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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입술

칼과 입술

: 우리를 살게 하는 맛의 기억 사전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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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에세이 top20 9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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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6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00쪽 | 452g | 128*185*20mm
ISBN13 9788960902701
ISBN10 896090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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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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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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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된장을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처님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불교 신잔가요?”
“그쪽은 어머니 신잡니까?”
“일체만물이 어머니 된장 맛에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곧 부처님 아닌가요?”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 p.39

하얀 종지에 따라놓은 간장을 보면 그윽히 서럽다. 밥상 위에 흰 쌀밥과 간장 종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더욱 매섭게 서글프다. 거기서 나는 미美를 발견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밥상에는 그 갓난아이가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가지고 놀던 숟가락이 함께 놓여 있다. 그때 아이의 여린 손에 쥐어져 있던 숟가락은 무얼 뜻하는 것이었을까. 혹시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 p.45

내 생애 그토록 정갈한 밥상을 받아보기는 그제나 이제나 처음이었다. 그 밥은 맛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장아찌 덕분이었다. 어느 장아찌든 된장독 속에 오래 박아둔 터라 깊은 맛이 배어나왔다. 장아찌가 밥도둑 역할을 한 것이다.
한 달이나 장아찌 반찬으로 밥을 먹는 동안, 나는 몸과 마음이 지극히 맑아지는 경험을 했다. 그 장아찌들은 묵언默言으로 전하는 스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내게 장아찌는 하나의 법法이다.
--- p.100

나는 몸과 마음이 혼탁할 때면 여전히 장아찌만으로 밥을 먹는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뒤에는 반드시 냉수를 마신다. 장아찌는‘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의 그 말씀에 값하는 음식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선禪이고 법法이다.
--- p.101~102

겨울의 황태 덕장은 그 풍경이 장엄하다. 바다에서 잡힌 명태가 깊은 산중에서 눈보라와 햇빛과 어둠에 번갈아 익어가는 과정은 사람이 도를 닦고 법을 구하는 일만큼이나 지난하다. 그것이 마침내 황태국이란 이름으로 아침 밥상에 올라오면 사람의 울혈진 속을 달래주는 맑고 뜨거운 해장국으로 변한다. 나 역시 해마다 속초와 강릉과 양양을 오르내리며 얼마나 많이 황태국으로 쓰린 속을 달랬던가. 속초 동명항의 허름한 횟집에서 가자미, 도다리, 미역치, 돌참치를 회로 썰어놓고 마신 소주는 또 얼마인가. 그때마다 황태국은 설악에 쌓인 눈처럼 내 지친 몸과 마음을 맑게 풀어주곤 했다.
--- p.116

그때 나는 난생처음 살아 있는 고등어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감성돔을 잡은 것만큼 가슴이 뛰었다. 어쨌든 처음 잡아보는 어종이었으니까. 게다가 35센티미터쯤 되는 커다란 고등어였다. 힘
도 무척 셌다.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하얀 뱃가죽과 그 푸르른 등이었다. 그 색깔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시장에 가서 얼음 위에 누워 있는 고등어를 볼 때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그것이 바로 산 것과 죽은 것의 명백한 차이였다. 그때 나는 새삼 깨달았다. 살아 있음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 p.122~123

달밤에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오는 갈치를 볼 때마다 나는 숨이 멎곤 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형언키 힘든, 눈앞 어둠 속에서 살아 춤추는 긴 칼의 아름다움! 그 은빛의 서슬 퍼런 존재감! 그때마다 나는 그 칼에 여지없이 마음을 베였고, 누가 과연 그 순간을 지배하는지 몰라 감당키 어려운 고독에 사로잡히곤 했다.
--- p.135

이 근처가 조기잡이로 유명한 칠산어장이라네. 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 제주도와 추자도를 거쳐 이쪽으로 조기 떼가 몰려오지. 그때가 되면 북상하는 조기 떼들이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며 바닷물 위로 뛰어오르는 걸 볼 수 있어. 수놈이 암놈을 부르는 소리라고 하지. 또 썰물 때가 되면 조기 떼가 수면 가까이에 떠서 퇴거하기 때문에 마치 바람에 숲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네. 어릴 때 아버지와 배를 타고 나가 바닷물 속에 대나무를 꽂고 조기 떼 우는 소리를 듣곤 했어. 살구꽃이 필 때면 수백 척의 안강망 어선이 운집해 일대 파시를 이루는데 밤이 되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네. 이봐, 봄이 되면 나는 자주 조기 떼 꿈을 꿔. 그들과 함께 푸른 카펫이 깔린 바닷속을 유영하는 꿈을 말이야.
--- p.137~138

저녁을 굶은 채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온 밤에 아내가 끓여주는 조기 매운탕과 뜨거운 밥 한 그릇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자 위안이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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