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칼, 그림은 상인, 살인범, 그리스도와 각각 연관되고 거기서 돈, 시간, 신앙의 테마가 창출되며 그로부터 다시 정치 경제학, 철학, 윤리학의 영역이 활성화된다. (……) 상호 연관되는 모든 이미지들은 궁극적으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증폭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수렴한다. 극도로 조밀하게 짜인 연관 관계의 망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게 하는 데 작가의 소명이 있다고 믿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신념을 반영하는 동시에 서사에 질서와 균형을 더해 구조 공학적으로 완벽한 형식미를 창출한다.
--- p.9
그리스도를 닮아 선하고 온순하고 겸손한 간질병 환자가 현대의 러시아 수도에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사실상 저자가 의도한,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설의 아이디어였다. 『백치』는 결코 실패한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구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세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데 실패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 p.52
소비와 생산의 고리가 점점 커져 가고 그 돌아가는 속도는 철도가 절약해 주는 시간에 비례해 빨라진다. 철도와 더불어 부가 재편성되고 새로운 사업이 생겨나며 기업가, 혹은 자본가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분이 생겨난다. 철도는 또한 시간의 방향과 속도를 완전히 변형한다. 놀라운 운동 속도로 성서적인 에스카톤eskhaton(종말) 대신 지상 낙원을 향해 질주하는 기차 덕분에 인간의 시간 체험은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 pp.101~102
감옥에서 천국을 상상하며 사는 것과 한 푼도 쓰지 않으면서 모자람 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속칭 〈가성비〉 측면에서 동일하게 들릴 수 있다. 두 가지 삶 모두 돈이 최소로 적게 들거나, 혹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가 현대의 삶과 관련하여 가장 우려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아글라야의 시각과 같은 시각이다. 비용이 적게 들 수만 있다면,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돈을 쌓을 수만 있다면, 싸게 살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있다면〉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물질 만능주의의 심연과 맞닥뜨린 것이다.
--- pp.159~160
철도가 당대인들의 시간 개념을 바꿔 놓았듯이 로스차일드 역시 시간 개념을 바꿔 놓았다. (……) 지상에서의 시간이 로스차일드의 돈으로 환산되는 이폴리트에게 산다는 것은 곧 돈을 축적한다는 것을 의미 하므로(같은 원리에서 업적을 축적하고, 권력을 축적하고, 명예를 축적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살아 있으면서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른바 모든 〈루저〉들)은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 이폴리트는 마치 〈일수놀이〉 하는 고리대금업자가 날수와 이자와 원금을 계산하듯 남은 살날과 누적되는 돈을 단순 산수로 해석하는 것이다.
--- pp.167~168
미시킨은 예판친의 부인과 딸들에게 자신이 아는 어느 사형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총살형 직전에 사면을 받아 삶을 되찾은 사람인데, 그는 젊은 시절 동일한 체험을 한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사형수 이야기는 리얼하면서도 동시에 저자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그 트라우마가 오랜 세월 동안 무르익으며 형성한 사유의 심연을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시킨다. 도스토옙스키가 죽음의 확실성 앞에서 마지막 5분간을 살아 내야 하는 인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에 관한 가장 첨예한 사유의 단면이다.
--- p.184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속에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그의 시학적 원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미지〉의 작가이다. 그에게 소설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표상하는 것이다. (……) 그는 시간에 관한 사색을 공간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시간 자체와 공간 자체를 논하거나 탐구하는 대신 시간과 공간을 서로를 위한 척도로 도입한다. 그의 공간은 시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그의 시간은 반드시 공간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 pp.189~190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무한은 불가능하다. 유한한 인간이 시간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할 때 모든 악이 발생한다.
--- p.203
칼날이 목을 내리치기 1분 전에 단 1분의 시간을 구걸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인간으로 하여금 최후의 1분을 구걸하게 하는 것, 아니 그 누구라도 마지막 한순간까지 악착같이 삶의 끈을 붙들려고 한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인간의 비참함의 핵심인 것이다. 그때의 1분은 한 세기도 아니고 그냥 1분도 아니다. 아니, 그것은 아예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끝없이 처참한 본질인 것이다.
--- p.214
우리가 영원을 무한한 시간으로 이해하는 한 영원 속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원이라는 것을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점으로 받아들인다면 가능하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려고 했던 바의 영원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영원은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고 상태도 아니다. 영원은 시점이다.
--- p.230
소비에 초점이 맞춰진 사회, 안정적인 중산층이 목표인 사회, 그가 파리와 런던에서 발견한 사회는 작은 과거와 작은 미래에 전전긍긍한다. 그런 사회에서 시간은 작다 못해 거의 정지된 듯하다. 도스토옙스키는 거기서 이를테면 〈빈사 상태의〉 시간을 보았다. (……) 소비에 초점을 맞출 때, 그리고 그 소비를 위해 돈을 모으는 일에 초점을 맞출 때 인간은 시간을 체험할 수 없다. 모으고 소비하고 또 모으고 또 소비하는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그냥 하루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많은 돈과 조금 더 많은 물건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 pp.232~233
그는 신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강생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강생의 원리, 즉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현현하는 현상, 의미의 육화, 정신적인 것의 물화, n차원의 3차원화를 작품 구성의 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백치』는 〈강생의 소설〉이다.
--- p.271
과거의 한순간에 발생한 사건의 한 장면, 혹은 한 인물을 재현하는 사진은 영원히 가버린 시간을 생각나게 하며, 삶은 그렇게 환기되는 무상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 흘러가 사라져 버리는 현재로서 살아 내야 한다. 그 살아 냄의 행위에서는 절대적인 허무와 열렬한 생명의 희구가 교차한다. 그래서 슬프다. 사진과 관련하여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한번 자신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힌 존재임을 천명하는 듯하다.
--- pp.303~304
타인이라고 하는 사건을 마주하여 내가 그의 부름에 응답할 때만 나는 책임지는 존재, 윤리적 주체가 된다. 이때 응답이란 단순한 대답이나 응대보다 훨씬 포괄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의 존재와 의식을 나와 동등한 존재와 의식으로 인정하고, 타자를 내 존재로 환원함 없이 타자를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타자의 존재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 pp.310~311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일이라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 내는 것은 예술 수용자의 몫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에서 예술가와 수용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무덤 속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 것은 〈신앙을 잃게 할지도 모르는〉 죽음의 확실성이 아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죽음의 확실성 너머에 있는 불멸을 읽어 냈다. 그는 2차원 공간이 품고 있는 4차원의 세계, 칼날같이 예리하고 위태로운 찬과 반의 경계선에 선 인간만이 인지할 수 있는 영원성에 매혹당했다.
--- p.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