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판 서문
세르주 레보비치
정신분석학 역사에서의 다양한 순간과 그 움직임의 양상 몇몇을 다룬 저작들이 요즈음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상을 가질 일은 아니다. 그런 책에서 스캔들만을 보고자 하는 독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로딘과 피에르 가이스만의 저작을 읽으면 다른 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미간행 상태이거나 별로 열람 되지 않는 텍스트를 읽은 후에 행한 집필이자 문서 보존의 결과인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정신분석이란 새로운 분야의 선구자 사이에 있었던 개인적 갈등을 주저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새로운 학문을 둘러싼 일상사를 회고한다고 해서 역사가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특히 그 역사의 근원이 철저한 조사 작업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이어야 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클로딘과 피에르 가이스만이 이 책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은, 정신분석학을 아동에게 적용하는 일은 정신분석가들에겐 항상 도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에 정신분석학에서 구축과 재구축에 대한 갈등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심리작용의 원형적 모델은 아동 신경증 계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아동 신경증은-이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이제 더는 보편적 모델이 아니다. 최근 들어 정신병과 한계적 상태에 관한 관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의 아동정신분석학자들은 두 번째 계열인 아동의 자폐증이 중요함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들을 따라 먼저 ‘부모의 방’으로 살짝 들어가 본 후에, 유아원에 가서 이제는 세상을 뜨고 없는 ‘유령들’-젤마 프라이베르크가 명명하여 고전이 된 은유적 표현을 빌린다면-을 만날 것이다.
비엔나에 있는 프로이트의 아파트에서 열린 수요모임 시대부터 이미, 초기의 제자들은 아동정신분석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관찰내용을 쌓아가고 있었다. 사실 그것이 프로이트 학설의 근원이 되는 내용이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만일 그랬다면, 자신이 꾼 꿈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라고 권고하는 초현실주의자들에 정신분석학자를 비교할 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정반대로, 이 초기 정신분석학자들은 자녀들이 꾼 꿈을 서로 이야기하곤 했다.
아이들이 털어놓은 꿈을 이 초기 원형적 정신분석학자들이 아이들에게 해석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도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초기 제자들이-당대이거나 후대이거나 간에-자신들의 아이를 대상으로 진정한 정신분석 작업을 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비엔나에서, 그리고 이후 베를린과 부다페스트에서의 정신분석학계는 좁은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아동분석에 대한 속내 이야기는 많이 거론되었다. 안나 프로이트, 힐다 아브라함, 멜라니 클라인의 아들 에리히, 그리고 융의 아들 등이 그 예이다.
안나 프로이트는 도로시 벌링엄과 친해져 평생 가까이 지냈으며, 벌링엄의 두 아들을 정신분석해 주었다. 안나 프로이트는 그 두 아들의 친구 한 명도 정신분석으로 치료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그 아동의 교육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 아이가 커서 미국의 대학에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안나 프로이트는 전해 듣게 되었다. 성인이 된 아이는 안나 프로이트에게 자기가 어렸을 적 남긴 그림이며 치료 일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성인이 된 피터 헬러는 〈안나 프로이트와 함께 한 나의 정신분석〉이란 저서에 비엔나에서 보낸 어린 시절, 안나 프로이트와 행한 분석 기억, 그리고 그러한 주제와 관련된 주석을 담고 있다.
클로딘과 피에르 가이스만이 검토하는 문제 몇 가지는 매우 타당한 것이다. 그 문제에 관해 우리는 간단한 해설을 덧붙이고자 한다.
1. 아동 특히 매우 어린 아이들을 관찰하면 무의식의 기능의 성격이 드러나는가?
2. 아동을 정신분석하면 소아 망각이 쉽게 제거되어 아동기이기에 시간상 더욱더 가까운 과거를 더욱 잘 재구축할 수 있게 되는가?
3. 아동의 정신분석은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신분석학에서 부차적으로 파생된 심리치료 유형에 지나지 않는가?
1. 아동을 정신분석학적으로 관찰함
관찰 대상인 아동은 정신분석학적 아동이 아니라 그저 현실의 아동일 뿐이라고 오늘날 많은 정신분석가는 생각한다. 그런데 아기와 그 부모를 잇는 애착에 관한 최근의 연구, 즉 조기(早期) 상호작용에 대해 관찰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대상에 대한 표상 작업의 기원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理論)에 이론(異論)이 제기된다. 즉, 주관화 과정은 자기 자신(soi)의 핵에서부터 이루어지며 또한 어머니의 보살핌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기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단절된 개체 간의 상호작용이란 상정에서 벗어나 상호주관성에 이르게 되었다. 상대방도 생각을 한다는 점을 어린아이도 알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서 바로 상호주관성이 입증된다. 개인적 발언을 하자면, 아기는 어머니를 인지하기 이전에 이미 어머니라는 대상에 관심을 쏟는다는 내 생각은 변함없다. 게다가 어머니에 대한 아기의 행동-표상화된 행동, 즉 어떤 의미가 있는 행동-이 있기에 어머니는 ‘모성의 유형’ 안에 자리잡는다고도 나는 생각한다. 한편 어머니가 아기를 돌볼 때에는 어머니 자신의 상상, 환상적 생각이 그 보살핌 안에 개입된다. 이 현상을 우리는 이제 환상에 의한 상호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환상에 의한 상호작용은 서로의 기억에 각인되는 에피소드, 둘 사이를 구축하는 시나리오, 사후(事後) 덧붙여지는 둘의 이야기 내용 등에 의하여 풍부해진다. 그렇게, 발달 정신병리학은 안나 프로이트가 세운 햄스테드 클리닉의 메타심리학적 진단결과 목록에만 걸맞은 이론이 아니다. 세대 간에 걸쳐 갈등이 전수되면서 그 내용이 빚어진 상호주관, 내부주관적 관계 역시 발달 정신병리학 안에 도입된다. 여기서, 전수된 갈등이란, 부모가 아이의 조부모와 겪은 갈등내용을 말한다. 이에 교육과 교양을 통하여 친자 관계와 계열 관계를 배합시킬 수 있다.
2. 아동정신분석학을 통한 정신분석학적 (재)구축
원칙적으로, 아동에게 행해지는 치료는 그 결과로 소아 망각이 더욱 쉽게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지 경험에 의하면, 성인의 전이 신경증(轉移神經症)을 구성하는 특색과 반응성 형성은 잠복기에 매우 강해서 이 시기의 아동은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지 않으려 한다. 안나 프로이트가 제안한 치료시의 협력과 거기에서 오는 심리적 방어의 완화, 그리고 클라인이 연상과 유사하다고 본 놀이치료, 이 모든 방법을 사용하면 중단없이 아이와 해석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더불어, 주어진 몇 주 동안 분석진료 빈도가 늘어날수록 해석작업도 잘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사회적 검열 체제가 완화되고 그 결과로 인한 초자아의 층 몇몇이 완화되었다고 해서 무의식의 파생물에 대한 작업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학자가 아동에게 해주는 해석은 잠복기에 묻힌 소재-전의식(前意識)에 속하는 소재-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성인정신분석에서도 상황은 대체로 비슷하여, 과거의 일을 반복하는 심리 현상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재구축해낼 수 있다. 그러나 구축작업은 두 주역이 활동하던 비옥한 시기의 산물이다. 그 시기에 두 주역은 무르익은 나르시시즘 덕분에 풍요로운 동일시 작업을-생성(生成) 상의 공감(共感)과 은유적 공감을 통하여-해내었던 것이다. 저자들은 이 점과 관련하여 멜라니 클라인과 후대 클라인 파 정신분석학자들의 공로를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투사 동일시(identification projective)는 발달상 정상적인 기제라는 발견을 들 수 있다. 어머니가 (그리고 아동정신분석학자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 능력 덕분으로 투사 동일시의 파괴적 효과가 감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아동정신분석학자는 이 동일시적 투사 내용을 포용하여 그것을 가지고 어떤 구축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학에서 아동은 자신의 발달 단계를 거치면서 재구축된 아이이며, 정신분석가의 해석 덕택으로 구축된 아이이다.
3. 아동정신분석학은 존재하는가?
위에 열거한 성찰 사항들이 바로, 아동정신분석학의 존재를 증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 틀의 항상성과 중립성을 완벽히 확립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고 그래서 진정한 치료가 지속되기도 어렵다. 클로딘과 피에르 가이스만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심리치료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확고한 정신분석교육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불행히도 이 교육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정신분석가 지망자들의 많은 수가 아동만을 위한 센터에서 일하는 것으로 이력을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클로딘과 피에르 가이스만의 이 책은 아동정신분석학의 역사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어서, 이 분야에 대한 지도를 그려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아동정신분석학이 비엔나에서만 꽃피운 것이 아니라 베를린, 런던, 라틴 아메리카, 유럽 전반에서까지 개화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아동과 청소년의 정신병과(科)가 발달하는 데에 정신분석학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저자들은 상세히 보여준다. 저자들은 위제니 소콜니카와 소피 모르겐슈테른과 같은 선구자들의 저작을 묘사한다. 프랑수아즈 돌토라는 인물도 언급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내 동료이자 친구인 르네 디아트킨과 내가 프랑스에 미친 영향을 약간 과장하여 칭찬하고 있다.
어쨌든, 대뇌병리학적 정신의학과 신경심리학이 아동정신의학에 지배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고-특히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객관적 측정방법을 통하여-자처하는 마당에 클로딘과 피에르 가이스만의 이 책은 정신병리학적 접근방법의 중요성을 증언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에게 소개된 아이나 그 가족은 정신분석을 통해서만 정신병리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정성껏 읽어보면 어쨌든 한 세기를 긋는 역사가 드러나며 그것은 임상작업의 역사이자 연구작업의 역사이다. 한 세기 동안 아동정신분석학자들은 정신분석 발달을 위한 선구자이자, 아동의 정신 장애, 심신 장애 이해를 위한 선구자였으며 각 발달 단계의 순간-영아, 아동, 사춘기 전 단계의 아동, 청소년, 성인-에 맞는 임상, 치료법을 연구한 선구자였다.
전이(transfert, 轉移): 환자가 유아기에 부모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체험한 무의식적 감정(사랑, 증오 등) 혹은 태도를 분석가에게 표현하는 것. 이러한 감정적 투사(projection)에는 긍정적 전이(사랑, 우정, 존경, 애정 등)와 부정적 전이(증오, 파괴심, 불안, 배신에 대한 두려움, 불신, 질투 등)가 있다.
역전이(le contre-transfert): 분석가가 자신의 무의식적 감정을 환자에게 전이하는 것. 환자가 자신에 대하여 하는 전이에 대한 반응이다.
자기 자신(soi):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카를 구스타프 융이 1902년에 도입하여 1912년에 개념화된 용어. 자기 자신이란, 그 기원상 문화와의 관계하에 구성되는 것이다. 심리현상의 구성요소 전반을 가리키며 자아(moi)를 구성하는 근본이다. 멜라니 클라인에게 자기 자신(soi)이란, 인성 전체의 욕동, 감정 전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성의 구조만을 가리키는 자아(moi)와는 반대이다. 대상이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분리되면 그 분리가 자기 자신(soi)에게도 영향을 미쳐, 자기 자신의 여러 부분은 서로 갈등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르네 스피츠(Rene A. Spitz)에게 자기 자신(soi)이란, ‘체험에 대한 인지적 침전물’이다. 즉 아기는 15개월 정도 되면 주위 환경과는 구분되는 어떤 실체로 자신을 느껴, 스스로 느끼고 행동할 수 있다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주위 대상들과 스스로를 대비시킨다. 이러한 분별심으로써 아기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분리시킬 뿐 아니라, 이제 타인-아기에게는 어머니-을 사랑의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H. 하르트만에게 자기 자신(soi)은 주체(sujet)의 인격 전체를 나타낸다. 여기에는 몸, 신체의 일부, 정신적 구조, 정신적 구조를 이루는 다양한 심적 요소 등이 포함된다. 이후 자기 자신(soi)이란 개념은 주체가 주위 환경과 맺는 관계를 고려하고자 하는 모든 작업 안에 등장한다.
르네 스피츠와 H. 하르트만 등의 개념에 비해 멜라니 클라인이 정의하는 자기 자신(soi)의 개념은 그 근본부터 매우 동떨어진 성질의 것이다. 멜라니 클라인이 의미하는 자기 자신(soi)이란, 체험이나 인지, 지각 등의 발달에 의해 서서히 획득되는 기능이 아니라 탄생할 때부터 이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멜라니 클라인은 자기 자신을 ‘자아(moi)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드라 지칭하는 욕동의 생(生) 전체도 포함하는 인격 총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성인세계가 뿌리를 두고 있는 아동기〉(Racines infantiles du monde adulte)를 읽어보면 자기 자신(soi)이란, 정신기제가 개입하기도 이전, 모든 분리(clivage)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주체의 타고난 통일체(unite fonciere du sujet)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멜라니 클라인에게 자기 자신은 전적으로, 개인의 모든 활동의 받침대이다. 분열(clivage)이 일어날 때, 자기 자신은 두 개의 자기 자신으로 나뉘어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균열(une faille)이 도입되는 것이다. 그 균열은, 세계를 체험하여 생긴 표상이 내부 갈등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다시 말해서, 어떤 체험이 주체에게 의미하는 바를 소재로 하여 내적 갈등이란 구도가 가동되는 것이다). 이 분열을 줄이는 일만이 주체로 하여금 원상태-즉, 스스로의 자기 자신(soi-meme)-를 찾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투사 동일시(identification projective)를 알기 전에 일단 동일시와 투사 각각의 의미부터 시작해 보기로 한다.
동일시(identification): 다른 사람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것, 자신을 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동일시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여러 종류의 동일시를 구별해 놓았다. 아이에게 동일시는 애착의 최초 형태로서, 성인의 어떤 속성들을 제 것으로 삼는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인격형성에 매우 중요한 양상이 된다. 성인에게 동일시는 방어기제의 하나로서, 불안에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투사(projection): 프로이트는 1894년에 이 용어를 도입한 후, 몇 차례에 걸쳐 그 개념을 수정했다. 투사란, 자신의 성향이나 욕망을 타인이나 외부세계에 전가하는 일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주체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 점에서 투사는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더 일반적으로 투사는, 과거의 지각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자극에 대한 지각에 영향을 주는 일을 말한다. 〈토템과 터부〉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부의 지각작용을 외부로 투사하는 것은 태초적 기제로서,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그러한 태초적 기제는 우리가 외부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한다.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 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관념형성작용의 과정이나 감정적 과정이란 내적 지각작용까지도 (감각 기관에 의한 지각 작용처럼) 외부로 투사되어 외부세계를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는 데에 사용된다. 사실 그러한 내적 지각작용은 내부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었는데 말이다.” 우리의 번역본에서는 투사(projection)를 특히 내부투사(introjection)와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때 ‘외부투사’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투사 동일시(identification projective), 혹은 외부투사 동일시: 자신의 특성들을 대상(사람이나 사물)에 투사하여 그런 대상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것. 투사 동일시가 병적 방어기제로 되면 그러한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여 통제하려 들게 된다. 이때 그 대상의 고유 특성은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 개념은 1946년 멜라니 클라인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동일시(거울처럼 상대에게서 자신을 알아보는 것)와 투사(자신의 감정을 외부 대상에 덮어씌우는 것)가 함께 일어나는 현상을 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멜라니 클라인에 의하면 투사 동일시는 아이의 심리세계가 자리 잡아 나가기 위하여 의무적으로 거치는 단계이다. 즉, 아이의 상상적, 환상적 세계를 어머니 이미지의 구조적 가치를 따라 묘사하는 일에 해당한다. 아이는 상상으로 좋은 것은 자신 안에 갖고 나쁜 것은 어머니 이미지 안에 투사한다. 이러한 투사 후에는 그렇게 투사된 내용을 다시 자신 안으로 동일시해 들인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 발달 과정에서 일어나는 투사 동일시이다. 즉, 이는 외부로 투사한 것을 다시 자신 안으로 통합하는 일이다. 윌프레드 비온은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투사 동일시란, 사고 능력을 가능케 하고 구조짓는 기제라고 말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