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가 코미디언 출신이라면 푸틴은 KGB(소련국가보안위원회) 스파이 출신이다. 전자가 ‘양(陽)’의 힘을 구사해서 대통령까지 되었다면 후자는 협박과 암살도 마다하지 않는 ‘음(陰)’의 힘의 달인이다. 지금 시점에서 5년이나 지속되어온 동부 돈바스 지역 분쟁은 양극에 있는 두 지도자의 손에 맡겨져 있다.
--- p.40, 「1부 2021년 봄의 군사적 위기, 코미디언 vs 스파이」 중에서
2021년 7월 12일에 공표된 푸틴의 논문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약 8000 단어에 이르는 이 긴 논문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일체성에 대하여」라는 제목 그대로 대부분이 역사관에 대한 것이다. 논문의 핵심 주장 역시 제목대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그리고 벨라루스인)은 9세기에 발흥한 고대 루스를 계승하는 민족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 p.61, 「2부 개전 전야,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일체성에 대하여」 중에서
우크라이나의 드미트로 쿨레바 외무장관이 개전 후에 밝힌 에피소드는 보다 더 적나라하다. ‘매우 영향력이 큰 어느 유럽 국가’에 주재하는 우크라이나 대사가 그 나라 외무장관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길어야 48시간 내에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텐데 왜 귀국을 도와야 합니까?”
--- p.106, 「3부 특별군사작전, 버티는 우크라이나군」 중에서
서방의 우크라이나 원조를 단념시킨 것은 이제까지 여러 번 언급해온 서방의 공포, 즉 우크라이나 지원을 전쟁 행위로 간주한다는 러시아가 전쟁을 나토 가맹국에까지 확대하거나 핵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이길 수 있는 만큼의 지원’과 ‘제3차 세계대전의 회피’라는 두 가지 상반된 요구 사이에서 서방은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 p.148, 「4부 전환기를 맞은 제2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가 받을 수 있는 것과 받을 수 없는 것」 중에서
하지만 일단 푸틴이 전시체제를 선언하면 이 ‘불가침협정’이 붕괴되고 공포와 분노가 사회에 퍼질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전쟁의 ‘삼위일체’ 중 ‘국민’ 요소(전쟁에 대한 열광적 지지)를 잃을지 모른다. 이것이 푸틴으로 하여금 총동원령 발동을 주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 p.159-160, 「4부 전환기를 맞은 제2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래도 총동원령을 발동할 수 없는 푸틴」 중에서
조금 떨어져서 관찰해보면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은 별로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역 쟁탈전, 기갑 전력에 의한 대규모 돌파, 항공기에 의한 근접 항공 지원과 저지 공격, 병참의 열쇠를 쥔 철도 공격 등은 80년 전의 전쟁을 그대로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전장에서 일반 시민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 포로 학대, 전쟁이 초래한 시민 생활 파괴 등도 마찬가지다. 제2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1세기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하이테크 독·소 전쟁이라고도 부를만한 전쟁이므로 근본적인 ‘성질’은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다.
--- p.173, 「5부 이 전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테크놀로지가 바꾸는 것과 바꾸지 않는 것」 중에서
‘자신의 대에서 루스 민족의 통일을 이룬다’는 민족주의적 야망 같은 것이 있다고 상정하지 않고서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둘러싼 푸틴의 행동거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 p.197, 「5부 이 전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푸틴의 야망설과 그 한계」 중에서
전쟁에 동원되어 다루기도 익숙하지 않은 총을 쥐고 전선에 투입되는 병사들, 집을 잃거나 가족이 죽임을 당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분쟁 지역 주민들, 더는 눈물도 흘릴 수 없는 수많은 사망자들, 이 전쟁은 이런 사람들을 지금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나탈리아이기도 하고 이홀이기도 하며 세르게이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는 블라드미르였던 이름을 볼로디미르로 발음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전사(戰士)로 불리는 사람들, 또는 이름조차 알 수 없고 번호만 매겨져서 매장되는 시신들도 있다. (…) 거듭 말하지만 이 전쟁에는 미시적인 현실이 존재한다. 그 대부분은 비극적인 현실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마지막으로 몇몇 조그마한 이름을 언급하고 싶다. 이루 다 불러줄 수 없는 수많은 조그마한 이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p.205, 「후기 조그마한 이름을 위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