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장 자주 하는 욕 중 하나는 바로 ‘동물’입니다. 동물은 이런 사람들을 뜻합니다. 저속하고 공격적이며, 교양이 없고, 비열하고 공격적이고…. 인간은 ‘동물’이라는 단어를 ‘모욕’이라는 뜻으로 바꾸었고, 대지의 어머니가 낳은 모든 생물을 욕하면서 자신의 본래 정체성에 대해서는 강력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삶은 연극이자, 변장하고 나타나는 축제 같습니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안 속지만요.‘페르소나(persona)’란 단어는 인간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로 그 말의 어원은 ‘가면’입니다. 정말 인간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남자고 여자고 각자 삶의 무대로 나가기 전에 자신만의 가면을 아주 잘 씁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진짜 생각, 충동, 느낌을 감추기 위해 ‘문명화된’ 복잡한 예법에 따라 자신들의 태도나 말을 숨기고 통제합니다.
인간들의 뒷방에서는 이런 일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평화를 이야기하고,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말하며, 기업은 품질을 이미지로 속입니다. 폭력을 숨기기 위해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너무 큰 뇌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뇌는 지나지게 커졌는데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알지 못해서 뇌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동물은 우주의 리듬과 영원의 흐름, 우리의 본성, 삶과 죽음의 주기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과학 지식을 얻으려다 더 중요한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은 사자, 풀, 태양도 전혀 관계성이 없는 각각의 객체로 봅니다. 인간 자신들조차도 따로 떨어진 존재로 봅니다. 모든 것을 다 그런 식으로 봅니다. 관계성을 잃어버린 거죠. 정말 그 고독과 혼란은 끔찍합니다.
저는 사실 암퇘지가 아닙니다. 수퇘지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수퇘지고기는 특유의 누린내가 난다면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환을 떼어내는 거세를 당해야 했습니다. 거세 수술은 마취 없이 진행되었고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많은 암소들은 우유 기계가 되었습니다. 기분 나쁜 ‘인공 수정’을 통해 늘 임신을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루에 두세 번은 젖을 짰고 젖꼭지에 맞는 기계인 유축기로 일반 젖 양의 열 배 정도를 짰습니다.
인간은 더럽고 역겨운 인간을 돼지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이 돼지를 비참하고 더럽고 참담한 상황에 몰아넣으면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 인간들이 지구를 쓰레기, 오염 물질, 온갖 오물로 ‘돼지우리’로 만듭니다.
많은 동물들은 인간을 위한 신약 개발에 이용되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그건 그럴 만합니다. 하지만 립스틱, 식기 세척제, 기침약, 크리스마스트리를 더 싱싱하게 유지하기 위한 스프레이 등을 만드는 데도 동물실험을 합니다. 정말 완전히 돌아버리겠다니까요! 그저 호기심 때문에도 실험을 합니다. 생쥐가 추운 곳에서 어떻게 죽는지 알아보려고 냉장고에 넣기도 합니다. 어미와 강제로 떨어진 새끼 원숭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연구하기도 합니다.
부처는 ‘모든 존재는 폭력 앞에서 떤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살생하지 말고, 다른 이들이 당신도 죽이지 않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정신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에게도 영감을 주어서 그는 ‘동물은 우리처럼 영혼을 가질 권리가 있다.’라면서 제자들에게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직접 손으로 동물을 죽이지 않고 동물을 죽이는 장소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 때문에 생명을 잃는 동물의 희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명예가 없고 그저 잔인하고 비겁합니다. 직접 부딪쳐 싸우지 않고 멀리서도 상대를 즉시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수백 또는 수천 명을 죽이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희생자들은 종종 항복한다는 표시조차 못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인간들은 폭력을 매우 숭상합니다.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서 도시의 가장 중요한 곳에는 개선문이, 런던에는 넬슨 기념비 같은 멋진 돌과 청동으로 만든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인간은 최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이 최고라고 믿습니다. 다른 동물과 겨룰 때는 창조의 왕이자 진화의 결정판인 완벽한 존재의 자리까지 넘봅니다. 정말 웃깁니다. 그들이 걷는 것을 못 보셔서 그렇지 두 다리로 서툴게 움직이는데 무릎을 조금만 방심해서 잘못 움직여도 땅바닥에 구르게 됩니다.
인간은 장미의 독특한 향기와 아름다움이 그들의 시와 밸런타인데이 준비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죠. 근데, 호모 사피엔스가 이걸 아는지 모르겠네요. 그 많은 꽃이 인간이 혐오하는 곤충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아름답다는 걸!
벌레는 놀랍고 생명력이 강한 존재인데 인간들은 유독 벌레를 싫어합니다. 구더기, 벌레는 욕으로 사용되죠. 우울할 때는 스스로 ‘벌레만도 못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들은 소행성일 뿐 아니라 공룡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공룡처럼 지구를 지배하면서 수많은 환경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지구에 떨어진 소행성처럼 모든 생명의 그물망을 찢어놓고 수많은 종을 멸종시킵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산문집인 《비평》의 일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책에는 신들이 세상을 창조할 때 있었던 일이 적혀 있습니다. ‘우주 최고 기술공은 세상이라는 가장 큰 공간을 만들었다. 모든 생물에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나누어 주기로 하고, 모기부터 코끼리까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지역을 보여 주면서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하라고 했다. 코끼리는 밀림을, 말은 초원을, 독수리는 공중을, 고래는 먼 바다를, 백조는 연못을, 뱅어는 강을, 개구리는 물웅덩이를 보고 만족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다 너무 좁다며 불평을 했다. 온 우주도 인간이 보기에는 그렇게 좁아 보였던 것이다.’
동물은 행복 아픔, 굶주림, 두려움을 겪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피조물 상태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예외입니다. 이기고 싶은 욕망 탓에 쉴 새 없이 스스로를 고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더 잘생기고, 건강하고, 힘이 세면 더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텔레비전과 잡지, 벽보에는 최신 옷이나 기계를 사고 나서 만족해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걸린 광고가 보입니다. 더 가지면 더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수백 번도 넘게 듣습니다.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능력은 이성이니 지능이니 하는 것보다 ‘유연성’입니다. 모든 동물은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작동원리와 구조를 갖고 태어나 정해진 행동을 하는데 인간은 다른 종에 비해서 후천적으로 배운 문화에 의해서 유연하게 변하고 빚어지기 쉽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동등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사랑하고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다른 동물보다 그들만이 더 존중받아야 하고 더 고귀하다고 스스로 믿으면서 우리를 모욕하고 중상했습니다. 인간은 우리를 노예로 삼고 잔인한 도구와 감옥 시스템으로 학대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가장 뛰어나다고 믿는데, 인간은 원숭이의 후손으로 그 아래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 서열에 있는 겁니다.
인간이 강아지와 고양이 새끼를 쓰다듬으며 아끼면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한 동물실험을 하는 실험실과 고기, 우유, 달걀을 공산품처럼 생산하는 나쁜 공장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한심한 변명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잔혹함을 직접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눈과 귀를 가립니다.
인간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신의 정신적 능력이 큰 힘이라는 것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지구의 동식물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나서 고작 만 번의 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호기심이 많고 에너지가 넘치며 계속 뭔가를 시도하고 확인해 보고 싶어 합니다. 시험과 실험을 통해 상황을 악화시키고 주변에 피해를 주며 자신의 삶조차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이 사악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큰 힘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일까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