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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끝이 정해진 이야기라 해도

어쩌면 끝이 정해진 이야기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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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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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년 06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382g | 140*200*20mm
ISBN13 9788947543637
ISBN10 8947543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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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짜리 딸 세이디는 아빠가 눈으로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선구동 컴퓨터를 쓴다는 말보다는 훨씬 더 낭만적이다. “아빠 눈한테 물어볼래.” 아이는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이렇게 말한다. “아빠는 나를 사랑해!” 아이는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소리친다. 사랑은 남편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선물이다. 나는 그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꽉 껴안는다. 남편은 그토록 놀라운 존재지만 그를 찾기는 쉽지 않다. 나는 집에서도 그를 찾아 헤맨다. 그는 기도에 뚫어놓은 파이프로 숨을 쉰다. 그는 모든 것을 느끼지만 근육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그의 가슴에 엎드려 기계가 내는 호흡수를 센다. 손을 잡아도 그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만이 그의 유일한 소통 창구다. 그러나 그를 찾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영혼이 그러기를 바라고 그의 영혼도 바라기 때문이다. 사이먼은 운동신경질환(MND, 운동신경세포가 퇴행하며 소실돼 근력이 약화되는 질병으로 루게릭병도 이 질환에 속한다-옮긴이)에 걸렸지만 궁지에 몰린 건 아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용감해져야 한다. --- p.9~10

시골에 살면서 셋째를 임신한 나는 신경과 전문의의 진료실에서 사이먼을 기다리고 있다. 초록색 상의 때문에 내 배가 라우스 카운티와 모너핸 카운티의 경계를 이루는 아름다운 둥근 동산처럼 보인다. (…) 훗날 그 순간은 내 생애 최초로 공상을 후회했던 순간이 되었다. 왜 좀 더 주의 깊게 보지 못했을까? 왜 좀 더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을까? 아버지의 발자국 모양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의사가 나를 부른다. 사이먼은 몹시 창백한 얼굴로 서 있다. 책상 뒤에 앉은 전문의가 입을 열자 내 귀에서 모든 소리가 빨려나간다. “유감스럽게도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사이먼의 목소리가 더는 대문자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죠?” 나는 울먹이며 묻는다. 3, 4년 정도 산다는 대답이 나온다. 산다고? 머릿속에서 대문자로 비명이 울린다. 운동신경질환은 공상을 무너뜨리기에도 적당한 이유가 아닌데 이젠 내 인생을 무너뜨릴 모양이다. --- p.37~38

에이프릭이 소원을 비는 우물 같다는 건 그녀에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떤 이야기도 남에게 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단순히 비밀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어딘가 깊은 곳에 영원히 떨어뜨린다. 그녀는 몸놀림도 부드럽고 우아하다. 온 세상이 분노에 휩싸여도 차분하고 현명하게 제자리를 지킨다. 그런 그녀가 성질이 불같은 도깨비 요정 딸들을 셋이나 키운다는 게 아이러니다. 딸들은 엄마 주변을 뱅뱅 돌며 춤을 춘다. 가끔은 그녀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아이들의 잔잔한 중심이 된다. --- p.68

우린 다들 기억한다. 갤런은 중앙분리대가 있는 N11번 고속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러다 갓길에 주차되어 있던 트럭에 머리를 부딪쳤고 헬멧이 둘로 쪼개지면서 그의 척추도 부서졌다. (…) 수영을 하고 나온 우리는 벌벌 떨면서도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 내 입술은 파랗게 질린다. 미셸의 얼굴은 환하게 열린 것 같다.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키가 더 자란 느낌이다. 에이프릭은 그저 깜짝 놀란 표정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모래사장에서 미셸에게 인사를 건넨다. “갤런은 어떻게 지내요?” 그들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한숨을 쉬며 바닷물에 젖은 미셸의 팔을 꼭 잡는다. “정말 대단해요. 둘 다 참 대단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들은 정말 용감해요.” “맙소사, 미셸! 이러니까 우리 ‘비극을 겪은 아내들의 클럽’ 같아.” 내가 중얼거린다. “그럼 대체 에이프릭은 여기 와서 뭘 하는거야?” 미셸의 말에 일제히 웃음을 터뜨린다. --- p.85~89

“나도 운동병에 걸릴까요?” 레이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묻는다. “아니, 넌 절대로 운동병에 걸리지 않아.” 내가 대꾸한다. 아이가 일주일 내내 절룩이며 걸어 다녀서 결국 내가 학교로 불려간다. 아이는 걱정스런 얼굴로 양호실 침대에 누워 있다. “있잖아, 잘 들어봐!” 나는 크리스마스 때처럼 신나는 목소리로 말한다. “의사들이랑 과학자들이 다 같이 아빠의 피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니? 우리 가족 중엔 아무도 절대 운동병에 안 걸릴 거래. 그분들이 약속했어.” “정말이에요?” 레이프가 더듬더듬 묻는다. “‘진실’이야.”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발 아픈 게 훨씬 나아졌어요.” 아이가 인정한다. 내가 제안한다. “그럼 바닷가에서 뛰어보자.” (…) 아빠가 집에 없는 걸 아이들은 싫어한다. 시끄러운 에어 매트리스가 텅 비고 휠체어가 차지하던 넓은 공간도 휑하다. “아빠는 어디 갔어?” 사이먼과 간호사들이 사라지면 헌터가 울먹울먹 한다. 나는 속옷 바람으로 다니며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싶은데 아이들은 겁에 질린다. “나는… 아빠… 보고 싶어!” 흐느끼며 눈물을 삼키는 사이사이 헌터가 울부짖는다. “우리는 아빠 없는 거 싫어!” 아이들 모두 징징거린다. --- p.102~104

우리 부부의 결혼사진 앞에서 세이디가 작은 가슴을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다. “왜 나는 결혼식에 못 갔어? 왜 아빠는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해? 아빠는 아픈 사람이야? 아빠는 괜찮아? 아빠도 영원히 우리랑 살 수 있어?” 아이가 흑흑 흐느낀다. 오, 안 돼. 또 시작이군. 내 두뇌가 비명을 지른다. 이런 날이 올 것인지 사실은 궁금했었다. “왜 아빠는 옛날처럼 걸을 수도 있고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해? 그건 다 그냥 옛날 일이야?” 아이의 작은 몸을 덥석 껴안는다. 아이의 젖은 뺨에 속삭이며 나도 좀 더 마음의 준비가 되었더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엔 구차한 말로 변명을 하는 수밖에 없다. “아빠도 마음속으론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이야. 아빠는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아빠 마음속에서 옛날 아빠가 나오면 되잖아. 왜 그게 안돼?” 애니메이션에서 보고 준비해둔 내 말이 아이의 질문에 뭉개진다. 겨우 걸음마를 하는 아이들의 논리로도 디즈니 만화의 진부한 대사 정도는 쉽게 무너진다. _185~186쪽
“한가위 보름달은 올해 9월 16일에 뜬대요.” 그녀가 자료를 읽어준다. 그럼 그렇지.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믿어지지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메리언이 바짝 경계하며 묻는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사이먼과 제가 9월 16일에 결혼했어요. 그날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라고요.” (…) “왜 여자들만 물에 들어가요?” “왜냐하면여긴 레이디스코브이고 우린 인어거든.” 우리는 웃음을 터뜨린다. 수다를 떠는 사이사이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자 환호성과 가쁜 숨소리가 들려온다. 질투를 느낀 사내아이들도 물에 따라 들어온다. 우리는 재빨리 매끄러운 바위 쪽으로 건너가 거듭 다이빙을 한다. 갤런은 초능력 개 캐스퍼에게 막대기를 계속 던져주고, 캐스퍼는 끙끙대며 헤엄쳐 막대기를 물어온다. 그 개는 우리 모두와 경주를 해도 가장 빠르게 바위를 기어오르는 녀석이다. 기분이 황홀해진 우리는 예상보다 오래 바다에 머문다. 결국 나는 덜덜 떨며 손톱 밑에 해초가 가득 낀 채 뾰족한 바위 사이로 기어 나온다. --- p.235~238

전라로 보름달 수영을 누리는 순간은 두달 뒤인 11월 14일에 찾아왔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날씨가 따뜻하고 주변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다. 달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우리 셋은 수건으로 몸을 가린다.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그럼 누가 먼저…? 궁금해하는 내 옆에서 걷던 에이프릭은 이미 전라의 여신이 되어 있다. 우
와! 그녀의 엉덩이를 보며 검은 바다를 향해 계단을 내려간다. 메리가 바로 내 뒤를 따른다. 우리가 나란히 서자 바람이 채찍처럼 벌거벗은 몸을 때린다. 나는 비명과 함께 물속으로 뛰어든다. 맨살로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궁극적인 자연의 애무를 받는 것이라고 언젠가 메리언이 설명한 적이 있는데, 정말로 딱 그런 느낌이다. 살갗이 그토록 매끄럽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어머니 신과 지구와 바다, 그 느낌에 나는 숨을 헐떡일 뿐이다. 나는 내가 아니고 바닷물의 일부다. 바다는 나의 온몸 구석구석을 에워싼다. 우리는 추위를 도저히 못 견딜 순간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물에 뛰어들어 헐떡이다 또 바위에 오르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이건 일종의 죽음에 대한 열망이거나 영원함에 이끌리는 가엾은 나의 영혼 탓일 수도 있다. 나로선 정말이지 모르겠다. 야성의 달빛 아래서, 칠흑같이 검은 차가운 물속에서 나의 세속적인 번뇌는 흩어져간다. 이렇게 수영을 할 때면 나는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가 된다. 미친 달그림자는 더 좋은 꿈을 향해 나를 이끈다.
--- p.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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