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6년 04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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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안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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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10.87MB ? |
ISBN13 | 9788936433598 |
KC인증 |
발행일 | 2016년 04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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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10.87MB ? |
ISBN13 | 9788936433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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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해설 허윤진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 지면 |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다. 맨부커상을 탔다고 하니, 워낙 신뢰하는 상이기도 해서 읽어본 것이다. 그래서 더욱 놀라고 말았다. 설마 이런 이야기일 줄이야. 3편의 소설로 묶여 있다. '채식주의자','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 이야기는 모두 '채식주의자' 영혜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하지만 영혜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보여지는 대상, 즉 객체에 불과하다. 3편의 소설은 관찰자를 달리하며 그에 눈에 비친 영혜를 담는다. 처음은 남편이며, 두번째는 형부고, 마지막은 언니다.(형부는 언니의 남편이다.)
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모두 다르다. 영혜의 남편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고 점차 나무로 되어가는 그녀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낸다. 영혜의 형부는 그녀처럼 되고 싶다는 동경의 시선을 보낸다(내가 보기에 그가 영혜에게 보이는 이상 성욕은 분명 존재론적 합일을 향한 것이다. 그는 새를 즐겨 찍는데, 그것엔 자유에 대한 그의 간절한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그는 영혜가 바로 그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원한다. 그녀를 취함으로써, 그녀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같이 구가하고 싶은 것이다.) 영혜의 언니는 동생의 모습에 자신의 과거 모습을 투영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타자에 대한 책임을 느껴간다. 이렇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모두 똑같은 영혜를 바라보지만, 얻게 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다. 남편, 형부 그리고 언니 모두 이름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영혜만큼 지속적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보다 '나'로 더 많이 읽게 된다. 고유명사로 존재하는 것은 영혜 뿐이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보통 명사로 존재한다. 작가는 왜 이렇게 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보통 명사의 존재는 독자가 감정 이입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혹시 작가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투영하도록 만드는 장치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이란 우리 역시 타인의 변화를 보면서 얼마든지 보일 수 있는 모습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며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소설의 이야기 속으로 깊이 뛰어든 나를 깨닫게 되었다. 영혜를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감정 이입되어 현실 속에서 정말 영혜와 같은 존재를 만난다면 나는 어떡할 것인가를 자문하고 있었다.
그런 영혜는 결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건 영혜의 남편이 그랬듯이, 일상이 견고한 자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식과 인습으로 무장한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그 눈은 현상만 볼 뿐, 근저에 놓인 '왜'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가지는 생활의 불편과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시선만 중요했다. 그러니 영혜의 채식이, 나무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결코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일상인의 눈으로 봐서 그럴 지도 모른다. 영혜는 현재 일상의 궤도를 이탈한 존재. 이탈이 각도마저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지고 있다. 일상인의 눈에 비일상이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춰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일상이 그리 견고하지 않은 자들의 눈에는 어떨까? 영혜와 똑같이 일상의 경계 바깥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자들의 눈이라면, 영혜가 공감과 대화가 가능한 존재로 보일까?
그 대답의 역할을 맡는 것이 바로 '몽고반점'의 형부다. 여기서 우리는 보통명사로 등장하는 세 사람이 모두 어떤 한 측면을 대변하는 존재란 걸 알 수 있다. 남편과 형부가 일상과 비일상의 시선을 대변한다면, 형부와 언니는 한 존재에 대한 착취와 공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남편과 형부의 관계는 형부가 남편과 정반대의 존재라는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세속에 찌든 직장인이고, 형부는 현존재의 초월을 포착하고 싶어하는 예술가다. 남편은 일상에 굳게 머무르려 하기에 자신의 일상을 위협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배척하지만, 형부는 일상을 뛰어넘길 원하기에 자신에게 일상을 강요하는 것은 무엇이든 혐오한다.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제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영혜)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이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 둔감한 그는 그녀의 몽고반점을 알기나 했을까. 알몸의 두 사람을 상상한 순간, 그것은 모욕이라고, 더럽힘이라고, 폭력이라고 그는 느꼈다.(p. 93)
그런 존재이기에, 형부의 일상은 불안하다. 현재의 일상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위에서 그는 늘 위태롭게 서 있다. 그런 면에서 형부는 영혜와 동류(同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가 영혜를 대하는 태도는, 그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남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영혜의 폐부 깊숙이 존재하는 아픔은 보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영혜의 외부만 취한다. 그녀를 카메라로 찍는 그의 작업은 이 사실을 드러낸다. 그의 일방적인 요구와 그가 원하는 부분의 촬영만 있을 뿐, 그녀의 내면을 헤아리는 대화는 없는 것이다. 형부에게 영혜는 자신이 작업하는 사진과 똑같다. 2차원 평면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영혜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혜가 누리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것 뿐이었다. 영혜는 그에게 평면 거울이었다. 그것도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거짓을 들려주는 거울.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진실처럼 나타났다. 그가 영혜의 육체 위에 꽃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상이 영혜에겐 실체가 되었다. 그의 거짓이 영혜에겐 진실이 되었다. 영혜에겐 경계 자체가 없었다. 가상과 실체도, 거짓과 진실도 하나였다. 당연했다. 외부가 나누는 어떤 경계도 영혜에겐 통용되지 않았으니까.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경계는 가볍게 무시되고 그녀에겐 오로지 자신의 질서만 있었다.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무한의 신뢰만 있었다. 현실 세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주체. 형부가 영혜에게 본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름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육식에서 채식으로, 사람에서 식물로 거침없이 변화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조금의 두려움 없이 훌쩍 넘나들었다. 영혜는 그런 주체만 누릴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 자유가 한없는 안정 또한 보장하고 있었다.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무임승차만 하려 한다. 영혜가 어떻게 해서 거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보려 하지 않는다. 지금 현존한 결과만 취하고 싶을 뿐이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원하는만큼만.
그래서 그가 영혜에게 하는 모든 일은 착취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영혜의 남편과 똑같다. 남편은 영혜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는 영혜의 존재 자체를 착취한다. 둘 다 영혜의 외양만 취한 결과다. 형부는 한계를 느낀다. 별 짓을 다하지만 영혜에게 조금도 다가갈 수 없다. 마지막까지 그는 결국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베란다는 일상의 경계를 상징한다. 형부는 일상을 초월하기 위해 영혜를 욕망했으나, 결국 일상에 고착되고 만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자기가 영혜에게서 본 모습을 영혜의 실체로 규정하려 했을 뿐, 영혜라는 존재 자체를 헤아리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좌절은 우리에게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바로 영혜라는 존재 자체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3부인 '나무 불꽃'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우리가 형부처럼 영혜의 존재를 선망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영혜의 남편도, 형부도 결코 묻지 않았던 질문. 영혜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녀가 도달한 경지에 대해선 이미 앞에서 말했다. 모든 경계와 욕망을 초월한, 오로지 자신이 만든 경계와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면에서 자생된 욕망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절대적 주체라는 사실을. 그래서 온전히 자유롭고,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무한정 안정하다는 것을. 맞다. 그녀는 이미 나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그녀 존재의 정체가 아니다. 실은 과정이다. 과연 그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나?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다.
여기서 채식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중요해진다. 그것이 오늘의 영혜를 만든 원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왜 채식을 하게 되었나? 대답은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벗어난다. 왜냐하면 그녀의 채식은 정말 오랜 세월 해묵은 죄책감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아버지에게 일러바쳐 아주 고통스럽게 죽인 적이 있다. 개가 죽은 뒤엔 어른들과 함께 그것을 먹었다. 자신이 원인이 된 죽음. 그것도 자신보다 약자인 개를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이고도 그녀는 연민이나 애도의 시간도 없이 먹어버렸다. 아마도 그녀의 양심은 그것을 아주 무자비하다고 여긴 것 같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이기적이라 어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채색하지만 무의식은 그것의 진실을 제대로 따진다고 한다. 옳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 우리의 마음이 상처 받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이다. 영혜도 그랬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무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꿈이 그 기억을 환기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조용하고 느리지만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던 그녀.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어릴 때의 일을 꿈을 통해 기억하고는 더는 육식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녀는 말한다. 고기의 냄새를 맡을 때조차 자신의 뱃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온다고. 그건 과거에 자신이 먹었던 개의 육신이며, 거기 깃들어 있는 것은 분명 죄책감이다. 그랬기에 그 기억을 환기시킨 꿈은, 그대로 영혜에 대한 고발과 같았다. 네가 그런 짓을 벌이고도 잘도 편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비난이라고 해도 좋다. 남편에게 오래도록 보여준 침묵은 그 앞에서 그녀가 아무런 변호를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상을 포기한다.
채식은 그런 의미다. 더이상 예전 그대로 살 수 없다는 고백. 나아가 그녀는 나무가 되고자 한다. 소설에서 나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절대적 주체의 상징,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후자는 물론 인간 측에서, 일상의 눈으로 바라본 의미다. 그런 시선에게 나무는 움직일 수 없고, 현실 삶을 굴러가게 만드는 욕망도 없으므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비난 앞에서 나무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죽음을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초래한 개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우리는 영혜가 과거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이 책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3부, '나무 불꽃'이다. 여기서 영혜를 바라보는 자는 그녀의 친언니다.
언니는 영혜를 보면서 자신의 일상과 과거를 복기한다. 1편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언니는 3편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 역시 그저 고통을 참고 견디고 있을 뿐으로, 그녀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끝도 없는 삶의 무의미를 체감 중인 것으로 말이다. 그녀는 자살마저 하려고 했다.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그녀는 소설에서 유일하게 영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녀는 남편과 똑같이 허무의 절벽까지 걸어 갔으나, 남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마지막이 그렇다. '몽고반점'의 마지막에서 형부는 영혜를 내버려두고 달아나려 한다. 그러나 '나무 불꽃'의 마지막에서 언니는 끝까지 영혜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영혜를 마지막까지 책임지려는 듯이.
3부에서 우리는 언니 역시 영혜처럼 책임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그 전의, 남편과 형부가 보여준 모습과 정반대다. 사실 이러한 차이는 이미 '몽고반점'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는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언니 사이에 '지우'라는 아들이 있다는 것을 본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친자식을 가지고 있는 부부다. 하지만 형부는 자기 아들을 돌봐야할 때, 제대로 맡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반면, 형부가 방치한 아들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늘 언니다. 형부는 늘 작업 핑계를 대며 아들을 방치하지만, 언니는 아무리 바빠도 기꺼이 아들을 돌본다.
바로 이 '책임을 지느냐, 안지느냐'의 차이가 영혜의 존재가 표상하고 있는 '주체가 되느냐, 안되느냐'를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나무 불꽃'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소설이 세 등장 인물들 중 책임을 떠 맡는 언니만이 유일하게 영혜와 같은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을 입증하듯, '나무 불꽃'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눈부신 빛을 본다. 빛은 구원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어떻게 언니는 그럴 수 있었을까? 여기서 아들이 그녀에게 말한, 그녀의 사진이 새처럼 날아갔다는 꿈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사실 그 꿈은 남편의 소망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구원 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아들이 그 꿈을 꿨던 순간, 그녀는 자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죽으려는 순간, 그녀는 아들의 웃음을 떠올렸고, 그 때문에 자살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기적인 죽음보다, 이타적인 책임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 뒤, 돌아온 집에서 그녀는 아들에게서 꿈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을 끝까지 책임질 것을 결심한다. 바로 이 책임이 그녀를 구원으로 이끈 것이었다.
'한 가지 결정적인 장면이 더 있다. 바로 언니가 보는 가운데 간호사들이 절식하는 영혜에게 튜브를 통해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장면이다. 그것은 길고도 처절하게 묘사된다. 또한 이 행위는 영혜에게 오직 고통만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면은, 영혜에게 트라우마가 된, 아버지가 개에게 가했던 고통을 환기시킨다. 과거의 영혜처럼, 언니도 오래도록 무자비하게 가해지는 고통의 현장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과거가 반복되었다. 분명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치뤄야 할 시험이 있고,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수난이 있다. 이를 흔히 통과의례라고 부른다. 작가는 언니에게 바로 그것을 주려 한다. 영혜처럼 책임을 기꺼이 떠맡는 존재이긴 하지만, 과연 진정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마지막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과거의 영혜는 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한 것은 가해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눈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그러지 않는다. 그녀는 동생에게 손을 내밀고, 끝까지 잡는다. 마지막에 본 빛은 바로 이렇게 해서 찾아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된다. 영혜와 같은 절대적 주체는 오로지 책임을 떠 맡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절대적 주체가 무한의 자유와 안정을 구가한다면, 그것 역시 오로지 타인에 대한 무한 책임을 떠 맡을 때 도래 하리란 것을.
이렇게 소설은 세 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궁극엔 타인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책임을 흔히 구속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부담을 느끼지만,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자유와 안정을 가져온다는 것을, 소설은 놀랍도록 설득력있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소설을 읽기 전엔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충격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소설 속 인물에게 날 깊이 투영하고 읽고 있던 나는 한동안 깊은 여운에 젖어 '나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꾸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시대는 아픔이 보편적인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강남역 묻지마 살인이 있었으며, 구의역 스크린 도어 기사 사망 사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산도 여교사 특수 강간 사건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충격적인 사건사고 소식을 들으면,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만 더욱 배가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영혜의 남편이나 형부의 모습을 흔히 취한다.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으며, 고치려 움직이지도 않는다. 마치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인 것처럼 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영혜의 형부와 똑같이 막연히 누군가 나보다 먼저 나서서 이런 상황을 고쳐주기만 기다린다. 하지만 한강은 '채식주의자'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통해 분명히 말한다. 그런 식의 태도로는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출구는 오직 하나. 타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기꺼이 맡는 것밖에는 없다고.
소설을 통해 마음 깊이 설득 되었지만, 그래도 막상 실천하기 저어되는 것은 거기서 하게 되는 일도, 거기에 이르는 길도 내겐 너무 어렵고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어쩐지 한강 작가에게 '너무 지나친 낙관 아닌가요?' 반발하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대놓고 무시해선 안된다는 속삭임이 자꾸 들려온다. 아마도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작가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래,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보자면 솔직히 난 아직도 뿌리가 여리고 어린 나무에 불과하다. 한강의 조언에 깊이 통감했다면, 일단 뿌리부터 튼튼히 만들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도 자극과 성찰을 위해 이 소설을 반복적으로 읽어야 할 듯하다.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자. 솔직하게. 이것이 지금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는 태도이기도 할 테니까.
나는 이 책을 예전에 한번 읽었다.
엄연하게 이야기하자면 읽긴 읽었는데,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두번 읽고나니 조금은 알 것 같다.
조금은.
음, 나는 이 책을
있을수도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처들,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인간이라면 탐낼지도 모를 치유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먼저 이 책의 제목은 채식주의자인데,
채식주의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음이 아니라
왜 영혜가 채식주의자로 변해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영혜가 고기를 먹지않는 것은, 어떤 꿈을 꾸고 난 다음인데
남편은 그런 영혜를 이해하지 못해 가족들을 동원하여 말린다.
심지어는 강제로 입에 탕수육을 처넣기까지 한다.
영혜는 그자리에서 과도로 손목을 긋기까지.
나는 이 부분부터 마음이 답답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틀린 것도 아닌데
여러명의 논리로 한사람을 매도하는 현실.
이것은 사실 우리 사회의 여러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뒷부분에 영혜가 그 꿈에 큰 영향을 받은 게 아님도 나온다.
(이 부분에서 나는 왜 제목이 채식주의자인지 고민했다.)
형부와 영혜가 성관계를 하는 장면도 그렇다.
형부는 하지않아도 좋을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말을 한다.
나는 그 자체부터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형부는 영혜와의 교감을 원한 것이 아니다.
그저 급하게 꽃을 그리고 덤벼들뿐.
그런데 한강은 그것마저도 이상하리만큼 덤덤하게 포장한다.
이 책에는 몇가지 이해할 수 없는 상처들이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이해할 수 있는 치유로 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평화주의자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꿈 내용이나 자해 등을 보면 전혀 그렇지않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두번 읽었는데,
두번 다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
특히 몽고반점 부분에서는 더더욱.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한 내용인데
왜 굳이 그런 내용을 넣었을까?
넣지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문학적인 부분만 읽으려 노력했다.
영혜가 더이상 꿈을 꾸지 않고,
스스로 꽃이 되어가는 과정.
이제 꿈을 꾸지 않게되어가는 과정.
그 부분에 주력하고, 그 부분을 읽어려고 노력했다.
그저 자유나 치유의 부분으로 본다면
영혜는 괜찮은 사람이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브레지어를 하지않고,
윤리적이지 못한 형부의 요구도 응하고,
본인이 하고싶은대로 한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의 치유나 자유는 얻는다.
그러나 사회의 테두리에서는
그녀는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닐테다.
사랑하는 딸이, 와이프가, 동생이, 기타 등등이
나무가 되든, 식물이 되든
그냥 둘 수 있는 가족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나는 그냥 마음이 답답해졌다.
살짝 섬뜩한 책이에요 작년에 10년대여인가 할때 샀던가 한강이 맨부커상 탔을때 샀나 잘 기억은 안나는데 최근에 도서관에서 종이책으로 채식주의자만 읽었습니다. 나머지 뒷 단편은 연작이라 이어진다고는 하는데 일단 채식주의자만 본 느낌으로는 굉장히 섬뜩하고...무서운 책이라고 생각해요 화를 내고 있다고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분노를 터뜨리는 인물은 없지만 저한테는 그렇게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