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는 ‘내리쌓이는’ 성질이 있다. 입 밖으로 나온 언어는 개인 안에도, 사회 안에도 내리쌓인다. 그러한 언어가 축적되어 우리가 지닌 가치관의 기반을 만들어간다. ‘배려 없는 말’이야 예전에도 있었지만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말의 축적’과 ‘가치관 형성’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심지어 그 폭발을 누구나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 p.30
많이 ‘있는 말’은 눈에 띄므로 금세 눈치채기 쉽다. 반면 ‘없는 말’은 찾아내기 어렵다. 애당초 ‘없는’ 것이니 당연히 눈치채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없는’ 것을 상상하는 힘도 필요하다.
--- p.44
〈희대〉란 〈인간의 선한 성품과 자기 치유력〉을 믿고 그 〈가능성〉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자세이다. 나는 이 말을 보답을 바라지 않고 상대를 믿어보는 태도라고 해석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허울만 좋은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이라는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경의를 품은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쉽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임상 현장에서는 ‘이 사람이 「살아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경외심’이 필요할 때가 있고, 그것 없이는 회복을 향한 톱니바퀴 자체가 움직이지 않기도 한다. 이런 생각이 〈낭만적〉인 것이라면 인간에게는 낭만이 필요하다. 오카노우에 병원은 최악을 각오하고 진심으로 그것을 믿었던 병원이라고 생각한다.
--- p.55
수신자를 특정할 수 없는 마이너스 감정은 결국 개인이 자기 내면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 처리 비용으로 거액의 자존감이 지불된다. ‘사회와 싸우기’, ‘사회에 맞서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런 점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 문제’로 다뤄졌어야 할 ‘개인 문제’를 떠안고 자존감을 대가로 치르는 이들은 대체로 약자의 입장에 놓여 있다. ‘육아’나 ‘돌봄’처럼 소위 ‘가정’에 속하는 영역과 관련해 이 사회는 얼마나 여성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있는가. 이런 사회, 애초에 자존감을 깎으면서까지 지탱할 가치가 있을까? 사회란 그다지도 대단한가?
--- p.66
자신의 ‘이웃’을 지키려 할 때 사람은 놀라울 만큼 보수적 또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장애인 운동의 역사를 조사하다 보면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다. 장애인이 동네에서 생활하는 것. 우리 동네에 자리한 학교에 다니는 것. 그에 반대하는 사람 중 다수는 어디에나 있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은 ‘악의’만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큰일이니까요”, “힘든 건 여러분이지 않습니까” 같은 ‘선의’가 사람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요코타 씨와 동료들은 ‘선의의 얼굴을 한 차별’을 날카롭게 고발해왔다.
--- p.80
‘장애 유무로 사람을 가르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양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즉 다이버시티 사회’는 미래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 이미 다양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신지, 언어, 나이, 성별, 사상과 신념, 문화 습관, 심신의 상태 등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현실로 다가온 중대 과제입니다. 이 문제와 관계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양한 처지에 놓인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pp.87~88
강권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우선 누군가에게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는 데 망설임이 없어진다. 다음에는 낙인 찍힌 사람들을 박해하고 배제하고 입 다물게 한다. 입을 다물린 뒤 이번에는 거꾸로 말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면 동료로 받아줄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하며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말하게 만든다. ‘강제로 말하게 한 사람’의 책임은 이런 식으로 사라지고 ‘자발적으로 말한 사람’만이 상처받는다.
--- p.101
여자들은 육아를 하며 처음으로 겪게 된 지역과의 마찰 속에서 남자들과는 다른 차별과 편견을 맛보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장애인 운동에 꿈과 낭만을 걸었고, 여자들은 하루하루의 생활을 걸었다.
--- p.122
애당초 우리에게는 ‘병에서 회복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낫다”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낫다”라는 말에는 ‘사회가 추구하는 표준체=건강한 상식인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어 아무래도 께름칙하다(애당초 낫지 않으면 사회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병’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드라마가 있다. 마찬가지로 ‘회복’에도 저마다의 드라마가 있다. 회복의 종류는 다양하다.
--- p.147
기초생활수급자가 조금 비싼 일용품을 사용한다. 가사와 육아에 지친 어머니가 예쁜 가게에서 점심을 먹으며 기분 전환을 한다. 지금 소셜 미디어 등에서는 이런 일에조차 비난을 퍼붓곤 해서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런 비난 여론에 반론하면 ‘조금 비싼 일용품’, ‘예쁜 가게에서 먹는 점심’의 필요성이나 비용 대비 효과를 설명하라는 요구가 돌아와 한층 더 침울해진다. 하지만 사람이 소소한 바람을 품는 데 논리나 이유가 필요할까. 필요성을 설명해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소소한 바람’조차 가질 수 없는 걸까. 이런 논조에 맞서 싸우기란 의외로 어렵다. ‘소소한 바람’은 ‘소소한’ 만큼,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보다 포기해버리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포기가 쌓이고 쌓인 사회는 앞으로 어떤 사회가 될까. 무언가 섬뜩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 p.150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사양하고 있으니 장애인도 약자라는 이름 뒤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사양해야 한다.”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상에서도 비슷한 글을 자주 본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사양 압력’은 모든 사람에게 균일하게 가해지지 않는다. 어딘가를, 누군가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 pp.169~170
여성이 성폭력을 당해도 ‘자기 책임.’
불안정한 고용 형태로 노동할 수밖에 없어도 ‘자기 책임.’
병에 걸려도 ‘자기 책임.’
빈곤층으로 떨어진 것도 ‘자기 책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힘들어도 ‘자기 책임.’
사원 인권 침해가 횡행하는 기업에 들어간 것도 ‘자기 책임.’
노후를 준비하지 못했어도 ‘자기 책임.’
--- p.176
“자기 책임”이라는 말에는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이니 일어난 일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자기 책임론자’ 관점으로 보면 사회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해도 타인이 그 일로 마음 아파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성폭력도 빈곤도 질병도 육아도 재해도, 모두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났을 뿐, 언제 나 또는 내 소중한 사람에게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자기 책임’이라는 말은 이런 인식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 이 말을 쓰면 쓸수록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이 망가진다.
--- p.178
실제로 “문학적이네요”라는 표현이 칭찬으로 쓰이는 경우는 잘 없다. 대개는 ‘애매하다’, ‘논리성이 부족하다’, ‘자기 세계관이 지나치게 강하다’ 등, 좀 어렵다는 어감이 내포된 채 쓰이고 있다. ‘문학’이라고 하나로 묶어 말하지만 사실 문학의 폭은 넓다. 게다가 딱히 내가 ‘문학자’ 대표도 아니니까 나라는 한 개인에게 ‘문학’의 이미지나 지위 향상을 위해 분투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문학’이 경시되는 세태는 아무래도 씁쓸하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해보자면 요컨대 ‘곰 인형’ 같은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무언가가 없다고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생활’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지만, 힘들거나 괴롭거나 외로울 때 살며시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이 이 세계에는 있다.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구원받은 느낌을 주는 것. 그 존재를 믿으려는 마음의 움직임. 그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한 개인은 그런 것을 ‘문학’으로 여기며, 그런 것이 지닌 힘을 해명하고 싶다.
--- pp.209~210
최근 이 사회는 ‘안이한 요약주의’의 길로 달려 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좌우간 빠르고, 짧고, 이해하기 쉽고, 흑백이 분명하고, 적과 우리 편을 구별하기 쉽고, 감정을 간단히 정리한다. 그 런 말들만 대접받고 세상에 넘쳐흐른다. 그 원인 중에는 틀림없이 소셜 미디어가 있다. 확실히 소셜 미디어상의 정보는 빠르게 움직이고 도움이 된다. 나도 평소 그 편리함을 향유하고 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의 프레임으로 잘라낸 말은 현상을 치밀하고 정확하게 ‘요약’한 것처럼 보여도 대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기도와 같은 마음이 담겨 있는가 하면 역시 그쪽도 아닐 때가 많다. 우리가 매일 보는 소셜 미디어의 말이 정확한 ‘요약’도, 세상의 ‘일부’도 아니라면 과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 p.231
우리는 모두 ‘요약’할 수 없는 인생을, 깔끔하게 말로 정리할 수 없는 채로, 오늘이라는 날을 아무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정리되지 않음’이야말로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 귀함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그런 귀함이 태연한 얼굴로 다소곳이 앉아 머무를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