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혼자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두고 남편은 “아이를 방치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남편과 나 둘이서 무언가 할 때, 가령 밥을 먹으며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면 아이에게 스마트폰 주는 것에 대해선 ‘방치’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남편은 언제나 내가 아이에게 주는 식단이 부실하다고 생각했다. 밑반찬, 국 종류는 반찬 가게에서 사다 먹는다. (……) 엄마가 해주는 반찬보다, 사 먹는 반찬을 아이가 훨씬 잘 먹음에 아이가 밥 안 먹는 스트레스 역시 해소되었다. 동시에 엄마가 해주는 밥상이 아니라는 죄책감 역시 동반했다. 남편은 언제나 아이에게 “밥 먹었어?”라고 물어봤는데 그 질문은 마치 나 스스로 밥을 굶기는 엄마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또, 우리 부부가 외식을 하며 술 한잔할 때면 아이의 밥상은 그 여느 때보다 부실했지만, 평소의 남편 특유의 예민함은 부재했다. 이러한 기준 모호가 내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로 다가왔다.
---「프롤로그」중에서
임신과 출산 내내 식사는 남편 전담이었다. 혹여나 굶을까 봐 퇴근을 하고 와서는 계란말이며, 생선 구이며, 밑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뒀다. 출산을 한 후에는 한 달 내내 미역국을 끓여냈다. 아이가 가벼운 기침을 할 때면 머리맡에 양파를 썰어서 놔둔다거나, 계란 노른자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트리고 꿀을 타서 먹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신기한 광경이었는데, 이 같은 그의 자상함은 모두 어머님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오랜 기간 혼자 지내온 나는 결코 누려보지 못한 살뜰한 챙김. 그러나 그의 키워드인 ‘안정’, ‘보살핌’, ‘챙김’은 날이 갈수록 내게 ‘압박’, ‘구속’, ‘억압’이라는 오류로 입력되었다.
---「2017월 9월 3일 D -24」중에서
이 시대의 3040은 전통적인 어머니상과 사회 진출을 하는 여성상 사이에 끼인 세대이다. 대부분 대학 졸업을 한 후 직장 생활을 했으며,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 단절 여성이 된다. 학교에서는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진 시대’, ‘여성들도 제약 없이 사회 활동을 하는 시대’라고 배웠고, 그런 줄 알고 자랐다. 젠더 의식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세대인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모순적인 상황을 마주한다. 주도적인 여성, 적극적인 여성이 이 시대의 여성상이라 알고 있던 우리들은, ‘나’가 사라지는 결혼 생활에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이 간극은 결혼 휴식으로 이어졌다.
---「내게 남은 건 34세, 기혼, 아기 엄마」중에서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주장하는 이러한 결혼 형태는 비정상적이거나 유별난 것이 아닌, 또 다른 가족의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 ‘핵가족화’와 ‘대가족의 붕괴와 해체’를 배운 기억이 난다. 이제 이런 교육 내용은 구시대적인 산물이 되었다. 더 이상 부모와 자녀로만 이루어진 가정을 핵가족이라 구분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빼기’의 시대이다. 인생에서 결혼을 빼면 비혼족, 결혼에서 아이를 빼면 딩크족, 결혼에서 동거를 빼면 LAT족이니 말이다. “같이 살려고 결혼하는 거지, 그럴 거면 왜 결혼해?”라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얼마나 개연성이 없는지 알기 위해선 “아이 낳으려고 결혼하는 거지, 그럴 거면 왜 결혼해?”라는 어른들 말씀을 꺼내보면 된다.
---「결혼-=?」중에서
“어머님, 죄송해요.” 어머님을 안았다. 어머님은 울먹거리신다. “시현아, 나는 네가 너무 불쌍해서……” 정말 뜻밖이었다. 어머님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실 줄 알았다. 속사정이 어떻든 아들과 손자 놔두고 나간 며느린데, 저런 마음이 안 드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아니, 어쩌면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실지 모른다. 눈앞에서 며느리를 마주하니 정 많고 마음 약한 어머님의 천성이 드러난 것일 뿐. 며느리의 과오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만으로 품으려 하시는구나. 나 혼자 지레 겁먹었구나. “어머님, 저 하나도 불쌍하지 않아요. 정말 잘 지내요.” 목소리에도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시어머니와의 조우」중에서
연이은 일정에 피곤했는지 평소에 눌리지 않는 가위까지 눌렸다. 그럼에도 요즘 나의 기분을 묻는다면 “최고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숨 막힐 정도로 갑갑할 때가 있고 체력적으로는 힘에 부치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재미있고 감사한 나날이다. 지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류비에 혀를 내두른다는 것은 차가 있다는 뜻이고, 아침부터 시외버스를 탄다는 것은 일이 있다는 의미이다. 얼마간 백수 신세를 면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는데, 하루가 텅 비어 있지 않은 그 자체가 내겐 감사이다.
---「일에 관하여: 다시 사회인이 된다는 것」중에서
이번 주는 아이 품이 특히나 그리웠던지라 끊임없이 아이를 만지고 닿이고 안는다. 저 혼자 이미 다 큰 것마냥 벌써부터 엄마 품을 벗어나려 한다. 저가 필요할 때만 안기고, 그 외엔 귀찮아하는 낌새에 서운하다. 동그랗게 눈 뜨고 있는 낮에는 원 없이 안을 수 없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밤에 한을 풀었다. 팔베개도 했다가 머리칼도 쓰다듬었다가 뽀뽀도 많이 했다. 자다가도 깨어 아이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이거 큰일이다. 조만간 아이 생각에 밤잠을 설치거나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도래할지 모르겠다. 결국 거주지를 대전에서 충북 음성으로 옮기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아이와 가까운 곳으로, 단 몇 시간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는 집으로. 돈이야 다시 주워 담으면 되지만 애달픔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아이에 관하여: 아이 앞에서 나는 겸허해진다」중에서
예전에 ‘사회적 동물’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가정적 동물’이라는 단어는 왜 없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다. 내 의견이 반영되고 동료들과 치열하게 토론하고 함께 합작품을 만들어내는 사회생활은 피곤하지만 확실히 그만한 매력이 있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결코 몰랐을 그림자 같은 커리어처럼, 주부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결코 몰랐을 일의 즐거움이리라. 사회에 지친 이들은 가정에서 쉬고 싶을 것이고, 가정에 지친 이들은 사회를 그리워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어둠을 알아야 빛을 안다. 그리고, 어둠 속에만 보이는 것도 있다. 낮과 밤을 합쳐 하루라고 하듯, 모든 경험은 통합된다.
---「사회생활 vs. 가정생활」중에서
‘감히’ 남편의 권위에 도전하고 남편의 출장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내 일을 우선시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엄청난 싸움을 벌였고, 그 결과 가정에서 뚝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만약 미묘한 차별이 있는 남녀 역할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좋은 엄마’ 밑에서 자란 아들은 또 다른 차별을 할 것이고, ‘좋은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은 똑같은 차별을 받을 것이다. 은근한 폭력인 줄 모른 채.
---「2017년 9월 2일 D-25 ‘그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