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첫머리에 시진핑 주석은 일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한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그 자체도 대단히 이례적이었지만, 그 발언의 강도가 세서 많이들 놀랐다. 그런데 일본 전문가인 나에게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중국이 일본과 계속해서 대립하는 관계였기에 한국과의 정상회담에서조차 일본 문제를 꺼내 들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중일 관계가 더 악화되고 살벌해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전개는 다양한 요소에 의해 바뀌지만, 2017년 연말의 한중 정상회담은 커다란 역사적 변곡점이었다. 그다음 해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오는 물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하와이 ‘태평양사령부’의 이름을 ‘인도·태평양사령부’로 바꾸며 군사적 대결을 더욱 노골화했다.
--- p.13, 「프롤로그 _ 일본의 새로운 대외 팽창과 한국 경제의 미래」중에서
특히 도쿄 올림픽은 아베 정권이 ‘일본 부흥의 상징’으로 줄곧 의미를 부여해온 까닭에, 일본 정부는 코로나 확진자 발견이나 상황 공유에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대유행이 일어났고 외국인의 방일을 전면적으로 금지했으며 가게들의 영업을 제한하는 긴급 조치도 발령했다. 이것이 하강하던 일본 경제에 직격탄이 되었다. 2020년 2분기에는 경제성장률이 ?7.8%를 기록하며 전후 최대 하락 폭을 경신했다. 아베 수상은 지병을 핑계로 급히 사임했지만, 그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의 성과도 코로나 직격탄을 맞고 초라하게 막을 내린다. 버블붕괴 뒤 소위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0.8%였다. 그리고 아베노믹스 기간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0.9%를 기록했다. 겉으로는 요란했지만 그가 목표로 잡은 2% 경제성장률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결과였다.
--- p.41, 「아베노믹스는 왜 반쪽짜리가 되었나?」중에서
그렇다면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떠한 처방전이 제대로 된 처방전이었을까? 이에 대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그중에서 우리에게 시사점을 줄 수 있는 2가지 원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장기침체가 버블의 발생과 붕괴로 시작되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인구 감소, 특히 생산 가능 인구의 감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소위 ‘인구 절벽’과 장기침체가 함께 일어났다. 이것은 한동안 일본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유였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 경제도 장기침체에 빠졌지만, 인구 충격은 오랜 기간 서서히 나타났다. 게다가 유럽은 경제 통합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충격을 국가 간 인구 이동이나 이민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완화해왔다. 하지만 일본은 인구 충격을 매우 빠른 속도로 경험하게 된 첫 선진국이었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생산 가능 인구가 급속도로 줄었고, 이것이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 p.65, 「곳곳에 부작용을 낳은 잘못된 경제 처방전」중에서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전국의 중증환자 수를 팩스로 집계하는 모습이 뉴스에 나왔는데, 그걸 보고 모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 1990년대까지도 팩스가 모든 국민에게 너무나 편리한 통신수단이었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의 이점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감각에 기름을 부은 것이, 앞서 설명한 ISDN 동축케이블로 전국의 인터넷망을 구축한 일본 정부의 오판이었다. 우리나라는 ADSL 광케이블로 인터넷망을 구축했기에 국민들이 고속 인터넷을 경험했고, 빠르고 편리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팩스를 보내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동축케이블로 인터넷을 깔아버렸기 때문에 이용자 입장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신속하게 보급된 후 사용자가 급격히 늘어나야 투자비가 쉽게 회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처럼 광케이블로 인터넷망을 구축한 선택은, 아날로그식 판단으로는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것도 기간망뿐만 아니라 각 가정까지 광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 무식한 선택일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영역이다 보니 이러한 무모함과 과감함이 오히려 올바른 선택이 되었고, 일본의 합리적인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것이었다.
--- p.120, 「지나친 신중함이 발목을 잡은 일본의 인터넷 보급」중에서
‘리더십 부재’, ‘전략 없는 경영’ 같은 말은 경제 침체기에 일본 기업을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용어였다. 매출이 떨어지고 이익이 줄어들면 기업들은 최고경영자가 전면에 나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위기를 극복한다. 그 경영자는 제대로 된 전략을 가지고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장기침체를 겪는 동안 일본 기업들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때문에 많은 사람이 리더십과 전략이 없는 일본식 경영을 질타했다. 일본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한국의 경영자들과 상당히 다르다. 한국은 경영자들이 전권을 휘두르는 황제와 같다고 해 ‘황제 경영’이라고도 하는데, 일본은 경영자들이 존재만 하고 군림하지는 않는 영주(일본에서는 주군)와 같다고 해서 ‘주군 경영’이라고 한다.
--- p.135, 「황제 경영 vs. 주군 경영」중에서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새로 부상하는 세력이 기존의 지배 세력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위협해올 때 구조적 긴장이 극심하게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앨리슨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기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급격하게 부상하던 아테네와 이를 견제하려는 스파르타가 빚어낸 구조적 긴장 관계의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지난 500년간 세계에서 발생한 ‘투키디데스 함정’은 총 16차례였고, 그중 12번이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의 턱밑까지 따라왔고 그 속에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중흥(중국몽)’을 선언했기 때문에 미국의 견제는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야망을 축소한다면 이 전쟁을 피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역전쟁이나 사이버 전쟁, 해상에서의 국지적 충돌 등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트럼프가 취하는 외교적 조치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일정 부분 정당화하는 책이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주장이 미국 주류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기에 한국에도 소개되고 주목받았다.
--- p.173, 「투키디데스 함정과 트럼프의 예정된 전쟁」중에서
이것을 되받아친 것이 한국인들의 일본 관광 거부였다. (…) 자민당은 대도시보다 지방 중소도시에 강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지방 중소도시는 장기 경제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지방 소멸’의 주요 대상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만 있다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민당의 지지 기반을 유지할 좋은 방안도 된다. 때문에 자민당은 지방창생본부를 만들고 지방 관광 육성 정책을 강력히 시행했다. 그런 정책의 영향으로 일본 중소도시 관광이 활성화되었고, 거기에 많이 간 사람들이 주로 한국인이었다.
현명한 한국인들은 이 점에 착목했다. 지방 관광이 일본의 급소였던 것이다.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를 급소라 여기고 찌르려 했으니 한국도 그 보복으로 지방 관광을 거부했다. 이것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한국 관광객이 발길을 끊자 지방 중소도시 자민당 의원들이 타격을 받았고, 그들은 서서히 아베 정권에 비판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권 교체의 중요 계기가 되었다
--- p.206, 「서로의 급소를 노린 한일 양국」중에서
일본의 조직에서는 리더가 좀 무능해도, 구성원들은 리더의 지시에 순응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직은 돌아간다. 하지만 한국의 조직에서는 리더가 무능하면 구성원들이 즉각 반발하기 때문에 조직 자체가 기능하지 않는다. 더구나 순조롭게 돌아가는 조직이라도 한국의 구성원들은 언젠가는 스스로 소황제에 도전한다. 소황제가 리더십을 발휘해 성과를 잘 내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조직 내에서 “니가(네가) 뭔데?”라며 도전하는 구성원이 나오고 소황제 교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나의 오랜 숙제가 풀리는 듯했다.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은 ‘니가 뭔데’로 대표되는 도전 정신이다. 이러한 도전 정신이 충만한 황제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왔고, 그러한 성과 덕분에 한국이 전체적으로 성장해온 것이다.
--- p.321,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 “니가 뭔데?”」중에서
국민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특히 최첨단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자본의 힘을 앞세운 기업들에 척질 수는 없다. 미국은 4년마다 투표로 정권이 교체되는 나라다. 그러한 체제에서 기업들의 정치 헌금은 대선 결과를 좌우하는 중요 요소다. 이를 아는 미국 재무부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따라 움직였다. 그 결과가 바로 2023년 5월의 히로시마 G7 공동선언이었다. 하지만 5년 만에 디커플링이 디리스킹으로 변경되었다 해도 패권국 미국이 한번 빼든 칼을 쉽게 거두어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한동안은 디리스킹을 가지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여러 국가들이 암중모색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또한 인태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일본은 변화하는 미국을 보면서 언제까지나 자신들이 돌격대 역할만 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특히 아베파를 위시한 신주류들의 힘이 서서히 빠지면서 대중국 정책도 수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국가 간, 진영 간 대립은 격화되었고 세계 경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어설프게 나선 결과였다.
--- p.336, 「에필로그 _ 다시 성장과 포용의 길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