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위대한 시인인 월트 휘트먼이 1892년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뇌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기증되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데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의 실제 뇌를 소장하는 일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의 뇌 속 핏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시로 재배열되었으리라 확신한다. 아무튼, 골상학(두개골의 모양을 보고 사람의 특성이나 운명을 연구하는 학문-옮긴이)에 대한 글을 종종 썼던 휘트먼은 그의 뇌를 과학에 기부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젊은 연구원이 휘트먼의 뇌가 들어있던 유리병을 떨어뜨렸고 뇌는 손상을 입고 말았다. 단 하나도 제대로 건져낼 수 없었다. 시적인 뇌를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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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투스의 춤’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무도광은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병으로 중세에 퍼진 전염병 중 가장 신나는 병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성 비투스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춤의 수호신이었다. 이 열병은 7세기에서 시작되어 17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수십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사람들이 커다란 무리를 이루어 거리로 뛰쳐나가 넋이 나간 얼굴로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병에 걸린 사람들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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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 세기 동안 생각해낸 미신을 모두 담기에는 이 세상의 종이가 물리적으로 부족하다. 아마도 지난 100년간으로 한정해도 모자랄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다 적어 놓으려 한다 해도, 가장 극심한 논란에서부터 출처가 불분명한 것까지 각기 다른 변주가 너무 많아서, 아마 여러분은 이 책을 얼른 방 건너편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민속은 문화와 시대, 심지어 지역마다 제각각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어떤 지역에서 확고했던 믿음이 다른 곳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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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껍질이나 사과 심, 바나나 껍질과 같은 과일을 던졌다가 쓰레기통에서 파리가 우글대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따뜻한 기후 지역에 산다면, 아마 이러한 경험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과일은 벌레와 독사, 해충 등 여러 생물을 끌어들인다. 달콤하고 맛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환기가 거의 되지 않는 빡빡한 공간에 과일 상자를 켜켜이 쌓아 올리고 며칠, 혹은 한 달 이상 놓아둔다고 상상해보자. 과일 속으로 들어갈 길을 찾은 생물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방법도 찾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거미라면.
--- p.122
초에 관련된 미신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너무 많은 초에 불을 붙이면 화재의 위험이 커졌고, 극장 대부분이 목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가 나면 많은 이들의 생계가 끊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 관습에서는 성직자만이 초 세개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성직자 자격이 없는 사람이 초에 불을 붙이면 신성모독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전기의 발명으로 초를 사용하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고, 그 결과 초에 관련된 미신도 점점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그렇다. 한 문장에 말장난을 얼마나 많이 넣을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다).
--- p.130
17세기의 신경학자였던 토머스 윌리스는 초콜릿이 들어간 다양한 형태의 증류수를 만들었다. 단맛으로 쓴맛을 지운다는 의미의 ‘설탕 한 숟가락’이라는 관용구를 알 것이다. 처음에는 이 제조법에 해골이 들어가지 않았다. 찰스 2세의 조부였던 제임스 1세가 한 번 해골을 넣도록 처방한 적이 있지만,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에 의사는 다음과 같은 쪽지를 남겼다. “전하께서 인간의 신체를 섭취하는 것을 꺼려하시니, 이 경우 수소의 머리로 대체할 수 있다.”
--- p.145
에티오피아의 황제였던 메넬리크 2세(1844년-1913년)는 몸이 조금 안 좋다고 느낄 때마다 성서를 찢어서 먹었다고 알려졌다. 신께서는어쩌다 이 남자가 모든 질병을 고치는데 성서가 최고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아시겠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효과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오랫동안 성서를 먹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냥 섬유질이 필요했는지도. 그의 소소한 습관은 1913년 정말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중풍을 앓고 난 후, 그는 성서를 마구잡이로 먹어치워 나갔고, 급기야 책으로만 식단을 구성하여 먹기만을 고집했다. 그는 중풍에서 살아남았지만 장 폐색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주요 원인은 종이였다. 섬유질을 지나치게 많이 먹었군.
--- p.164
내 생각에는 여성들 모두 이 유행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데에 수영복의 신에게 조용히 감사 기도를 올려도 된다. 1929년, 나무로 만든 수영복이 대유행을 했었다. 물에 뜨는 나무의 특성 덕분에 나무 수영복을 입으면 더 쉽게 헤엄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수영복은 워싱턴 호퀴엄에 있는 그레이 하버 럼버사(社)가 제작했는데, 수영하기를 가장 꺼리는 사람들도 바로 물에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만들었다. 그레이 하버는 목재 회사에서 꽤 많은 이익을 거둬들이는 것으로 이미 이름이 났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산 라인으로 수영복을 만드는 것이 차기의 ‘타당한’ 단계가 되었다.
--- 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