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끄러미 그 구절을 읽고 또 읽었어. 이따금 네 계정에 찾아간 건 거기 남아 있는 것들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오래전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도 그랬어. 다정하지만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네 문장에서 나는 여전히 네가 깨끗한 물 같다고, 그러나 전처럼 함부로 첨벙일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 대신 그렇기에 상상할 수 있었지. 윤은 고요히 그러나 성실히, 얼었다 녹았다, 흐르다 고이기를 거듭해왔구나. 나는 알 수 없는 과정들이 거기 있구나. 그것이 네 문장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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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늙고 싶든 그건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닐 거야. 그런 생각을 움켜쥐면서, 나는 동거인에게 할머니가 가실 때가 된 것 같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누가 물으면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빠르게 받아들이면 덜 아프다는 양, 상실을 미리 수긍해보려는 노력이었다. 다만 그 말을 뱉을 때마다 처음 느껴보는 통제 불가한 슬픔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 감각은 매번 나의 노력이 무용하다는 것은 물론, 내가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법을 전혀 모른다는 걸 상기시켰다
--- p.43
어제는 동네 어귀에서 붕어빵을 조금 샀다. 그제는 왜 안 보이셨느냐 물으니 붕어빵 아주머니는 단속 때문에 요즘 이곳저곳 돌아다닌다고, 날이 풀리기 전까지 바삐 팔아야 한다고 했다. 사려던 붕어빵을 천 원어치 더 사고 천막을 나오는데 바람이 매서웠다. 코가 시렸지만, 품속 붕어빵 덕에 몸은 따뜻했다. 어쩐지 겨울이 끝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기분으로 걸었다.
매일 오고 가는 길에는 탄천을 지난다. 여름엔 물장구를 치던 오리들이 있었는데, 한겨울엔 고요히 얕은 물결만 넘실거렸다. 빈 탄천을 보며 생각했다. 매 겨울 오리들은 어디로 갈까. 오리들이 돌아올 즈음 붕어빵 아주머니는 어디로 갈까. 사라진 이들의 오늘과 누군가의 안부를 묻기엔 지나치게 깨끗한 거리를 걸으면서, 모두 어디로 갔는지, 나는 늘 그런 게 궁금했다.
--- p.96
그 후로도 이따금 그의 계정을 들여다봅니다. 올라오는 게시물의 무게에 이전처럼 망설이다가, 어떤 이야기든 그 이야기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국 ‘좋아요’를 누르면서요. 그럴 때마다 시간은 순간 느려지고 나는 느릿느릿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와 고인이 남긴 기록에 이유 없이 흐뭇했던 마음이 이제는 저려오는 일에 대해서. 화면 너머 먼 거리의 나에게까지 묻어날 정도인 슬픔의 규모, 그로 인해 그가 보내고 있을 무한히 느린 시간에 대해서. 눈 한 번 마주친 적 없고 몸짓 한 번 본 적 없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어느새 영향을 받고야 마는 일에 대해서.
--- p.152
마음이 쓰이는 그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그 시절 그림을 완성하지 않았던 건, 완성했는데 결과가 구리다면 내가 구린 데에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내 특기는 나를 구리지 않게 지켜주는 유일한 것이어서 조금이라도 손상시킬 수 없었다. 나는 자기 위로와 음모론을 방패 삼아 나를 보호했고, 점점 제때 완성을 못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반면 내가 뭘 모른다고 생각했던 다른 친구들은 구린 상태로 구린 완성을 적립해나갔다. 룰을 받아들이고, 다치는 순간을 견디고, 상처받고, 묵묵히 구림을 받아들여 균형 있게 성장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내 맘 같지 않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완수한 셈이었다.
--- pp.200~201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에게 네 이론에 빠진 게 있다고 짐짓 능청을 부린 것이다. B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야, 당연히 지치지. 당연히 뭘 못하지. 할 만큼만 하는 데 드는 힘은 왜 빼. 분배에 드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은데, 그렇게 네 힘을 분배하게 만드는 회사가 잘못이지. 그 말이 격려로 들리길 바라면서 조마조마 쳐다본 B의 얼굴이 다행히 밝았다. 아 맞네, 그걸 몰랐네! 짬이 찬 회사원답게 B는 빠르게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고, 나는 친구의 자기혐오가 잠시 사라진 것에 기뻐하며 초콜릿을 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참 노닥거리며, 우리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볼 미래를 고민했다.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