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오래도록 지켜보면 또 다른 것이 보인다고 했다. 오랫동안 그들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나는 잊고 있던 소중한 사람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 「저자 서문」 중에서
히말라야의 자연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른 곳보다 일찍 겨울이 찾아오면 흰 눈이 세상을 온통 집어삼킨 채 대지는 꽁꽁 얼어붙고 작물은 새까맣게 말라간다. 그러나 말할 수 없이 척박한 땅에서 사는 라다크 사람들은 함부로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름철 고원지대의 강렬한 햇볕으로 인해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온 마음을 다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기 때문이다 . --- p. 14
그 아이의 이름은 파드마 앙뚜로, 이제 막 아홉 살이 되었지만 여느 아이에 비해 좀 작은 체구였다. 하지만 이 아이는 평범한 동자승이 아니라 ‘린포체’다. 라다크 사람들은 린포체를 부처와 대등한 존재로 존대하기에 모두들 이렇게 이 아이의 축복을 원하는 것이었다. 린포체는 전생에 고승이었던 사람이 생명을 다한 후에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환생한 사람을 말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린포체들은 전생에 다 이루지 못한 업을 잇기 위해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 p. 18
사원이 없는 린포체는 부모도, 고향도 없는 고아처럼 외롭고 힘겨운 삶을 이어가야 한다. 티베트로부터 전갈이 없는 상태에서 언젠가부터 우르갼은 앙뚜가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했다. 우르갼이 앙뚜를 데리고 티베트에 있는 사원으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제일 좋을 것이다. 하지만 라다크 지역 삭티 마을에서 티베트 캄 지역까지는 지구에서 달나라까지보다 먼 거리였다. 더구나 중국 당국이 철저히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우르갼의 살아생전에는 가능성이 희박한 얘기였다 . --- p. 62
어릴 때는 전생의 사원 풍경이 눈앞의 그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는데 이제는 손에 쥔 모래알처럼 조금씩 기억에서 새어나가고 있었다. 고승의 환생으로 태어난 린포체는 아홉 살, 열 살이 넘으면서 전생의 기억이 흐려지는 게 보통이라고는 하나 앙뚜는 아직 제자도 찾아오지 않았고 사원도 없다.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어서 제자들이 찾아와줘야 하는데……. --- p. 111
우르갼은 알고 있었다. 앙뚜와 나누는 행복은 어떤 위기가 와도 쉽게 꺼진 적이 없다는 것을. 린포체로 즉위하고, 가짜라고 의심받고, 애정을 품었던 사원에서 쫓겨나고, 폭풍처럼 쏟아진 사춘기 반항기를 통과하면서도 언제나 혹독한 동절기를 견디게 하는 난로 속의 불씨처럼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우르갼은 또 생각했다. 앙뚜가 얼마나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는지를. 그것은 어쩌면 우르갼이 앙뚜에게 향하는 사랑의 크기보다 몇 천 배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을 것이었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우르갼은 가슴에 들어차는 커다란 물음표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뱉었다. 앙뚜의 앞날을 위해 무엇이 최선일까? --- p. 162
이제 앙뚜가 그런 모진 세월을 다 이겨내고 진짜 린포체다운 인물이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꾹꾹 눌러왔던 안타까움과 슬픔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다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떠나는 아들 앞에서 절대로,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그만 그런 다짐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앙뚜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깜짝 놀랐다. 울지 말아요, 엄마…….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앙뚜 역시 금방이라도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 --- p. 170
언제 닿을지 알 수도 없는 길을 대책 없이 걷고 또 걷기만 하는 여행이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우르갼은 이번 여행을 통해 앙뚜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 일이 언젠가는 앙뚜에게 귀한 경험으로 기억될 테니 이 또한 수행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 --- p. 187
“캄의 제자들이 들을 수 있게 소라나팔을 불어보세요. 분명히 린포체 님이 부르는 나팔소리가 그곳까지 전해질 겁니다.” 우르갼이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온 자그마한 소라나팔을 꺼내주자 앙뚜의 눈에 다시금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 앙뚜는 장갑을 벗고 나팔의 몸통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앙뚜는 자신의 몸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바람을 끌어모아 소라나팔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근엄하게 불경을 읊조리는 듯한 중저음의 나팔소리가 산줄기를 따라, 거센 바람을 따라,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는 하늘 멀리 퍼져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