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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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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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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년 09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416g | 130*188*30mm
ISBN13 9791193289020
ISBN10 1193289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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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취기 가득한 사람의 온기가 위로하는 것]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작가의 음주 예찬 에세이. 애주가인 그가 그간 만났던 술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위스키를 들고 지리산을 누빈 이야기부터 타국에서 느낀 역사의 비극까지. 술로 허문 벽들이 전하는 사람의 온기가 맛깔나게 전해오는 책. - 에세이 PD 이나영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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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은 기나길었다. 부모님이 없는데도 우리는 다른 집에서보다 더 얌전하게 놀았다. 누군가의 손목을 잡기 위한 핑계로 하던 카드 게임이나 고스톱도 치지 않았다. 몇 차례 광에 들락거리긴 했지만 누구도 취할 정도로 과음하지는 않았다. 자분자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소복소복, 눈 쌓이는 소리가 이따금의 침묵 사이로 스며들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방문을 연 누군가 탄성을 내질렀다.

“웜마야!”

다들 앉은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목만 길게 빼고 내다본 바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백색의 순수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한 뼘씩 쌓여 있었다. 뒤란의 대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끝까지 휘늘어진 채였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췄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던 걸 보면 친구들 역시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열아홉, 그때는 믿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순백의 시간을 순백으로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1부 첫 술은 아빠」중에서

싱글몰트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맥켈란 1926이 내 잔에도 가득 찼다. 녀석은 뜨겁고 깊고 진했다. 끈적끈적, 끝도 없는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맛이었다. 맥켈란 1926을 입에 오래 머금은 채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세상 떠나기 전에 좋은 술, 맛이나 보라고 내가 보내준 시바스리갈 18년산을 소주 한 박스와 바꿔 마신 내 아버지를. 젊은 날에는 똑같이 민족의 통일과 평등을 주장했으나 두 사람의 끝은 전혀 달랐다.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삶이 늘 애달프고 서글펐다. 아버지 스스로 당신의 삶을 쓸쓸해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맥켈란 1926을 마시며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결말이 내 취향에 더 걸맞다는 것을. 아버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는 것을. 참으로 다행 아닌가? 성공할 기회가 없어 타락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은!
---「2부 타락의 맛, 맥켈란 1926」중에서

그런 순간에는 술의 맛이 그닥 중요하지 않다. 별이 빛나고 하늘과 초원이 맞닿고 모닥불이 사위어가는 그런 밤에는. 술이 들어가고 말은 차츰 사라졌다. 누군가는 뚫어져라 모닥불을 쳐다보고, 누군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누군가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저 고요히 술을 마셨을 뿐인데 잠자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도 우리 곁에 털썩 주저앉아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들도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이런 순간에는 약간의 알코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그러니까 그냥 우리는, 그날 알코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잠시 우주의 일부가 되는 경이를 경험했다. 새로운 별들이 떠오르고, 달이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술이 천천히 우리의 혈관을 데우고, 모닥불은 사위고, 그렇게 초원의 밤이 깊어갔다.
---「3부 초원의 모닥불이 사위어 갈 때」중에서

여름인데도 한기가 느껴지는 계곡가 바위 위에서 소름이 쫙 돋았다. 나 살아서 갈 수는 있는 걸까? 북한에서의 여정 내내 북한 측이 정한 곳 외에는 단독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단독 행동을 했다가 큰일 날 거라고, 남측 관계자가 몇 번이나 주의를 준 바 있었다. 나는 지금 단독 행동을 한 것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어제 들어간 호텔의 불빛이 보였다.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호텔 외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보위부원들이 늘 호텔 앞을 지키고 감시를 했었는데 웬일일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첩첩산중이라 북한 사람과 접촉할 일이 없어서였을 것 같다. 그때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상황을 깨닫자마자 호텔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멀지는 않았다.

200~300미터쯤. 숨이 턱에 닿을 즈음 호텔에 당도했다. 호텔은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마 남한 작가들이 묵고 있을 방 몇 개의 불빛만 희미하게 빛났다. 취침등인 듯했다. 맥이 탁 풀렸다. 술을 마시다 취하고 필름이 끊기고 술과 낭만에 취해 비틀거리며 산길을 걷고, 은하수를 보다 누워 잠들고, 뭐!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그럴 수 있었다. 그 금단의 땅 북한에서도.
---「3부 오래 있었습네다」중에서

“쌤! 나도.”
입술이 파랗게 질린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한여름인데도 계곡물은 몸서리치게 차가웠다. 블루를 가득 따라 아이에게 건넸다. 한 잔을 냉큼 마신 아이는 추위를 달랠 셈인지 물속에서 방방 뛰었다. 나는 아이의 입에 치즈 한 조각을 물려주었다. 차디찬 물속에서 알몸으로 즐기는 블루라니! 마음 같아선 나도 아이처럼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태어난 때와 달리 세상의 때가 묻은 나는 도무지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게 부끄러워 다시 블루를 마셨다.

해맑은 아이는 팔짝팔짝 뛰어 배롱나무 그늘이 진 수영장 끝으로 갔다. 그러고는 팔짝 뛰어 물 위로 몸을 띄웠다. 그 상태로 아이는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배운 배영이었다. 아이가 양팔을 뒤로 젖히자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어느 순간 아이의 몸이 배롱나무 그늘의 경계를 넘어 수면에 어룽거리는 뜨거운 햇빛 속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나는 홀린 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그랗고 자그만 가슴이 햇빛 속에 동동 떠 있었다. 아이가 배영으로 수영장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찬란하게 아름답구나.

나에게도 찬란한 젊음의 시절이 있기야 했겠지. 그때의 나는 몸 따위 돌아보지 않았다. 몸 따위, 하찮았다. 정신은 고결한 것, 육체는 하찮은 것. 그래서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는 모든 행위를 혐오했다. 혐오라니. 몸이 있어 정신이 존재하는 것인데. 젊은 나는 참으로 하찮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하찮게 천대해왔던 불쌍한 나의 몸에게 블루를, 귀하디귀한 블루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아름다운 육체가, 찬란한 젊음이 펼쳐보이는 어느 여름날의 천국에서.
---「4부 어느 여름날의 천국」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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