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상사의 ‘갑질’도 ‘도덕적 면허’로 설명할 수 있다. 미시간주립 대학 교수 러셀 존슨(Russell Johnson)은 판매업과 제조업, 복지·교육 관련 기업의 관리자 172명을 관찰 추적해 상사들이 갑질하는 이유를 분석한 논문에서 갑질하는 상사들은 대부분 ‘윤리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이들은 그동안의 선한 행위를 통해 도덕성에 대한 자기 이미지가 강해져 부하 직원들에게 갑질을 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답을 내놓았다. --- p.21~22
의사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인한 ‘친근의 환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미디어를 이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일어나는 현상이다. 미디어를 통해 잘 알던 사람을 어쩌다 우연히 실제로 마주치게 된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느낌이 무엇인지 이해할 것이다. 특히 특정 미디어 스타를 좋아하는 팬들에겐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어떤 이유로 의사사회적 관계가 깨졌을 때에 느끼는 고통은 실제 인간관계가 깨졌을 때의 고통보다는 덜할망정 그런 고통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만사 제쳐 놓고 열심히 보던 드라마가 종영된다면 의사사회적 관계를 맺은 스타와 이별(breakup)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허탈감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적잖을 텐데, 실제로 이걸 연구 한 논문이 많이 나와 있다. 각자의 시청 동기와 애착(attachment) 성향에 따라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시청자들도 있다고 하니, 의사사회적 관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물론 그게 뜻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p. 83
자기감시엔 명암이 있다. 자기감시를 많이 하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기도 하지만, 이른바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으로 인해 많이 나타나는 자기감시는 매우 피곤할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이다.……자기감시를 잘해서 성공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게 살면 삶이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어쩌면 성공한 사람들의 휴가란 그런 자기감시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 혼자만의 공간을 갖기 위한 시간으로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자기감시, 하더라도 적당히 하자. 물론 정서 노동자들처럼 직업상 자기감시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겐 이마저 사치스러운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말이다.--- p. 116~117
기대 위반 이론에 대해 이런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우리는 늘 어떤 상황에서건 우리의 기대에 대한 위반을 정확히 판별해낼 수 있는가? 기대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것일 경우, 위반의 여부와 정도를 판단하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사실상 이미지나 상징을 파는 제품의 마케팅은 “‘기대’가 ‘경험’을 좌우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런 경우 ‘위반’ 여부와 정도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평판이 결정하는 게 아닐까? 많은 경우 인간관계도 그런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p. 166
또래 압력이 세상을 치유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가능성에 어느 정도나마 공감한다면, 기성세대가 영 마땅치 않게 보는 10대 팬덤을 그런 관점에서 보는 건 어떨까? 즉, 10대 팬덤에 대해 한번 뒤집어서 생각해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취향 공동체, 특히 팬덤은 점차 상실되어가는 사회성 회복을 위한 공공적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10대들은 유행하는 독재자 앞에 납작 엎드리기도 하지만, 적절한 기회와 상황만 생기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기성세대는 일부 10대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태에 눈살만 찌푸릴 게 아니라 그들의 소속감에 대한 열망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도 눈을 돌려보는 게 좋겠다.--- p. 216~217
지역주의 문제는 정공법으로 돌파해야지 탈영토화 전략 같은 우회적인 방법으론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문제다. 지역주의는 기존 중앙 패권주의의 사생아임을 직시해야 한다. 지방 유권자들 사이에 신앙처럼 여겨지고 있는 “우리 지역 출신이 중앙 권력을 잡아야 우리가 잘 살거나 적어도 피해보지 않을 수 있다”는 실체적 근거를 깰 생각은 않고, 일시적인 눈속임을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대형마트가 지역의 영세 상권을 초토화한 것에서 잘 드러났듯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한국 사회의 디지털화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탈영토화를 가속화했고, 그 결과 우리는 개인과 가족 단위의 생활 편의성은 세계 최고 수준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공공성 있는 지역이라는 영토를 잃고 만 셈이다.--- p. 261
사실 정치인들도 정치적 메시지라고 하는 자신의 정치적 상품을 마케팅하고자 할 때에 광고인들과 비슷한 고민을 한다. 아니 광고인들보다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광고인은 제품과 소비자의 세분화와 그에 따른 전략의 차별화를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지만, 정치인에겐 그런 세분화와 차별화가 비교적 더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인을 향해 “여기 가선 이 말 하고 저기 가선 저 말한다”는 비판이 자주 나오는 건 바로 그런 어려움 때문이다. 정치에선 광고의 관여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참여인데, 유권자들 역시 소비자들처럼 참여의 관심과 열정이 각기 다르다. 일반적으로 다르기도 하고 이슈에 따라 다르기도 하므로, 정치인으로선 그 셈법이 이만저만 복잡한 게 아니다. 유권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참여 관심과 열정의 차이를 가리켜 ‘참여 격차(participation gap)’라고 하는데, 이게 민주주의 과정을 크게 왜곡시킬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 p. 299~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