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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1장. 남편이 사라졌다 2장. 부부의 사정 3장. 실종과 사망 2부 4장. 재혼 5장. 남겨진 자들 6장. 두 눈을 감다 |
여느 남녀의 만남이 그렇듯 우리 부부도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다소 안일하게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결혼 생활은 아니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나사를 조이기도 하고 덜컹거리는 진동이 느껴져 못질을 해대기도 하며, 홈을 끼워 맞추고 틈을 좁혀가면서 사는 평범한 부부였다. 결혼 생활이란 그런 거라고, 다른 부부들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돌이켜 보면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온함에 안주하려고 했던 건 우리 부부 중 나뿐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았다. 세안, 식사, 배웅 순으로 진행되는 가족의 아침 의식을 마치고, 남편은 출근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프롤로그」중에서 두 건설사가 함께 지은 이 아파트 단지 안에는 18평형, 22평형, 36평형, 49평형 그리고 60평형이 있다. 앞 동을 구경하러 가는 여자들도 있지만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여러 평형을 한 단지 안에 구역을 나누어서 지은 것까지는 좋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도 좋다. 공동주택이란 그런 의미이니까. 하지만 왜 내가 사는 22평형이 가장 큰 60평형 앞 동과 가까운 건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동과 앞 동 사이에 있는 앙상한 몇 그루의 나무는 마치 신분별로 사람들을 나누는 제단 같아서 볼 때마다 부아가 치민다. 앞 동이 반 층 정도 높은 지대에 지어진 것도 나를 열받게 하는 요인이다. 22평형은 네모반 듯한 땅 위에 지어진 것이 아니고 삼각형과 부채꼴을 닮은 모양의 부지 위에 비뚜름하게 들어앉아 있다. 두 건설사 중, 조금더 돈이 많은 건설사에서 노른자위 땅에 60평형을 배치하고 그다음 평수, 동을 순차적으로 배치하다가 남는 자투리땅을 다른 건설사가 사들여 22평형을 한 동 더 지은 모양새다. 60평형과 가까운 자리에 꼽사리 낄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1장. 남편이 사라졌다」중에서 삑삑삑삑. 삐리릭. 쉬릭. 철커럭. 쉬리릭. 남편이 돌아왔다. 실눈이 떠졌다. 시간은 1시 58분. 잘났다. 이 인간아. 이제야 기어들어 오니? 아주 밖에서 처잘 것이지. 하루 종일 처자식이 뭘 하고 사는지 관심도 없지? 어휴, 여기까지만 하자. 너에게는 저주도 아깝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쏴아. 웬일로 씻는 모양이네. 나는 일어나서 남편을 반기는 척할 것인지 그대로 자는 척을 해야 할지 갈등했다. (중략) 쏴아. 첨벙첨벙. 헉헉. 잠이 확 달아났다. 남편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라도 왔나? 아니다. 남편은 당황한 상태였다.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 긴박한 어떤 일이. 나는 하원이를 살며시 품에서 내려놓았다. 바위에 붙은 굴처럼 단단하게 나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하원이는 어렵사리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배 부분이 서늘해졌다. 아이의 얼굴과 목 뒤로 땀에 젖은 머리칼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 나는 품에서 떼어낸 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살금살금 움직였다. 불 꺼진 집 안. 욕실에서 비어져 나온 빛줄기가 거실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한 뼘 정도의 틈을 벌린 채 열려 있는 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남편이 보였다. 남편은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였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피! 온통 피였다. 세면대에도 욕실 바닥에도……. 변기 뚜껑 위에는 피 묻은 칼이 놓여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때, 건넛방에서 상원이가 뒤척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안 돼! 상원아! 아들을 저지하는 것처럼 허공으로 뻗은 내 팔이 보였다. 그대로 눈동자만 움직여 욕실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여전히 물을 틀어둔 채로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원이는 다시 고른 숨소리를 냈다. 나는 뒷걸음질해서 침실로 향했다. 하원이가 깨어나지 않도록 손가락 끝, 머리칼의 쏠림까지 주의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난 덜덜 떨리는 두 팔로 딸을 품에 안았다. 따뜻했다. 다행이었다. 딸의 체온에 떨림이 잦아들었다. 자는 척해야 한다. ---「1장. 남편이 사라졌다」중에서 마감 뉴스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호프집 살인 사건을 보도했다. 남편은 아무런 말 없이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나는 죽은 듯이 눈을 감았다. 피해자의 신원이 확인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피해자는 피의자로 지목되어 용의 선상에 있었던 김 목수였다. 부패가 심하게 진행된 데다가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이라 신원 확인에 난항을 겪었다는 설명과 함께 호프집에 드나들던 손님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두어 달 전쯤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든 양복쟁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올 것이 왔다. 자기 일도 아니면서 격앙된 어투로 내뱉는 기자의 말을 끝으로 남편은 소리를 줄였다. 내 뺨이 닿아 있는 남편의 허벅지가 딱딱할 정도로 경직되었다. 오싹해졌다. 남편은 텔레비전 화면이 아니라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방금 전 텔레비전에서 나온 방송 내용을 내가 들었는지, 거기에 반응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피부 위로 내리꽂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중략) 나는 단 한 순간의 움찔거림도 없이 아기처럼 자는 모습을 유지했다. 남편의 발걸음이 아이들 방 쪽으로 향했을 때 나는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과도한 긴장은 내 몸을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난 미동 없이 누워 있는 쪽을 택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인기척이 들렸다. 하마터면 안도의 숨을 몰아쉴 뻔했던 그때, 남편은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나를 마치 아기처럼 두 팔로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 나를 눕힌 남편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남편은 샤워를 하고 내 옆으로 다가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의 숨소리는 내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는 숙면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남편은 평소처럼 출근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1장. 남편이 사라졌다」중에서 |
“소소한 일상 속 두 가족의 비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무섭다.” - 심사평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설계된 공포.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숨 막히는 전개! 완성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자들의 리얼리즘 미스터리 스릴러 22평 전세 아파트에 사는 정하는 오늘도 기분이 좋지 않다. 분리수거를 하러 갈 때마다 마주치는 60평형에 사는 사모님, ‘앞 동 여자’ 때문이다. 앞 동 여자는 정하가 쓰레기를 버리는 장면을 감시하듯 주시한다. 정하와 그녀의 남편은 대화가 단절된 부부다. 우연히 발견한 남편의 노트는 일기인지 습작인지 알 수 없는 글들로 가득하다. 글을 읽는 순간, 자신의 이야기인듯한 글에 기분이 나쁘다.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으로는 알았지만 머리로는 부정했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107쪽’. 가십을 좋아하는 자영이 엄마는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믹스커피를 타 달라고 하며 60평형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을 늘어놓는다. 육아에 살림에 치여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 정하는 딸 하원과 아들 상원이 잠들자 저도 잠자리에 든다. 늦은 밤 자다 일어난 딸 하원이 부부의 침실로 온다. 정하는 남편이 올 것을 대비해 침대 옆자리를 비워두고 싶지만, 하원은 눈치 없이 엄마 품으로 파고든다. 그날 밤, 남편 원우가 피를 잔뜩 묻히고 귀가한다.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감지하지만 정하는 모른척한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 원우는 연기같이 사라졌다. 원우가 실종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성의 아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원우가 저질렀을 일을 감추랴, 아이들 키우랴 고된 십 년을 보낸 후 우성과 재혼하여 꿈에 그리던 행복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상원이 10년 전 남편처럼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아들이 남긴 편지와 피 묻은 칼을 보고 그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하나씩 맞추어보기 시작한다. 지금의 삶에 더없는 행복을 느끼는 정하. 피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하게 된 정하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남편의 일기장에서 마주한 진실……. 일기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빛의 인생과 어둠의 인생. 선택은 당신 몫이다. 남편의 실종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건의 다양성과 완성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현실을 다루고 있다. 정하와 원우. 앞 동 남자 우성 부부의 삶은 가파른 내리막길 위에 서 있는 아슬아슬한,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흔한 대한민국 부부의 그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일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진실을 밝히는 것과 진실을 덮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 당신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은 당신 몫이다. 『배니시드』는 2022 ‘BIFF 부산스토리마켓 IP 선정작’으로 선정되어 영상화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한 작품이다. 작품은 정하의 시선으로 따라가며 진행되지만, 남편 원우의 시선, 그리고 앞 동 남자 우성 각각의 시선을 대입하여 읽어보는 것도 인물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어 각기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편의 일기만 골라 읽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작가는 소설 속의 주요 인물들이 프로타고니스트가 아닌 안타고니스트일 수도 있고 안타고니스트가 프로타고니스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이 글을 썼다. 책임으로부터의 탈피, 자유로운 노마드를 향한 열병 같은 갈망을 숨기고 사는 이 시대의 부부들에게 가족 구성원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의 기준을 재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집필 의도를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