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4년 12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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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55쪽 | 673g | 153*224*30mm |
ISBN13 | 9788982819278 |
ISBN10 | 8982819274 |
발행일 | 2004년 12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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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55쪽 | 673g | 153*224*30mm |
ISBN13 | 9788982819278 |
ISBN10 | 8982819274 |
고래 1부 부두 |
천명관 작가의 2004년 작품 '고래'가 영국 최고 권위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The International Booker Prize)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합니다.
아주 예전에 다른 곳에 올려뒀던 리뷰인데, 예스24로 가져와 봅니다.(손 좀 볼까하다가 그냥 올립니다)
천명관의 <고래>를 읽었다.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소설보다는 경제나 과학 서적에 더 끌리다보니 제 때 챙겨 읽질 못했다(?).... 책을 읽고 난 후 이 소설이 왜 큰 상을 수상했는지 생각해 본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듯하면서도 굉장히 낯선 스토리를 가지고 독자의 마음을 끝까지 끌어당긴 글빨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현란한 미문도 없었고 그 줄거리 또한 뻔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구닥다리 신파 또는 말도 안 되는 전설 같은 구라를 풀어놓는다. '이게 뭐냐~'는 의혹이 일어날 때 작가는 '그것은 ~의 법칙이었다.'는 이화접목의 공능을 툭! 던지면서 질타를 간단히 비껴나가네. 대단한 반탄지기... 그러면서 그 다음 스토리를 궁금케 하는 변주곡이 난무하니 그것은 진정한 글쟁이의 법칙 아니겠는가.^^
금복! 소설 전체의 아우라를 유지하게 하는 핵심 캐릭터인 이 여인은 제법 반반하면서도 뭇 사내를 끌어당기는 육체적 매력(페르몬?)과 경제 수완을 타고났네. 가난한 산골의 삶이 싫어 열네 살 때 생선장수를 따라 남쪽 바닷가(고래가 등장하니 포항이나 울산 정도로 보면 될 듯)로 탈출한 여인이다. 생선 장수와 같이 살면서 타고난 사업 수완과 함께 관능과 열정이 서서히 깨어나는데... 봉변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 준 장골의 사내 걱정, 영화쟁이 깡패 칼자국, 벽돌쟁이 문(文) 등 수없는 남정네를 거쳐 가면서 굴곡 많은 삶을 살아가는 이 여인의 로망은 다름 아닌 고래... 그녀는 평대에 '마치 커다란 고래가 깊은 바다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막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극장을 직접 설계하기도 한다. 물론 허망한 결론으로 이어지지만...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해안엔 희미한 달빛 아래가 파도에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는 모래밭에 쭈그리고 앉아 해수면 위에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하얗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집채만한 물고기가 솟아오른 것이었다. 부두에 처음 도착한 날 목격했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丈)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거대한 감동이었다.
금복은 저고리와 치마를 벗어 빈 덕에 걸어놓고 알몸으로 물 속을 향해 걸어갔다. 밤새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차가운 파도가 휘감았다. 그녀는 파랗게 빛나는 고래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고래는 거대한 유선형의 몸체를 우아하게 움직이며 그녀를 향해 꼬리를 철썩거리다 이따금씩 힘찬 분기(噴氣)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헤엄을 쳐도 고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바로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매끄러운 거죽이 손에 잡힐 듯 코앞에서 번들거렸지만 고래는 늘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래는 다시 한번 크게 물을 뿜어낸 후 유유히 꼬리를 흔들며 깊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 허탈해진 그녀는 지칠 때까지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다시 고래가 솟아오르길 기다렸지만 끝내 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완전히 기진해서 그녀가 다시 물 밖으로 나왔을 땐 바다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의 등을 떠밀어 고향을 떠나게 했던 바로 그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제 그녀를 다시 어디론가 데려갈 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바람을 불렀을지도...(65쪽)
금복에게 고래는? 그건 순수에의 갈망 즉, 자신의 고된 역정에 대한 순수에의 동경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금복의 엄마는 동생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고만다. "그날 이후 금복을 지배한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목표는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그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271쪽)"
춘희! 금복의 딸인데, 심상치 않은 탄생의 설화 속에서 전반부와 후반부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생선장수, 걱정, 칼자국을 모두 거치면서도 한 번도 애가 서지 않았던 금복이 전쟁의 와중에서 애를 낳았는데... 이 애가 걱정을 완전히 빼어닮았다나뭐나... 걱정이 죽은 지 이미 4년이나 흘렀는데 말이다. 임신기간이 4년? 고래로 변해 바다로 간 걱정의 이야기 속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참 어렵다. 이럴 땐 "그것은 구라의 법칙이었다."라고 그냥 넘겨야 하겠지... 어쨌거나 금복이 거대한 고래에 매료된 것처럼 남성성을 우러러 보다가 허망하게 화재로 자멸하는 모습이라면 춘희는 말을 하지 못하는 대신 코끼리와 대화를 나누는 등 내면의 순수성으로 붉은 벽돌을 만들어 내고, 이 벽돌은 남산 중앙국립극장이라 여겨지는 대극장의 자재로 사용됨으로써 금복의 고래극장과 대비되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그렇게 이 소설은 망아의 상태에서 허랑한 시간들을 흘러 보낸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소설이란 느낌 속에서 틀에 박힌, 흔히 보는 정형화(?)된 소설이 아니라는 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게 바로 이 소설의 가치이다. 바둑계를 뒤흔든 ‘알파고’처럼 말도 되지 않는 착점이라 생각했더니 그걸로 전체를 엮어가서 속절없이 항복하게 만드는 그런 능력을 보여주는 소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멋진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는듯한 저자의 마무리가 소설의 전체를 아우르는 백미이다.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멋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