것뿐이지 시초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유명해졌다’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다만 이 문서가 실리콘밸리에서 굉장한 화제가 되며 ‘컬처덱’이라는 이름을 쓴 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 책에서도 공식 명칭을 컬처덱이라고 부르고 있죠. 어떤 기업에서는 ‘컬처북’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습니다. 컬처덱이든, 컬처북이든 큰 문제는 없지만, 뉘앙스의 차이는 있습니다. 덱(deck)은 기본적으로 ‘카드 모음’을 뜻합니다. 각각의 카드는 독립적인 정보를 담고 있으며, 섞을 수도 있고 분리해 사용할 수도 있죠. 북(book)은 내러티브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 페이지만 따로 떼어내기 어렵죠. 다만 덱과 북이라는 쉬운 단어를 쓰면서 이런 디테일까지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형태와 이름은 다르지만 컬처덱의 정의에 부합하는 자료는 이전에도 꾸준히 존재했습니다. 경영 원칙, 일하는 방법, 행동 강령, 웰컴킷 등으로 불렸던 것들입니다. 컬처덱은 파편화되어 있던 결과물들을 한데 모읍니다. 그리고 맥락으로 연결하죠. 컬처덱에는 다양한 정보들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는 4가지의 형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CHAPTER 1 WHAT FOR?」중에서
문화는 ‘발생’과 ‘유지’의 과정이 있습니다. 물론 발생 초기 단계의 문화는 혼란스럽습니다. 갈등이 많고 쪼개져 있죠. 개인의 충돌이 집단의 충돌로 연결되고, 결국 하나의 합의점으로 모이면 안정기에 다다릅니다. 이를 ‘성숙된 문화’라고 합니다. 하나의 스테이지에서 문화는 탄생, 혼돈, 성숙의 과정을 거쳐 안정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지되죠. 컬처덱은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료가 아닙니다. 유지시키기 위한 자료죠. 당연히 기업의 비전과 미션을 달성할 이상적인 모습의 문화를 그리고 싶겠지만, 모든 기업이 그런 이상적인 형태의 문화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유성과 특수성 중 어떤 모습을 유지해야 하고, 어떤 것을 배척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죠. 우리 조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모습만 묘사해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외쳐서는 안 됩니다. 컬처덱을 만드는 과정은 치열한 메타인지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죠.
---「CHAPTER 2 HOW TO PLANNING」중에서
회사에서 생산하는 콘텐츠 중 컬처덱과 가장 유사한 것을 꼽자면 IR도, 회사 소개서도 아닌 채용 공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용 공고에는 기업의 역할과 성격,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숨기려 해도 귀신 같이 알아챌 것입니다. 컬처덱이라는 별도의 파일을 내려받도록 해 공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채용 공고를 극도로 발전시켜 친절하고 상세한 지원 가이드를 만드는 것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맥락 있는 경험을 하도록 세심하게 리딩 경험을 설계해야 하죠.
---「CHAPTER 2 HOW TO PLANNING」중에서
컬처덱은 기본적으로 내부 구성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컬처덱을 만들지 않습니다. 종종 특정 업계에서는 기업의 문화를 규정하고 체계적인 내부 브랜딩을 진행했다는 행위 자체가 고무적 이슈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죠. 보통 이러한 경우에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만든 것인지 관련 업계 내 기업들이 궁금해하기도 하고, 신선한 사례로 입소문이 돌기도 합니다. 이렇듯 어떤 컬처덱은 동종 업계의 리딩 컴퍼니(leading company)가 되겠다는 목표 아래 제작되기도 합니다.
---「CHAPTER 2 HOW TO PLANNING」중에서
고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컬처덱도 있습니다. 이 경우 주로 문서 형태보다는 블로그 형태를 취합니다. 그렇다면 기업은 왜 고객에게 자신의 문화를 드러낼까요? 이는 일반적으로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팬덤 비즈니스를 형성하기 위해, 컬처핏에 맞는 좋은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건전한 이미지를 통한 신규 고객을 유치하기 위함입니다. 리디의 경우 TOC(tears of customer)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리더들과 정기 미팅, 메일 등의 채널을 통해 취합된 고객 데이터를 원문 그대로 가공 없이 공유하는 문화죠. 이 내용은 리디 기업 홈페이지의 ‘STORY’ 탭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팬들에게 ‘당신의 의견이 소중히 다뤄진다’는 메시지를 전하죠. (…) 토스, 에이블리, 채널코퍼레이션도 일하는 방식이나 커뮤니케이션 문화, 자신의 고객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을 드러내고, 심지어 퇴사 시 이별하는 방법까지 기업의 속내 깊은 이야기를 블로그나 피드 페이지를 통해 고객과 나누고 있습니다.
---「CHAPTER 2 HOW TO PLANNING」중에서
투자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자료는 IR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주로 회사의 성장 지표와 비전, 성과 등을 보여주며 투자자와의 신뢰 관계를 구축해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안정적인 투자와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을 관찰하려는 투자자에게 기업 문화는 꼭 살펴야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는 다양한 윤리적 리스크와 닿아 있고,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서 기업이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죠. (…) 물론 모든 기업의 리스크 원인은 복합적입니다. 하지만 기업이 터뜨리는 큰 문제는 대부분 하인리히의 법칙을 따릅니다. 결정적인 1가지 문제 이전에 이미 작은 피해 29개, 소소하고 작은 문제 300개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이론이죠. 탄탄하고 건강한 조직 문화에서는 이러한 리스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빠르게 해결책을 찾겠죠. 투자자는 이런 모습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투자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컬처덱은 기업의 원대한 비전이나 목표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한 내용은 IR에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 컬처덱에서는 좀 더 체계적이고 건강한 관리 시스템에 대해 어필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옆 페이지의 이미지에서 소개하는 것들이죠.
---「CHAPTER 2 HOW TO PLANNING」중에서
컬처덱의 효용은 남들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부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초기에는 강한 의지와 기획으로 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형식적인 문서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지치니까요. 그래서 컬처덱은 가급적 속도감 있게 만들고자 하는 편입니다. 컬처덱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컬처덱은 우리 회사의 기둥을 세우고 선포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죠. 물론 컬처덱 없이도 회사는 잘 굴러갑니다.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룰, 그것에 균열을 주는 몇몇의 아나키스트의 조화가 회사를 굴러가게 만들거든요. 오히려 모두 룰을 지키면 회사의 문화는 고이고 썩기 마련입니다. 컬처덱이 만들어져도 그걸 지키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런 존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컬처덱을 살아 있게 만드는 사람이거든요. 컬처덱은 모든 구성원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구속구가 아닙니다. 브랜드와 함께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여야 하죠. 자주 열어보고 업데이트해줘야 합니다. 읽고 외우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가이드가 되어야 해요. 오류가 있다면 함께 논의해서 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컬처덱을 만들겠다고 결심하셨을 때는 바로 이런 살아 움직이는 브랜드의 법전을 상상하셨을 것입니다. 컬처덱을 만든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기록물임은 분명합니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