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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초판 완역본)

세계교양전집-1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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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84쪽 | 140*213*11mm
ISBN13 9791193130193
ISBN10 1193130190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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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10년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느긋하고 우아한 어머니셨다. 그리고 우리도 마음껏 응석을 부리며 자라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제 돈이 떨어지고 말았다. 전부 우리를 위해서, 나와 나오지를 위해서 조금도 아끼지 않고 써버리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 오랜 세월 살아온 정겨운 집에서 나가 이즈의 조그만 산장에서 나와 단둘이 적적한 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어머니가 마음이 곱지 못하고 인색해서 우리를 야단치고, 또 몰래 당신만의 돈을 불릴 궁리를 하는 분이었다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이렇게 죽고 싶을 정도의 마음이 드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하고 구제할 길 없는 지옥이란 말인가. 태어나서 처음 깨달은 기분으로 가슴이 먹먹해져 너무 괴로워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인생의 엄숙함이란 이럴 때의 느낌을 말하는 것일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기분으로 똑바로 누운 채, 나는 돌처럼 가만히 있었다.
--- p.25

좀 더 훨씬 전에 당신이 아직 혼자였을 때, 그리고 저도 아직 야마기에게 시집가기 전에 만나서 두 사람이 결혼했다면 저도 지금처럼 괴로워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미 당신과의 결혼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부인을 밀어내는 짓, 그것은 비열한 폭력 같아서 저는 싫습니다. 저는 첩(이 말은 입 밖에 내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지만 애인이라고 해봐야 속되게 말하면 첩임에 다름없으니 분명하게 말할게요)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흔히 말하는 첩의 생활도 힘든 것 같더군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첩은 보통 볼일이 끝나면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예순 가까이 되면 어떤 남자든 다들 본처에게로 돌아간다고요. 그러니 첩만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니시카타마치의 할아범과 유모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세상의 일반적인 첩의 얘기고 우리의 경우는 다른 듯한 기분이 듭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를 좋아하신다면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작업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부인도 우리의 관계를 이해해주실 것입니다. 이상하고 억지스러운 논리 같지만, 그래도 제 생각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당신의 대답뿐입니다. 저를 좋아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그도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으신 건지, 그 대답이 매우 두렵지만 그래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97

기다림. 아아, 인간 생활에는 기뻐하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건 인간 생활의 겨우 1퍼센트를 점하고 있을 뿐인 감정으로,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조이는 심정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덧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태어나기를 잘했다며 아아, 생명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이 여기고 싶습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도덕을, 밀어낼 수는 없나요?
--- p.105~106

나는 죽는 게 낫습니다. 내게는 이른바 생활능력이 없습니다. 돈 문제로 남들과 싸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남의 등을 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우에하라 씨와 놀 때도 내 몫의 계산은 언제나 내가 지불해왔습니다. 우에하라 씨는 그것을 귀족의 쩨쩨한 프라이드라며 아주 싫어했지만, 그러나 나는 프라이드 때문에 지불한 것이 아니라 우에하라 씨가 일해서 얻은 돈으로 내가 허투루 먹고 마시고 여자를 품다니, 두려워서 도저히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에하라 씨의 일을 존경하니까, 하고 딱 잘라 말하는 것도 거짓으로, 나도 사실은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단지 남에게 얻어먹는 것이 왠지 무섭습니다. 특히나 그 사람 자신의 재능 하나로 얻은 돈으로 얻어먹는다는 것은 괴롭고 마음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가난해지고 말았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들에게 베풀고 싶었지만, 이제 남들에게 얻어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나. 이렇게 되었는데, 나는 왜 살아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 이젠 틀렸습니다. 나는 죽겠습니다.
--- p.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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