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본문 중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생각한다고 해서 죽음을 다 아는 건 아닐 텐데 자꾸만 죽음을 떠올리는 횟수가 빈번해진다. 경험할 수도 없으니 그 무엇도 죽음을 잘 알게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생각할수록 더 궁금해지는 게 죽음이었다. 올해 장례식에 다녀와야 할 일이 많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소식을 많이 들었던 반년을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는 것도 흐름이 있는 듯하다. 한때 누군가의 결혼 소식과 아이 탄생 소식이 자주 들려왔는데, 요즘은 누군가의 죽음을 듣는 일이 잦다. 나이를 먹었다는 뜻일 테다. 자주 잊고 사는 내 나이를 이렇게 확인시켜 준다. 아마 내 주변의 사람들도 그런 흐름을 걷고 있겠지. 그들에게 들려오는 죽음도 비슷할 거다. 점점 더 많이 들려오겠지. 부모님, 친척, 친구, 지인... 아무리 많은 죽음을 접한다고 해도 적응되지 않는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죽음을 겪고 슬픔도 그리움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옅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때마다 쌓여갈 뿐이지 소멸하지 않는다. 죽음은 그렇게 항상 우리 곁에 있었는데, 너무 자주 잊고 살았다.
죽음을 두고 '때'가 있는 것일까.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이를 놓고 사람들은 대개 그 '때'를 말하곤 한다. 나도 그렇다. 노인이 죽었을 때는 살아온 시간을 계산하며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면서도, 젊은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그럴 나이가 아닌데, 이럴 수는 없는데,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폴의 죽음을 두고 나도 모르게 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힘든 시간 보내왔는데, 지금 막 정상에 올라 인생 2막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럴 수는 없다며 한탄했다. 날벼락 같은 암 소식에 그의 삶 몇십 년이 뚝 떨어져 나갔다. 혹독하다고 여기던 레지던트 생활도 버텼는데... 그의 말처럼 20년을 의사로 보내고 나머지 20년을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했는데, 그의 의사 인생 20년 다 채우지도 못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려 했던 시간마저 사라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이란 말인가. 앞으로 그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갈까.
서른여섯. 폐암 4기. 인생의 절정에서 추락하는 사람의 마음을 떠올렸다. 모든 게 탄탄대로일 것 같은 순간에, 건져 올릴 수 없는 깊이의 싱크홀을 만난 것 같다. 올라오려 허우적대도 오를 수 없는 벽만 손톱으로 긁고 있는 듯하다. 치료가 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다. 임상시험으로 또 다른 도전을 할 수도 있지만, 그의 목숨이 시한부라는 건 변함없다. 사랑하는 아내, 자기를 아껴주는 가족들, 남은 레지던트 생활,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가 가져다줄 긍정의 미래. 무엇하나 놓고 싶지 않은 것들뿐인데, 남은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밀려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폴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꽉 막혀온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설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건 폴의 오늘이고, 죽음은 폴의 내일이다. 무엇 하나 허투루 들을 수가 없더라. 그 중심에서 그의 진심을 듣는다는 건, 지금 내게 필요한 일이었다. 3년 동안 병원에 드나들며 힘들게 하는 아버지, 꾸준히 병원에 다니며 당신 몸을 체크해야만 하는 엄마. 이제는 나도 그 병원의 응급실을 찾는 횟수가 늘어간다. 사는 모든 순간에 죽음이 가까이 있었는데 이제야 그걸 깨닫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고 하면 내 앞의 많은 것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던 요즘이었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 마음도 다른 것을 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오늘을 사는 폴의 시선에서 보이는 것에 공감하고 싶었다. 그의 눈에 비친 많은 것이 진심일 테니까.
그의 삶은 변했다. 의사에서 환자가 됐다. 서 있는 자리가 변하니 마음도 변한다.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본문 중에서) 의사가 되었던 그는, 이제 같은 이유로 자기 목숨을 건 싸움을 한다. 그의 말처럼, 죽음을 떠올리며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겠지만, 죽음을 의사와 환자 모두의 처지에서 보기 시작했다. 서 있는 자리가 바뀌었다. 그가 자기 죽음을 마주하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치병 환자의 고뇌를 절실하게 말한다. 다른 세상을 직접 부딪쳐 알게 되는 또 하나의 삶. 그 순간 남은 시간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 시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의 계획을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담당의는 말할 수 없는, 그 스스로 찾아내야 할 시간의 의미였다. 그러니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알 수 없어도 분명한 거 하나는 있다. 살아가야 한다는 거. 그래서 썼다. 그가 살아온 시간, 그가 걸어온 순간마다 부여했던 삶의 의미, 남겨질 아내에게 보내는 진심을... 그렇게 기록하는 일만이 남은 시간 그가 살아가는 이유, 그의 인생 계획을 마무리하는 일이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다 정리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성장 시기와 현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청소년기에 관심 두던 문학을 시작으로 그가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의미 있다. 삶의 의미를 문학에서 보던 그는 영문학과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인간을 탐구하다가 결국 의사가 되기로 한다.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이 의미 있을 수 있는 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그렇게 열었다. 우리 뇌의 역할과 기능, 삶을 어떻게 만드는 지까지 파고들며 의학과 과학이 우리 삶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 모든 게 좋은 의사가 되려는 마음으로 귀결된다. 투병 중에도 수술실로 복귀해야만 했던 그의 마음이 읽힌다. 그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병과 싸우는 환자를 향한 또 다른 응원처럼 보인다. 언제 죽을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건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니, 그 의미대로 오늘을 살았다. 최고참 레지던트의 업무를 봤고, 아내 루시에게 딸 케이디를 남겼다. 자기 자리에서 잘 살아내고 떠났다. 폴이 기록하고 그가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은 그의 아내 루시가 마무리한 이 글에서, 생생하게 죽음을 마주한 긴장감이 보인다. 내가 경험하지 못할 감정의 한 자락을 엿본 기분이다. (내가 이미 그 경험을 했다면 나는 이렇게 쓰고 있을 수가 없을 테니...)
죽음에 직면한 순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듣고 싶었다. 나에게 닥친 일이라는 가정으로 보게 되는 많은 일 중에 하나가 죽음이었다. 그 죽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는데, 폴이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거쳐 얻은 답을 들려준다. 남겨진 시간을 알 수 없어 답답하고 자기 맘과 다르게 남겨진 듯한 인생에 화가 나기도 했을 테지만 중심을 잡은 그의 의지가 놀라웠다. 그가 맡았던 환자들처럼, 그는 죽음과 마주한 채 그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다. 사는 방식이 변해야 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은, 죽어가기 전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죽음 없는 삶이란 없다'는 그의 말 그대로다. 죽음을 마주한 하루하루를 살며 열심히 글을 쓰고, 가족을 사랑했다. 환자가 된 시간의 가치를 자기만의 바람으로 썼다. 갑자기 인생에서 몇십 년이 사라졌지만, 받아들였다. 죽음의 이르기까지 그가 살아야 하는 게 삶의 이치이므로...
계속 생각한다. 나라면? 나에게 닥친 순간이라면 나는 어떤 자세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계속 묻는 이야기다. 정해져 있는 답이었다. 오늘을 살던 그대로, 바라던 것의 우선순위를 고민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면서 보내야 한다는 것. 폴이 이뤄낸 것도 그런 것이겠지.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쓰고 싶었던 글을 쓰며 보냈던 마지막이 더 길지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더 붙잡고 싶은, 그 가치를 찾고 싶은 시간이다. 더 사랑하고, 더 간절해지는 것을 떠올리며 붙잡듯이 살아가야 할 오늘이다. 아직 죽지 않은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