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89 ‘상갓집 개라!’ 이 상갓집 개는 내일도 또한 병기의 집을 찾아보자. 수모를 하면 수모를 하느니만큼 더욱 자주 찾아보자. 샅 틈으로 기어 나간 한신이 있지 않으냐? 그만 수모를 무엇을 탓할 것인가? 임시, 한때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다. 먼 장래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참고 온갖 고난을 참자. 한때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제로라고 우쭐거리다가 큰일을 저지르면 어리석은 노릇이다. 그들이 자기를 바보로 여기고 속없는 놈으로 여기면, 자기는 더욱더 그들에게 그런 눈치를 보여서 당분간의 안전은 도모하여야겠다.
p. 161 흥선의 몸이 비로소 움직였다. 천천히 하인의 편으로 돌아섰다. “요놈!” 놀라운 음성이었다. 산천이 드르렁 울리었다. 작다란 몸집의 어디서 그런 우렁찬 소리가 나왔나? 이 너무도 우렁찬 소리에 영어는 눈을 흥선에게 던졌다. 그때 흥선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 그것은 왕자王者나 고승高僧의 얼굴이고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온화하고도 엄격하고 위엄성 있는 얼굴이었다. 영어가 흥선을 안 이래 삼십 년?아니 영어가 세상에 난 이래 처음 보는 위엄 있는 얼굴이었다. 영어는 그 얼굴에 위압되어 머리를 딴 데 돌리고 말았다. 갑 판서는 흥선의 호령에 얼굴을 흥선에게로 돌렸다. 돌렸던 얼굴을 황급히 다른 데로 돌리며 남여로 향하여 발을 뗀 것은, 그도 이 위엄에 압도된 때문인 모양이었다.
p. 453 화살은 이미 메어졌다. 줄도 당겼다. 이제는 손을 놓아준다는 과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하, 어떤가? 옷이란 무서운 것…… 폐의파립 때의 흥선과 금옥탕창의 흥선과 보기에도 좀 다르지?” 하하하하 웃으면서 이런 농담을 던지는 흥선의 양 눈썹 사이에는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서 앞에 있는 자로 하여금 저절로 위압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운현궁’이란 다름 아닌 대원군이 거처했던 집의 가호를, ‘봄’은 득세를 의미한다. 《운현궁의 봄》은 모멸과 천대를 받아야 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마침내 권력을 거머쥐기까지에 이르는 이야기다. 흥선대원군이 음산한 겨울에 죽은 것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곧이어 흥선군의 낙척시대로 돌아가 그가 겪은 수모와 시련을 줄거리로 하여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섭정의 자리에 올랐는지 보여준다. 그는 김좌근 일파의 세도 아래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조 대비와 은밀하게 접촉을 계속하고, 철종이 승하한 후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등극시키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권좌에 오른 뒤에 그는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과단성 있게 비리를 척결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