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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비밀은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나쁘다 누구나 이상한 구석이 있다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산다 누구나 이유가 있다 누구나 모르고 산다 작가의 말 |
鄭智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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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런 날이었다. 전날 오후부터 불어온 곳도 불어갈 곳도 헤아리기 어려운 바람이 미친년 널뛰듯 불어젖히더니 자정 넘어 가랑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살금살금 젖은 바람이 비와 함께 땅으로 스며든 것인지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잠귀 밝은 개들의 잠조차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고요한 비였다. 공기 중으로 스며든 습기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불안을 토닥여 그 밤, 모든 것들의 잠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달았다. 그 밤, 하늘과 땅 사이도 비에 씻겨 말 그대로 허공(虛空)이었다
--- p.7 그것들이 말이여. 그것들이 누군디? 누군가 대구를 맞춰 물었고, 윤 선생은 성을 내며 목청을 높였다. 아깨 말했잖애! 귓구멍은 뒀다 워따 쓸라고? 찌니들 땜시 모였당게. 찌니들이 뭐슬 워쨌가니? 갸들이 말이여. 윤 선생이 터무니없이 목소리를 낮췄고 사람들은 덩달아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귀를 기울였다. 윤 선생의 뒤이은 말은 누구도 상상한 적 없는, 수평마을에서 나고 자랐거나, 시집와 수십년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찌니들이 말이여. 레지랴 레지. --- p.20 촤악! 경쾌한 소리가 적막한 밤의 대기 속으로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쑤언의 손이 어찌나 매웠는지 이장은 피우던 담배를 저도 모르게 떨구고는 손이 닿지도 않는 맞은 부위 근처를 잔망스럽게 마구 쓰다듬었다. 쑤언은 이장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에라이, 쫌생아! 참말로 쪼까낼라고? 죽을 날 받아논 할매들이 그리 무섭냐? 그렇지! 참으면 쑤언이 아니지. 물 설고 말 선 이국 생활의 고충을 짐작하면서도 이장이 아내를 다독이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참는 법이라고는 없는 쑤언의 성품 탓이었다. 단 한번도 쑤언은 순순히 예,라고 하는 법이 없다. 아들 늦장가 보내놓고 덩실덩실 춤을 췄던 어머니에게도 그랬다. 그래도 어머니는 늘 쑤언을 추켜세웠다. --- p.42~43 제 친구 중에 미친년이 하나 있어요. 예전엔 동네마다 미친년이 하나씩 있었다. 수평마을 미친년은 어느 해인가 누에가 어른 가운뎃손가락보다 통실통실 살이 올랐을 무렵 집을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 필경 객사했을 테지. 알면서도 그 집 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아랫목에 미친년 밥사발을 묻어놓았더랬다. 노상 미친년이라 불러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이를 마지막으로 수평마을에서는 더이상 아무도 미치지 않았다. 약이 좋아 그런지 세월이 좋아 그런지 요새는 다른 마을에서도 미친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서울에는 요즘도 미친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젊은 처자가 워짜다가…… 이장이 혀를 차며 말을 잇지 못하자 혜진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진짜로 미친 게 아니라요…… 혜진이 웃느라 말을 잇지 못하자 냉큼 성진이 받았다. 닭을 키워요. 서울서? 달걀 묵을라고? 찌니들이 서로 마주 보며 꺄르르, 소녀들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아니라 우리 찹쌀 모찌처럼 애완용으로 키운다구요. --- p.80~81 혜진은 외삼촌의 정신병원에서 각종 검사와 상담을 했다. 끈 달린 운동화와 휴대전화를 빼앗긴 뒤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을 때, 혜진은 엄마가 정말로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다. 지극히 정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일주일 만에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엄마의 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오는 동안 혜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맞은 것도,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도, 혜진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혜진은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진심을 드러내는 순간 정신병원에 갇힌다, 세상의 단 한명도 나를 응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언제나 내 편일 줄 알았던 엄마조차도. 그날 혜진의 마음이 닫힌 것은 엄마 탓이었을까? 세상 탓이었을까? 모호한 채로 혜진은 스스로를 탓했다. 모난 돌은 결국 정을 맞는 게 세상의 이치고, 이성애자의 세계에서 동성애자는 모난 존재이니까. 그런데 지금 쑤언은 레즈비언이 코리안이나 아메리칸과 동급의 말이라도 되는 양 저리 쉽게 떠들어젖히고 있는 것이다. 찌니네뿐만 아니라 이장의 마음도 어쩐지 홀가분해졌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집주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 p.100~101 먼 일이요? 기희 비명을 듣고 달려온 장씨댁이 놀라 물었다. 우리 애가 지렁이를 먹어요! 워매, 달구새끼헌티 먼 일이 생긴 중 알고 심장이 벌렁벌렁 했구만은. 아니, 달구새끼가 지렁이를 묵제 글먼 지렁이가 달구새끼를 묵겄소? 장씨댁의 나름 위로에도 불구하고 기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 우리 애가 이런 애가 아니란 말예요. 어제까지만 해도 지렁이는 쳐다도 안 봤단 말예요. 본래 달구새끼들이 지렁이도 묵고 굼벵이도 묵고 뱀도 묵소. 사료보담 고런 걸 묵어야 달걀도 맛나요. 과 묵어도 맛나고. --- p.118~119 한씨가 너스레를 떨었다. 꼭 좀 알아봐달라고 당부한 뒤 이장은 걸음을 옮겼다. 윤 선생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 중일 터였다. 마음이 급했다. 아무리 미워도 한동네 사람 아닌가. 나랏돈 받는 이장이니 동네일이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게 마땅한 도리였다. 동네 사람들을 밀어낸 뒤 마지막으로 대문을 나선 이장이 문을 닫으려는 찰나 한씨가 쑥 고개를 들이밀고 외쳤다. 고맙소이, 레지 보살! 복 받을 거여! 왜 레지 부처가 아니고 레지 보살인지는 한씨만 알 터였다. --- p.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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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촌구석에 발령된 ‘찌니주의보’
쫓아내려는 사람들과 문을 닫아건 두 여성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수평마을 한가운데로 단숨에 끌고 들어간다. 오전 여덟시 반, 마을회관에 긴급 소집된 노인들 앞에서 자칭 지식인이자 마을의 실세인 ‘윤 선생’이 비장하게 폭로한 중대 사건은 서울에서 귀촌한 두 젊은 여성 성진과 혜진, 일명 ‘찌니들’이 “여자끼리 좋아하는” ‘레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촌로들이 아는 ‘레지’는 레즈비언이 아니라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을 일컫던 옛말. “새 레지가 왔으먼 나가 모를 리가 없제”라는 여든일곱 한씨의 호언장담에 엄숙했던 회의는 순식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말의 뜻을 겨우 알아들은 뒤에도 ‘절골댁’은 태연하게 묻는다. “좋응게 항꾼에 살겄지라. 싫으먼 암만 같은 여자라도 항꾼에 살겄소?” 진짜 갈등은 이제부터다. 여자끼리 함께 살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뿌리 깊은 믿음 앞에서 찌니들은 졸지에 해괴하고 위험한 존재가 된다. 윤 선생은 “마귀 새끼”를 당장 쫓아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세상의 날 선 시선을 피해 수평마을까지 흘러온 찌니들은 다시 문을 걸어 잠근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찌니들은 그들의 폭력적인 무례함을 견딜 수 없다. 고요하던 수평마을에는 마침내 일촉즉발의 ‘찌니주의보’가 발령된다. 입만 열면 웃음 터지고 돌아서면 마음 쓰이는 별난 이웃들의 대환장 마당극 하지만 윤 선생의 계획은 좀처럼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장의 베트남인 아내 쑤언이 찌니들을 몰아내려는 마을 사람들 앞을 가로막는다. 이십년 전 낯선 땅으로 시집와 이방인으로 살아온 쑤언에게 찌니들의 처지는 남의 일이 아니다. “갸들이 사램을 죽였어, 도둑질을 혔어? 머슬 워쨌다고 지랄옘벵을 떨어싼대?” 수평마을 누구보다 거침없는 언변을 자랑하는 쑤언의 등장은 이야기에 예측 불허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찌니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완고한 시선보다 촌로들의 모순된 행동이다. 내쫓아야 한다고 수군거리면서도 찌니들의 집 문고리에 시래깃국과 가지나물을 슬며시 걸어두고, 낯 뜨거운 질문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고는 돌아서다 말고 갓 부친 호박전을 손에 쥐여준다. 자신들을 미워하는 것인지 아끼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치명상을 입혀놓고 음식을 먹이는” 기묘한 이웃들 앞에서 찌니들이 굳게 믿어온 선과 악, 예의와 무례의 경계도 조금씩 흔들린다. 여기에 찌니들의 서울 친구 기희가 반려 닭 ‘삐돌이와 삐순이’를 데리고 나타나면서 마을은 또 한번 발칵 뒤집힌다. 닭을 자식처럼 유모차에 태우는 도시 여성과 평생 닭을 가축 이외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 없는 노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소동은 폭소를 자아내는 동시에,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얼마나 엉뚱한 방식으로 뒤섞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지아는 차별과 이주, 고령화와 돌봄 같은 무거운 사회적 의제를 훈계조로 설명하지 않는다. “주뎅이 닫고 묵기나 해야”라는 핀잔에 “주뎅이를 닫고 워치케 밥을 먹는대?”라고 응수하는 생생한 입말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의 기준을 유쾌하게 충돌시킬 뿐이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주거니 받거니 벌이는 소동은 한순간도 늘어질 틈 없이 독자를 끌고 간다. “물에 빠진 놈 일단 건져는 놓고 봐야제” 완전한 이해보다 먼저 도착하는 한 끼의 마음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소설은 예기치 않은 깊이와 울림을 더해간다. 찌니들을 가장 격렬하게 배척하던 윤 선생에게 마지막 삶의 터전마저 잃을 위기가 닥친 것이다. 평생 밉상으로 군 그가 막다른 곳에 몰리자 마을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암만 미와도 워쩌겄냐. 물에 빠진 놈 일단 건져는 놓고 봐야제.” 그리고 뜻밖의 인물이 윤 선생에게 손을 내민다. 미움이 사라졌기 때문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나누어온 한 이웃이 곤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선택을 기점으로 떠들썩했던 마을 소동극은 약한 존재들이 벼랑 끝에서 어떻게 서로의 숨을 붙드는지를 보여주는 벅찬 사람살이의 서사로 확장된다. 정지아는 사람들이 갑자기 계몽되고 편견을 깨끗이 씻어내는 아름다운 화해를 그리지 않는다. 수평마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무례하고 제멋대로이며 찌니들의 삶을 자기 기준으로 해석한다. 윤 선생 역시 정중히 사과하는 대신 먹어치우기도 버거운 양의 반찬을 요령없이 보낼 따름이다. 받아들이기에도 버리기에도 난처한 음식에는 고마움과 자존심, 미안함과 오기가 징글징글하게 뒤엉켜 있다.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더욱 현실적인 설득력과 긴 여운을 얻는다. 실컷 웃고 나면 기어이 사람이 그리워지는 우리 시대 가장 유쾌하고 뜨거운 공동체의 풍경 이렇듯 『찌니주의보』가 특별한 이유는 첨예한 갈등을 안전하고 예쁜 정답으로 마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을 반듯하게 재단하고 생각이 다르면 쉽게 잘라내는 시대, 정지아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편’을 만들어야만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흉을 보고 다투면서도 누군가 아프면 밥을 챙기고, 미운 이웃이 위험에 빠지면 먼저 손을 내미는 구체적인 시간이 거창한 관념보다 강하다고. 황석영 소설가는 이 작품을 두고 “우리가 잘 알면서도 잊고 지냈던 이 해학적 마당극 같은 소설은 고리타분하기는커녕 요즘 말로 참 ‘글로컬’하다. 당장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듯 단숨에 빨려드는 재미 또한 탁월하다”라고 찬탄했다. 여기에는 가장 지역적인 남도의 입말로 퀴어와 이주, 노년과 가족, 돌봄과 공동체라는 오늘의 문제를 생생한 이야기로 펼쳐 보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오래된 마을의 정겨움과 지금 여기의 새로운 관계를 함께 품은 까닭에, 『찌니주의보』는 특정한 세대나 취향에 갇히지 않고 폭넓은 독자를 웃기고 뭉클하게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이념 너머의 한 사람을 발견하게 했다면, 『찌니주의보』는 편견 너머의 이웃을 발견하게 한다. 첫 장부터 한바탕 웃기고 마지막 장에서는 기어이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이야기. 도무지 섞일 수 없을 것 같던 사람들이 좌충우돌 부대끼며 마침내 서로의 곁에 남는다. 정지아는 이번에도 누군가를 쉽사리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사람에게 지쳤으면서도 끝내 사람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맵고 짜고 눈물 나게 맛있는 인생 한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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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론가의 말에 의하면 정지아의 소설은 뒤늦게 물이 올랐단다. 늦봄이 지나서야 새잎이 움트는 대추나무처럼 그의 글솜씨는 실하고 단단하다.
이야기는 노인들만 남은 오지 마을에 도시에서 살던 레즈비언 여성 둘이 느닷없이 귀촌하면서 시작된다. 우리가 잘 알면서도 잊고 지냈던 이 해학적 마당극 같은 소설은 고리타분하기는커녕 요즘 말로 참 ‘글로컬’하다. 당장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듯 단숨에 빨려드는 재미 또한 탁월하다. 무너져가는 낡은 집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과거가 오래된 사기그릇의 잔금처럼 드러나며 갈등이 고조되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를 보듬으며 치유해나간다. 바깥세상은 이미 지옥일지라도, 그래도 ‘우리’가 있어 아직은 살 만하다는 온기를 전한다. - 황석영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