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역사 쓰기의 밑바탕에는 발전주의가 전제 조건처럼 깔려 있었다. 디자인사도 전통적인 역사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디자인사가 기록하는 것은 시대의 ‘새로움’과 ‘천재들’ 같은 예외적 개인이었다. 이러한 역사관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일상에서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해나가는 익명의 디자이너들이다. 산업시대 이후 디자인에는 소통과 타협이라는 녹록지 않은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럼에도 그간 많은 디자인 행위는 특출한 디자이너 한 명의 성과로 여겨지거나 과정보다는 결과가 주목받았던 것이 현실이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은 부단한 타협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태어나기 어렵다.
---「장르를 디자인하기」중에서
나에게는 본문 디자인의 원칙이 있는데, ‘수정하기 편하게’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래야 중쇄 때 추가 수정 작업이나 작업자 변경시에 작업이 쉬워진다. 이는 조판자이자 관리자로서의 입장인데, 디자이너로서의 훌륭한 레이아웃에 대한 욕심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 직원하기, 디자이너 되기」중에서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속표지처럼 요소를 덜어낸 화면을 좋아한다. 개념적이거나 미니멀한 포트폴리오라면 지금보다 좀더 ‘있어 보일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속표지처럼 정보 없이 심플하게 디자인하면 시리즈 전권을 모아 볼 때는 조화롭더라도 낱권으로는 힘이 약하다. 팔리는 상품으로서 책 한 권 한 권을 생각해야 한다. 출판사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멋진 디자인도 좋지만 디자이너로서 주어진 조건과 환경 안에서 성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한다.
---「놀라지 않을 정도의 새로움」중에서
‘100가지 담배 종이 샘플을 하나씩 포개서 제본하면 그것을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책’이라고 불리기 위한 최소 요건 말이다. 샘플 종이의 두께와 패턴이 모두 다르다. 고무가 들어간 종이는 부드러운 패턴을 띠고, 엠보싱 같은 질감이 있다. 이 종이 묶음에 텍스트 기반 정보는 없다. 하지만 개인의 기호에 맞춰 선택할 수 있도록 종류, 두께 등에 차이를 주어 생산한 종이들이기 때문에 종이 자체가 정보를 가진다. 이 담배 종이로 책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책의 최소 요건을 고민한다」중에서
누구나 ‘읽기’ 위해 펼쳐드는 본문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책의 영토다. 그러나 그렇기에 가장 급진적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변화에 느리고 둔감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변화의 파장이 가장 클 수 있음을 함의한다. 상업 출판 디자인에서 책의 존재감은 여전히 표지로 판가름나고, 본문은 책의 판매와 인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책의 역사를 좀더 거슬러올라가보면 책의 몸체는 본문에 있었다.
---「어떤 최선의 세계」중에서
책에는 6699프레스와 함께한 여러 목소리들이 정갈하면서도 우아하게 정렬되어 있다. 대화와 발화가 많은 6699프레스의 책 특성 때문인지 다양한 처지, 배경, 직업, 국적의 사람들이 띄엄띄엄 등장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툭툭 던진다. 거기에는 그리움, 위로, 슬픔, 외로움, 회환, 안타까움, 분노, 다짐, 회의 등 감정의 파고가 선율처럼 이어진다. 하나의 단상집이자 현대를 사는 외로운 다수에게 따스한 말을 건네는 책. 그만큼 이재영이 기획한 책에는 경청할 줄 아는 한 디자이너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서사를 구축해주는 가장 적합한 도구」중에서
작업 과정에서 생각보다 나에게 규범들이 강하게 내재해 있음을 느꼈다. 좋은 것이라고 교육받았던, 혹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조형적 재료들이었기 때문이다. 작업하는 동안 아름다움이라는 잣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 나 자신을 상대로 계속 조율해나갔다. 디자인에서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일까, 꼭 아름다워야만 하는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한번쯤 해보고 싶은 것」중에서
기발하거나 큰소리로 주위를 집중시키는 디자인보다는 작업자의 노동이 여실히 보일 만큼 낱자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짜놓은 본문이나 옛 책의 고전적인 타이포그래피의 여운이 훨씬 깊다. 균형이 잘 잡힌 그런 디자인 말이다. 얀 치홀트를 모를 때부터 펭귄북스를 좋아했는데, 무엇 하나 건드릴 게 없을 만큼 단단한 짜임새였다. 표현의 화려함보다는 완연한 어울림을 추구하다보니 열화당의 방향과 잘 맞아 오래 일할 수 있었다. 오래전에 출간한 책이더라도 여전히 짜임새가 좋고, 계속 봐도 질리지 않는, 비례와 균형이 좋은 책들……. 그런 책을 좋아한다.
---「세상에 해가 되지 않고 오래 남는 책」중에서
논문 마지막에 개념미술가 솔 르윗의 말을 인용하며 “지시문에 따라 누구나 드로잉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조형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기에 이 말에 완벽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솔 르윗은 결과물의 아름다움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설정된 제약은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이다.
---「한계에서 시작하는 아름다움」중에서
그래픽디자이너이자 운동가이기도 한 이들에게 출판이 자연스러운 도구인 이유는 이렇듯 책이라는 매체의 보수성과 급진성이라는 이중적 속성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사례는 책 만드는 여성의 서사를 구축시켜나간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역사에서 문자로 대변되는 책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그 견고한 제도 속에서도 여성들은 기명과 익명의 책 쓰기와 공동 출판으로 제도권의 틈새를 벌리려 노력해왔다. 그러니 이들이 앞으로도 만들어나갈 책을 주목해보자. 그곳에는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내일의 언어가 구축될 테니까. 여전히 우리 주변에 변화할 것이 남아 있는 만큼, 우리에게는 언어가, 보다 평등한 내일을 위한 책의 언어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실천으로서의 북디자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