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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작가 김호연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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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10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380g | 145*210*20mm
ISBN13 9791186748138
ISBN10 118674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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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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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녀석이 급히 차에 타다가 유골함을 땅에 떨군 것이다.
망연자실. 놈과 나는 차 문 아래로 세 동강이 나 있는, 아이 살점같이 뽀얀 유골함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로 낮게 쌓여 있는 봄눈 같은 재연의 분골을 목격했다.
내가 놈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놈은 나와 발밑의 뼈를 번갈아 보며 말을 흐렸다.
“형씨, 난 말야……. 그게 있지…….”
“닥쳐 이 개새끼야!!”
놈을 향해 돌진하는데 바람이 일고 뼈의 일부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놈이 진지에 떨어진 수류탄을 감당하고 죽으려는 소대장처럼 뼈 위로 몸을 날렸다.
거북이처럼 웅크린 채 뼈를 지키고 있는 놈을 보자 울분이 일었다. 한마디로 빡이 돈 나는 있는 힘껏 놈의 등판에 대고 주먹을 날렸다.
“야 이 새끼야. 혼자 재연일 들고 튀어! 이 양아치 새끼……. 뭐? 민주시민?”
넓디넓은 놈의 등판을 북 두드리듯 때려댔다. 꼼짝 못 하고 처맞던 놈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진정하셔! 뼈 날리잖아.” --- p.59~60

자책감이 최고조에 올랐다. 무엇이든 떨쳐내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후끈한 열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한순간 발이 꼬여 슬라이딩하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깨졌는지 다리 쪽에서 얼얼한 고통이 올라왔다. 콘크리트 길바닥을 짚은 손바닥에선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괴로워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확 바다에 빠져 죽어버렸으면 싶기도 했으나 그녀를 보내주지 못하고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같이 빠져 죽어도 이 바다는 아닌 거다. 진짜. 으아아아. --- p.78

앤디는 전형적인 일 벌이기 형이다. 그리고 무식하리만치 과감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이고 살았을 거다. 반면 나는 서울에서 평범하게 자랐고, 지나치리만치 신중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출판사에서 가늘고 길게 버티며 살아가는 중이다. 나이만 같지 고향과 성격, 생활환경까지 완전히 다른 녀석과 나의 동행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분명한 점은 녀석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거다. 녀석을 포함해 이 세계는 내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여정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든 바뀌어 있을 것이다. --- p.109

열불이 나는 데다 뙤약볕까지 내리쬐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위를 피할 방법은 녀석의 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앤디는 오픈카의 뚜껑을 닫고 에어컨을 켠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몸을 감쌌다. 처음 국도변에서 놈의 차를 얻어 탔을 때가 생각났다. 시간을 그때로 돌리고만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탈진해 길바닥에 졸도하는 한이 있어도 놈의 차를 얻어 타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자고? 미친놈들이다. 우리는 다시 그녀를 가지고 싶었을 따름이다. --- p.140

순간 백미러로 하얗게 소용돌이치며 무언가가 상승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놀라 돌아보니 그녀의 뼛가루가 바람에 실려 오픈카 위로 솟구쳐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날아가는 그녀의 하얀 조각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리 지어 이동하는 하얀 새 떼처럼 제주의 하늘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날아가고 있었다. 어리석은 두 명의 남자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p.183

역시 재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나는 범죄 현장을 조사하는 형사의 심정이 되어 시나리오를 읽어나갔다. 70페이지의 시나리오가 단숨에 읽혔다. 시나리오의 내용은 소설과 일치했다. 캐릭터도, 플롯도, 주요 배경과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거의 같았다. 다만 결말이 달랐는데, 그 부분은 재연이 책을 준비하며 수정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문 감독의 시나리오는 재연의 소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니다. 문 감독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중략…) 정말로 이렇게 파렴치하게 해먹을 수가 있다니……. 재연이 죽은 걸 알고 기다렸다는 듯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도저히 이 자식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 p.213

“인터넷? 올려. 올리라고. 그 사람 전 남친이라고 하고 마음껏 뭐라도 올려봐.”
느긋하게 비아냥대는 문 감독의 모습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올리라니까. 인터넷에, 페이스북에, 갑질의 횡포라고 올려봐. 근데 당사자도 아닌 당신 말을 누가 믿어주기나 할까? 그리고 당신 출판사에서도 사람 때려 잘렸다며? 인터넷에나 찌질하게 올리는 당신이 보증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
“어디 병신 같은 게 와서 깝치고 있어. 어차피 죽은 년만 불쌍한 거야. 너 재연이 그년이 나한테 뭐라 그랬는지 알아? 자기 작품이니까 자기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함부로 못 쓸 거라고 했어. 그런데 이제 죽었어. 눈에 흙 들어갔으니까 함부로 쓴다는데, 뭐? 됐냐?”
“…….”
“아, 놀아주느라 힘들었네. 가봐.” --- p.262~263

나는 생각했다. 문 감독의 말처럼 재연은 정말 나를 이용했을까? 문 감독과의 밀당을 위해 책을 내야 했고, 그러기 위해 나와 사귄 것일까? 정말 나를 고지식하고 소심하고 옹졸해 받아주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과연 그렇게만 생각했을까?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곁에 있다고 해서 물어볼 질문도 아닐 것이다. 그걸 묻는 것 자체가 그녀를 의심하는 것이고 그랬다면 나는 결코 애틋한 심정으로 그녀를 떠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서툴고 부족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안간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 p.26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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