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그에 대해 무어라 규정을 내리는 일은 참으로 난감하다. 그는 경전의 미묘한 뜻을 낱낱이 파헤친 걸출한 경학자였다. 그 복잡한 예론(禮論)을 촌촌이 분석해낸 꼼꼼한 예학자였다. 목민관의 행동지침을 정리해낸 탁월한 행정가요, 아동교육에 큰 관심을 가져 실천적 대안을 제시한 교육학자며, 지나간 역사를 손금 보듯 꿰고 있었던 해박한 사학자였다. 그는 또한 화성 축성을 설계하고 거중기와 배다리와 유형거(游衡車)를 제작해낸 토목공학자요 기계공학자였고, 다시 보면 《마과회통》과 《촌병혹치》 등의 의서를 펴낸 의학자였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그것도 아주 탁월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그는 내게 하나의 경이(驚異)요, 우리 학술사의 불가사의다. 나는 그를 세계의 정보를 필요에 따라 요구에 맞게 정리해 낼 줄 알았던 전방위적인 지식경영가라고 부르겠다. 현대가 필요로 하는 통합적 인문학자, 다산의 쾌도난마와 같은 명쾌한 작업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해 준다.
--저자의 말 중에서
그는 독서에서 푹 젖어듦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나기가 휘몰아쳐 땅 위에 갑자기 도랑이 생길 지경이 되어도, 날이 갠 뒤 흙을 파보면 금세 마른 땅이 나온다. 빨리 많이 읽기만 힘쓰고 의미를 살펴보고 따져보아 깊이 젖어들지 않는다면 소나기가 잠깐 땅 위를 휩쓸고 지나간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파의 껍질과 속살을 구분해 내려면 아홉 자 우물을 파야한다. 석자 파다 그만 두고 다른 데서 또 파려들면 부뚜막 바를 젖은 흙밖에 얻을 게 없다. 쓸데없는 파 껍질만 수북이 쌓아놓게 된다. 부단한 노력만으로도 안 되고, 꼼꼼한 정리나 관련 자료의 섭렵만으로도 안 된다. 물론 그것 없이는 더더욱 안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부하는 사람은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는 단서를 잡아야 한다. 여기에는 거듭되는 훈련과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된다. 다산은 말한다. 문제를 회피하지 마라. 정면으로 돌파하라. 끊임없는 의문을 가지고 탐구해 들어가라. 처음에 우열을 분간할 수 없던 정보들은 이 과정에서 점차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서 실마리를 잡아라. 얽힌 실타래도 실마리를 잘 잡으면 술술 풀리게 마련이다. 더 이상 파 껍질을 붙들고 씨름하지 않게 된다. 실마리를 못 잡은 채 자꾸 들쑤석거리기만 하면 나중엔 아예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손 쓸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