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례식 내내 울기만 했다. 그녀의 발인 때도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그녀의 몸이 뼛가루로 변하고, 납골당에 자리하는 마지막까지도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깟 기말고사가 뭐라고? 왜 나는 별이가 그렇게도 간절하게 내미는 손을 잡아주지 못했을까? 별이의 요청대로 내가 바로 만나주었더라면 별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1학기가 끝나자마자 무작정 비행기 표를 끊고 인도로 향했다. 잃어버린 삶의 목적과 이유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이 세상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 p.30
-그런데 이상했다. 늘 내 마음을 짓누르던 죄의식, 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삶의 공허함과 무력함이 어느 순간부터 잔잔해져 갔다. 이젠 저녁이 되어도 별이의 환청이 들리거나, 울거나,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는 일이 없어졌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언제부터 달라졌을까? 인도에서 봉사할 때일까? 캘커타에 있을 때일까? 아니면 메콩강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일까?
그러고 보니 “너희 동족인 북한 사람은 왜 구출하지 않느냐?”는 외국인 활동가의 책망 같은 질문을 받고나서부터 정신이 번쩍 들고 삶의 목적이 생겼던 것 같다. 가까운 곳에서 방황하는 내 동족 북한 여성들도 도와주지 못하면서, 먼 이곳에 와서 타국의 여성들을 돕는다는 건 이타적이긴 하지만 이율배반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었다. 외국인 활동가의 그 말은 터널처럼 캄캄하던 내 마음속에 한 줄기 선명한 빛이었던 것이다.
--- p.40
-나는 전공도 정치외교학이다. 법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북한인권 옹호활동을 하려면 내가 변호사가 되는 게 최선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이럴 거면 내가 변호사가 되어서 도와드려야겠다. 아예 북향민을 도와드리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무작정 로스쿨에 들어가고 법 공부를 시작했는데, 너무나 어려웠다. 법 공부가 그렇게 힘든 줄 사전에 알았다면 절대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하고 무식하니까 ‘해야지’ 하는 마음에 용기를 낸 것인데,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힘들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두꺼운 책 수십 권을 거의 다 외워야지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하루 3시간만 자고 공부에 몰두했다. 체력이 달려 병원 응급실에도 여러 번 실려 갔다. 법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지, 머리와 체력의 한계는 있지, 그렇다 보니 시험 공부를 하다가 하혈도 했다. 그렇게 몸이 거의 다 망가진 상태로 나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 p.46
-내 이름이 점점 알려지자 고향 군산에서도 연락이 왔다. 군산에서 일하는 시민단체 분들이 군산 지역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얘기하면서 군산의 발전을 위해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물었다. 아마, 딴에는 군산의 유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자영업을 하십니다.”
“무슨 자영업요?”
“군산에서 조그만 전파사를 하십니다.”
그 말에 상대방의 전화기가 한 5초 쯤 조용해졌다. 나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물었던 시민단체 관계자 분은 틀림없이 나의 아버지가 정치인이거나 최소한 지역의 유력 인사 정도는 될 걸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그 침묵의 시간을 고려할 때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 p.53
-결국 어릴 적부터 여자라서 겪었던 여러 부당한 일들, 서울에 와서 고향이 전라도라서 항상 고개 숙이고 위축되어 살아야 했던 힘든 나날들은 훗날 북한에서 온 여성들을 온 몸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최고의 위로는 공감이라고 했던가. 내가 선택하지 않는 고향과 성별로 인해 어릴 적부터 나는 왜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해 반장을 못하는지, 여자가 드세고 재수없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왜 나는 전라도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지 화가 났다.
북한에서 온 북향 여성들은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북향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으로 문제 있거나 낮은 위치로 본다. 이분들이 왜 “남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하면 좋아하는지 난 온몸으로 이해한다. 나도 고향과 성별로 차별받아 왔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니까.
--- p.68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고급스럽게 정의했지만, 나는 그냥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약자들의 목소리, 그들의 괴로움이 대변되고 정책에 반영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질 못하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들어보기가 힘들다. 그것도 탈북자나 노동자, 콜센터 직원이나 여자 교사가 자살을 하거나 장애인들이 끈질기게 시위를 해야지 그나마 언론에 보도가 되고 이슈가 된다. 그때에조차 정치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니 ‘정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내 정의는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셈이다.
내가 정치를 하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이 정의를 현실에 대입하는 것, 그래서 현실 정치에서 약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기 위해서다.
--- p.82
-예전에 부모님 앞에서 나의 결심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저는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 죽을 겁니다. 그러니 저를 나라에 바쳤다고 생각하시고 없는 사람 치세요.” 부모님은 아주 슬퍼하셨지만 차마 만류하지는 않으셨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본받아 이 땅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살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내 온몸을 던질 것이다. 김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이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 같이 떠오르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친미니 반미니, 친일이니 반일이니를 따지지 않고 오직 대한민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여 국익을 위한 외교를 펼칠 수 있도록 죽는 날까지 온 힘을 다하고 싶다.
솔직히 정치를 시작하는 게 두렵다. 그렇다고 망설이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목소리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누군가는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일 뿐, 나는 당당히 김대중이 갔던 길을 걸어갈 것이다.
--- p.103
-내가 2020년 8월 초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미투를 폭로했던 것도 이 북향 여성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마음으로는 폭로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다. 물론 결혼 전에 이미 남편은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댁 식구들이 알게 되면, 세상이 알게 되면 괜히 시끄러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되었다. 나도 성폭력 피해를 당했는데 나는 마치 아무런 피해도 당하지 않은 것처럼 가면을 쓰고 북향 여성들의 피해 사실을 듣고 변호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
무엇보다 ‘나도 당신처럼 당했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걸 무릅쓰고 미투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 p.124
-내가 장애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사지도 말짱하고, 이목구비도 다 있고 더군다나 말도 잘하는데 무슨 장애인이냐는 것이다. 나는 지체장애 5급의 장애인이다.
내가 장애인이 된 건 대학생 때 탈북민 구출 활동을 하면서다. 중국에서 탈북 여성 구출 활동을 하려면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우선 불법 입국자로 몰래 중국에 들어가야 한다. 중국에 가서도 공안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 007작전을 방불하는 특수 활동을 벌여야 한다.
나는 음료수나 물병을 혼자서 딸 수가 없다. 한번은 어느 세미나에 갔다가 너무나 목이 말라서 옆자리에 앉은 청년에게 부탁을 했는데, 나를 무슨 공주가 하녀에게 사소한 일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혐오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물 마시는 것을 포기했다. 그 뒤로도 매번 “아, 저는 장애인이라서 물병을 혼자 열지 못하는데요. 죄송하지만 물병 열어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하기가 너무 구차했다. 아무리 목이 마르고 눈앞에 물병이 있어도 꾹 참고 만다.
--- p.132
-이런 상황을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총대를 메기로 했다. 피해자 유족들의 억울한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법률검토와 변호인단 구성 후 11월 8일부터 국가배상청구 소송인단 모집을 시작했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0일 만이었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나타냈다. 법률 상담을 위해 이메일, 사무실 번호를 공개해야 했는데, 하루 전화의 50%는 참사의 유가족 분들이나 지인들 상담, 30%는 응원과 격려, 그리고 20%는 욕설과 저주였다. 욕설과 저주는 충분히 예상했으니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많은 언론과 시민단체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었고 격려해 주었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내가 유족들을 직접 만나서 소송하자고 부추기며 다닌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나에 대한 엄청난 과대평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변호사이지만 나 역시 평범한 일반 국민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 분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연락처가 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76
-외교는 선의에만 기대선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북한의 선의에만 기대선 안 되는 이유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똑같은 우를 미국과 일본에게 범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선의에만 기댄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사실상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 사실, 38선을 경계로 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로 한 결정이 오늘날 한반도 국토 양단의 비극을 초래한 사실, 최근 미국의 자국 중심의 경제, 안보 정책으로 인하여 우리의 경제 및 안보에도 큰 타격을 초래하면서 과거 절대적인 미국에 대한 신뢰와 우호관계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민적 동의 없는 ‘제3자 변제안’을 비롯하여 100년 전 일로 일본이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윤 대통령 발언은, 일본의 선의에만 기댄 일방적 외교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윤 대통령은 과연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하는 것인지 그 정체성마저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국민은 윤 대통령에게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면죄부를 줄 권리까지 위임하지는 않았다.
--- p.166
-전체 북향민 중 극히 일부만 언론에 노출됨에도 이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북한이나 진보 정권에 대한 자극적인 언사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들의 언사는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타전된다. 그러면 미국이나 유럽, 일본 같은 데서는 이들이 남한의 전체 탈북민들을 대표한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왜곡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탈북민을 접하면 접할수록 북향민 사회 안에 세대별, 지역별, 성별로 다양한 경험, 다양한 생각들이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남한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북향민들은 일부 고향 사람들의 극단적 행위를 불편해한다. 일부의 북향민 목소리로 전체를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양한 북향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기회의 창을 열어줘야 한다.
--- p.197
-북향민들이 스스로의 고향을 말할 때 남한 분들이 “오 그러시구나” 하면서 활짝 웃으며 손잡고 마음으로 환대하는 그 날이 바로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오는 날일 것이다. 지금까지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전 세계 G3, 경제·문화 강국도 현실이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세계 평화를 구현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할 때 우리에게 임하는 축복과 은혜인 셈이다.
나는 이런 내 꿈을 가족들에게 얘기했다가 혼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이야 말로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김구 선생이 못다 이룬 나의 독립운동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그 끝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다. 그 날이 오면 나는 비로소 이 땅에 온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