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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다가, 울컥

: 기어이 차오른 오래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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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2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60쪽 | 458g | 132*203*18mm
ISBN13 9788901279374
ISBN10 890127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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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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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절박하게 학교를 다녔다. 이탈리아 학생들보다 더 악기를 잘 만들었다. 그는 쉼 없이 깎고 조이고 붙였다. 그가 학생 시절 만든 어느 악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뜨거운 물병을 내게 안겨주고 재워준 값으로, 그 막막하던 날을 견디게 해준 그에게 보탠 악기 나무 값이었다. 그런 호의를 기억하는 그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2023년 가을, 나는 10년 동안 운영하던 식당을 닫았다. 짐을 정리하는데, 그가 보내준 커다란 원목 도마가 눈에 들었다. 나를 위해 제일 좋은 나무를 다듬어 깎은 커다란 도마.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도마. 나는 가만히 그 도마를 껴안았다. 마에스트로가 된 그를 기억하며.
---「어느 악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중에서

우리들, 그러니까 오랜 친구들에게 돈 빌려달라고 전화한 것은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였다. 회사가 망하는 판에 그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거래처 빚을 갚았다. 그러고는 주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마지막으로 직원 월급을 주려고 했다. 상가는 북적였다. 마치 호상 같았다. 바보 같은 친구가 뿌린 씨앗이었다. 돌아서는데 부인이 울면서 우리에게 한 장씩 봉투를 주었다. 답례 교통비 봉투인가 했다. 삼우제에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큰돈을 친구에게 빌려준 녀석들이었다. 답례 교통비 봉투에는 친구의 사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여덟 장의 편지를 모아 삼우제를 한 사찰 마당에서 태웠다. 친구의 마지막 밤은 그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광풍 같았던 뷔페의 시대는 흘러갔고 친구도 갔다.
---「뷔페의 시대가 가고, 친구도 갔다」중에서

그렇게 지쳐가고 있을 때였는데, 가게에 웬 소포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고추장 1킬로그램과 마른 멸치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의 그 녀석이 보내준 것이었다. 운송료가 고추장과 멸치 값의 열 배는 들었을, 지구를 반 바퀴 돌다시피 해서 녀석의 마음이 왔다. 밥을 지어서 고추장 두 숟갈쯤에 멸치 몇 개를 부수어 넣고 엑스트라버진 최상급 올리브유로 비볐다. 먹는데 눈물이 났다. 정작 한국에 와서 진짜로 크게 울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녀석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영정 안에서 웃고 있는 후배를 보니 심장이 턱 막혔다. 요즘도 마트에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내게 보내준 것과 똑같은 빨간 상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나는 발바닥이 쑤욱 꺼지는 것 같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녀석의 마음이 왔다」중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털며 할매 해녀가 집에 찾아든 손님에게 밥상을 차린다. 그만두시라고 만류해도 주섬주섬, 어머니들이 그렇듯 뚝딱 밥상이 놓인다. ‘천초’라고 부르는 해조 무침이 맛있어서 기억해두었는데, 나중에 누구에게 이 말을 듣고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 천초라는 게 바다에 무성하게 자라면 작업하는 해녀 발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합니다. 저 검은 바닷속은 순간에 생사가 갈립니다. 그래서 하늘 천(天) 풀 초(草)라고 하는 이도 있어요. 하늘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라나요. 바다 밑은 용궁이고, 저 위는 하늘입니다. 어쨌든 그 위험한 천초를 싫어하는 해녀가 많습니다…….”
---「성게 함부로 못 먹겠다, 숨비 소리 들려서」중에서

“옛날엔 제일 좋은 호텔이었는데 오래됐으니까. 내가 지었으니까 마음에 짠하지. 길 가다가 높은 건물이 있으면 그냥 보이지 않아. 계단도 보이고, 비계(건물 외벽에 설치하는 임시 작업대)도 보여. 짓는 모양이 눈에 다 보이는 거지. 사람들은 몰라. 우리가 뼈 빠지게 져다 날라야 건물이 된다는 걸.”
시장통에 가게를 하나 얻었다. 만 원 주고 대폿집이라고 페인트로 써 붙이고 장사를 시작했다. 음식 솜씨가 좋아 장사가 잘됐다. 그렇게 해서 벌써 50년이다. 어디 번듯한 가게들은 노포라고 칭찬도 받는데 이 집은 찾아갈 수도 없는 시장 구석에 반쯤 없는 듯 있다. 낮술이 취한다. 걸어 나오는데 그이가 지었다는 늙은 관광호텔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서 있다. 미지근한 시간이 또 이 지방 도시를 채우고 있다.
---「소금 안주에 마시는 인생 마지막 술」중에서

페이스북이 진규의 소식을 알려왔다. 다시 중앙시장에서 만났다. 30년 만이던가. 돼지곱창 안주였다. 여전히 매웠다. 아린 속에 찬 소주를 붓는 방식으로 마셨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주 도수만 25도에서 18도로 낮아졌고 우리는 늙었다. 진규는 어쩌다가 그 골목에서 돼지곱창 노점을 인수해서 한동안 장사를 했다고 한다. 장사가 제법 되었다. 한 사람 건너 식당 차리고 카페나 술집을 하는 나라다운 일이었달까. 기술자였던 진규는 곱창을 볶고, 글 쓰던 나는 파스타를 볶는다. 다들 볶고 있으니 사 먹는 건 누구의 몫인지. 하기야 식당 주인들이 돌려막기 하듯 서로 각자의 식당 밥을 팔아주며 버티는 건 아닐까.
---「매운 돼지곱창에 찬 소주만 마셨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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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맛이 언제나 조화로울 수 없듯, 우리의 삶도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다. 이 책은 우리가 삶의 쓴맛에 울컥하게 될 때, 그 쓴맛에 여러 가지 맛이 섞여 있다고, 그럼에도 우리들의 인생이 마냥 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위로해준다.
- 강풀 (만화가)
세상 모든 ‘먹는 행위’가 트렌드가 된 지금, 박찬일은 우리에게 ‘먹는다는 것’은 시간과 경험을 나누고 삶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가 밥 먹다가 울컥한 것처럼 나도 그의 글을 읽다가 울컥했다. 고마운 작가고, 고마운 주방장이다.
- 변영주 (영화감독)
박찬일 셰프는 때로는 새벽 3시에, 때로는 새벽 5시에 원고를 보내곤 했다. 그가 밤의 서정에 까무룩 감겨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먹었던 밥을 밤새 지어 보내면, 김이 펄펄 나는 글을 읽는데도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그의 ‘밤의 노고’가 매번 독자들에게 성찬이 되어줬다. 미리 말하자면, 뜨겁고 주린 글이다. 서럽고 넉넉한 밥이다.
- 김다은 ([시사IN]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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