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새싹을 발견한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열무와 시금치의 새싹들이 한꺼번에 뿅뿅뿅뿅 태어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농사 첫해의 어느 봄날. 초보 농부라면 잊지 못할 순간이다. 열무의 새싹은 하트 모양의 쌍떡잎, 그리고 시금치의 새싹은 잔디처럼 길고 가느다랗게 생겼다. 씨앗 껍질을 뚫고 나온 이 새싹들 중에는 잎 끄트머리에 아직 벗겨지지 않은 씨앗 껍질 모자를 쓰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이 모습이 너무 귀엽고 신기하고 경이로워서, 입을 벌린 채 한참 밭에 쭈그리고 앉아 새싹을 구경했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새싹을 구경하고 있으니 옆 고랑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베테랑 아저씨 한 분이 “새싹 처음 봐요?” 하고 껄껄 웃으셨다. 이윽고 본인의 일행들을 불러 모은 뒤 “농사 처음 짓나 봐! 신기한가 보네.” 하고 새싹을 구경하는 나를 구경하셨다. 음…… 어쩐지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경이로운 광경을 조금 더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렇게 다리가 저려올 때까지, 그리고 베테랑 아저씨들이 초보 농부 구경을 마치고 떠나실 때까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새싹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농사의 근본 1: 씨앗에 담긴 거대한 우주」중에서
모발 건강의 근원이 두피에 있는 것처럼 농사의 근본이 그 땅에 있음을 배우고 난 뒤부터는 매년 봄, 주말농장의 개장 날이 더욱 설렌다. 올해는 농장의 어떤 구역에 내 밭이 배정됐는지, 그 밭의 흙은 어떤지,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아 눈으로 훑어보고 손으로 한번 만져본다. 김매기를 하고 나면 흙이 좀 더 편하게 숨 쉬는 것 같아 기쁘고, 흙을 드러낼 때 불현듯 마주치는 지렁이도 전처럼 징그럽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땅속을 돌아다니며 흙이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고 배설물을 통해 양분을 공급하는 지렁이들은 오히려 손발이 야무지지 못한 도시농부가 고마워해야 할 존재다.
---「농사의 근본 2: 지구의 두피를 지켜주세요」중에서
작물들이 왕성하게 자라나는 여름에 몇 시간씩 가지치기를 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태닝’이라는 걸 하게 된다. 이른바 농사 태닝농사 태닝이라고, 햇빛이 닿은 부분은 잘 구운 식빵처럼 적당하게 갈색으로 그을리지만 햇빛이 닿지 않은 부분은 그냥 누렇기 때문에 상당히 창피해진다. 이러나저러나 돈 쓰지 않고 태닝을 한 것 자체로는 이득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팔뚝을 이렇게 그라데이션해 굽고 싶지 않다면 팔토시를 구입하는 게 좋겠다. 우리 농부들이 사용하는 것은 어릴 때 미술 시간에 착용했던 그런 귀여운 팔토시다. 초록색과 핑크색 체크무늬로 앞뒤에 고무줄이 들어가 있어 착용하기 간편하다. 인터넷에서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농사용 팔토시나 운전할 때 쓰는 햇빛 차단용 팔토시를 사도 무방하다. 물론 용이 똬리를 튼 그림 같은 게 잔뜩 그려진 문신 프린트의 팔토시를 착용한다 해도 농장에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으니 취향대로 고르도록.
---「도시농부 필수 장비: 농사도 템빨이랍니다」중에서
올해는 멤버들 각자 마음에 드는 점프슈트를 구입하고 등에 우리 클럽 이름인 ‘urbanfarmer socialclub’을 자수로 새겨 단복을 맞춰 입기로 결정했다. 어디서든 각자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어디서든 함께 농사를 짓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건 그간 함께 농사를 지으며 싹튼 동료 의식 덕분일 것이다. 우리는 한 팀이니까, 도시농부 소셜클럽만의 단복으로 더욱 단단하고 끈끈하게 함께라는 마음을 느끼고 싶다. 이런 게 바로, 말이 길어질까 봐 앞서 설명하지 않았던 유니폼의 존재 이유다.
---「농사는 패션: 멋 내기에 진심인 도시농부들」중에서
많은 사람이 ‘벌레를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어떻게 농사를 짓냐?’고 묻는다. 글쎄, 벌레는 여전히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지만 밭에서 마주칠 땐 어쩐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채소를 심고 가꾸면 채소의 삶뿐만이 아니라 그 땅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의 삶이 보인다. 농부의 눈으로 벌레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내가 그들의 터전에 불쑥 나타난 불청객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벌레가 징그럽다 해도 펄쩍펄쩍 뛸 일이 아니다. 불청객에게 소작할 땅 한 켠을 내어준 것만 해도 고마운 셈이다. 이제는 웬만하면 벌레들이 다치지 않게 호미질도 조심조심, 가지치기도 조심조심, 그리고 농작물에 섞여 갑자기 고향 땅을 떠날 일 없도록 수확한 작물에 벌레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살펴보고 있다.
---「농장의 생명들: 벌레는 무섭지만 농사는 짓고 싶어」중에서
애플 참외의 성공과 메론의 실패가 남긴 잔상은 ‘과일 농사는 꿈도 꾸지 말자’나 ‘메론은 키우기 어렵다’는 트라우마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공은 없고 욕망만 가득한 농사 2년 차 도시농부가 잃어버렸던 설렘이었던 것 같다. 번듯한 채소를 키워 처음 수확한 날의 기쁨을 어느덧 잊고 있었던 도시농부에게, 애플 참외와 메론은 그때의 설렘을 기억하게 해준 고마운 존재다.
---「과일 농사의 꿈: 메롱이와 메룽이가 되찾아 준 설렘」중에서
농사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생겼다. 이를테면 도심 속에서 자라고 있는 채소 같은 것들이다. 단독주택들이 모여 있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에 들르면 대문 앞에 화분을 줄줄이 내놓은 집들을 볼 수 있다. 지나가는 행인의 눈에는 어떠한 질서도 조형미도 없어 보이는 그냥 아무 화분일지 몰라도, 이 화분 디스플레이에는 집주인의 취향과 의도와 애정이 분명히 담겨 있다. 이런 동네를 산책할 때면 장소 불문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좋아하는 INFJ답게 뜸을 많이 들여 동네 구경을 하는 편이다. 집안을 들여다보기는 어려우니 보통 집 앞에 놓인 화분이나 담벼락 너머 심은 나무들의 종류, 건축물의 스타일 등으로 집주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에 대해 상상하곤 한다.
---「도시의 농부들: 우리 채소 예쁜 것 좀 보세요」중에서
어지러움이 좀체 사라지지 않았던 봄과 여름에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했다. 몸을 많이 써야 하는 농사는 마음에 큰 짐이 되었고, 농사를 계속 이어갈지 말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결국 그해 농사를 포기하기로 결심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의 짐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밭을 정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텃밭에 방문한 날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서 이미 다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작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잘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처음으로 모종을 사다 심어본 풋호박의 성장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모종을 정식한 지 한 달여 만에 열매를 맺고 주먹만 한 과실을 네 개나 키워내고 있는 게 아닌가? 줄기를 솎아주지도, 넝쿨에 올려 예쁘게 정리해 주지도 못했고 하물며 물도 주지도 못했는데…… 자연의 도움만으로 쑥쑥 자라고 있는 풋호박이 기특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치 ‘모든 걸 다 해주지 않아도 돼. 우리는 알아서 잘 자라고 있을 테니 몸과 마음이 가뿐할 때 수확하러 와.’ 하고 토닥거려 주는 것 같았다. 무겁고 쓰라린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언젠가 괜찮아질 것이란 희망을 준 것은 이곳저곳 찾아가 만난 명의의 소견도, 그가 조제해 준 비싼 약도 아닌, 풋호박의 소리 없는 응원이었다.
---「농한기: 풋호박의 소리 없는 응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