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1992년 01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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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17쪽 | 148*210*30mm |
ISBN13 | 9788931000016 |
ISBN10 | 8931000014 |
발행일 | 1992년 01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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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17쪽 | 148*210*30mm |
ISBN13 | 9788931000016 |
ISBN10 | 8931000014 |
Ⅰ. 사물의 형식적 의례 1. 소비의 기적적인 현황 2. 경제성장의 악순화 Ⅱ. 소비의 이론 3. 소비의 사회적 논리 4. 소비의 이론을 위하여 5. 개성화 또는 최소 한계차이 Ⅲ. 대중매체, 섹스 그리고 여가 6. 대중매체문화 7. 소비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 : 육체 8. 여가의 비극 또는 시간낭비의 불가능 9. 배려의 성사 10. 풍부한 사회의 아노미 11. 결론 : 현재의 소외 또는 악마와의 계약의 끝 |
Jean Baudrillard, La Societe de consommation: Ses mythes ses structures
알고 당할 것인가, 모르고 당할 것인가?
SBS에서 방영하고 있는 「맨 인 블랙박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블랙박스에서 촬영된 사고 영상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아침 교양 프로그램인 「모닝와이드」의 한 꼭지로 출발했는데, 점차 인기가 많아지면서 주말 황금시간대에 단독 편성으로 확대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이지 별의별 교통사고들이 도처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충돌, 죽음, 실수, 분노, 악의 따위가 고속도로 위를 나뒹구는 찢겨진 타이어마냥 사방에 나뒹군다.
한 두 번 이 프로그램을 볼 때는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한 공익적 컨텐츠의 일환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파괴의 향연을 즐기다보면, 이내 그것은 제작진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하나의 표면적인 명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맨 인 블랙박스」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파괴의 미학, 충돌의 스펙터클이다. 육중한 기계장치가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인간을 태운 채 시속 120km로 달리다가 중앙 가드레인을 넘어 점프하기도 하고 인도를 덮치기도 한다. 사람들은 다리가 부러지거나, 죽거나, 최악의 경우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는다. 여기서 우리가 표면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교통사고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지만, 그 심층에 조심스럽게 도사린 감정은 영화 「2012」나 「고질라」를 볼 때 느끼곤 하는 대량 파괴의 엑스터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블랙박스 영상 특유의 각종 수치 정보들과 너저분한 화질은 이 영상이 실제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더 강한 자극과 몰입의 요인이 된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파괴의 이미지들에 노출되었고,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그 파괴의 미학 속에서 우리는 온전히 즐길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았었고, 그 외에 다른 맥락적 가능성은 없다. 동질화 내지 연민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등산 가방 안에서 뒤늦게 발견한 비스킷처럼 바스러진 건물들을 바라보며, ‘저 안에 내가 있다면’,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면’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부질없다. 컴컴한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그런 감정을 품을만한 에너지와 시간은 허락된 적이 없다. 물밀 듯이 휘몰아치는 파괴의 장면들은 철저한 분리를 강요하고, 우리의 시선은 주인공의 극적인 탈출에만 고정된다.
‘파괴 포르노’는 영화, 드라마, 광고, 뉴스의 형식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안방으로 찾아든다. 만약 어느 날 우리나라에서 파괴 포르노에 적합한 배우를 찾지 못한다면, 카메라의 초점은 아마도 미국 같은 나라(우리와 친하고, 영향력이 크며, 폭력이 일상인 나라)로 기꺼이 옮겨갈 것이다. 2017년을 기준으로 미국에서는 하루 평균 109명이 총에 맞아 죽기 때문에 어지간한 난사 사건이 아니면 우리나라까지 전파를 타기 힘들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자체적인 파괴 포르노를 결방할 수밖에 없는 날이면, 미국의 소소한 죽음도 우리나라에 송출될 확률이 높아진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오늘날 이처럼 폭력의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유를 ‘소비사회’에서 찾았다. 이 시대를 정의하는 견고한 구조인 소비사회는 매스미디어를 충신으로 삼아 개개인의 정신과 행동 일체를 붙들어 맨다. 매스미디어는 시시각각으로 벌어지는 폭력을 눈앞에 배달하고 입체감 있게 묘사한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이내 불안해지지만, 이내 그 고통은 나와 관련 없는 것이라며 일축해버린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한 불안감은 새로운 사물들로 주위를 둘러싸면서 불안감을 떨쳐버리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불안을 조장하는 이유는 극한으로 추구해야 마땅한 안락함이라는 권리를 더욱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쌍방향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개인별 맞춤형 컨텐츠가 각광을 받으며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부작용을 치유하려고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방향으로의 편향에 가속도를 붙이며 새로운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부작용을 새로운 부작용으로 상쇄하는 것이다. 폭력의 이미지를 회피하기란 불가능하다.
19세기 생산력 혁명이 20세기의 소비력 혁명으로 이어졌다. 생산의 영웅들은 소비의 영웅들로 대체되었다. 더 화끈하게, 더 폭발적으로 소비하는 인물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화려하고 섹스어필하는 외모로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아이돌들과 인플루언서들이 창출한 부는 생산성의 대리변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과 존엄성, 그리고 그것들이 들러붙어 있는 육체를 철저하게 소비하고 있다. 포털사이트 뉴스 페이지의 첫 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가 순식간에 잊혀져버리는 셀럽들의 비참한 말로는 그 소비의 끝을 보여준다. 일견 행복한 말년을 보여주는 예외적인 사례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타인이 소비하는 방식이 삶의 궤적을 견인하는 인생은 적자로 귀착될 확률이 더 높다.
“생산과 소비는 생산력과 그 통제의 확대재생산이라는 단 하나의 똑같은 거대한 과정이다.”
118P
오늘날 글로벌 경제상황은 뉴노멀(New Normal)로 정의될 정도로 만성화된 저성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성장의 기준은 과거와의 비교일 따름이지 미래와의 비교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기록이 남아 있는) 과거뿐이다. 경제성장이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장밋빛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전망은 1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으나, 여전히 그 이론적 근거가 견고하고 상호텍스트적인 인용을 거듭하고 있다. 사실상 인류 역사에서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고, 그 점에 있어서 비약적인 경제성장은 아무런 죄가 없다. 즉, 성장은 불평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불평등에 의존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승진에 목을 매고 급여를 한 푼이라도 더 주는 직장으로 이직하려고 하는 까닭은 그곳에 상위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 가면 최소한 더 이상 추락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소비사회의 원칙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조응하는 까닭은 상승의 갈망이라기보다는 추락으로부터의 구원을 얻기 위함이다. 소비사회는 계급사회를 견고히 만들고, 모든 사물과 인간을 차이화의 기호로 전환시키며, 모든 노동자로 하여금 계급상승이라는 허황된 마약을 맛보게 한다. 이 지점에서 타고난 결함 또는 구조적 불합리성 탓에 추락한 자들은 존엄할 권리를 부르짖지만, 어떤 권리가 강조되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 권리가 누군가에게서 박탈된 때라는 역사적 사실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소비 자체가 차이화의 과정이기에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며, 돌이킬 수도, 멈출 수도 없다.
“풍부함은 차별과 관련되어 있다. 풍부함이 어떻게 해서 차별의 교정책일 수 있는가?”
91P
한 사람이 어떤 사물을 소유하고자 할 때, 그것이 내면의 본질적이고도 고유한 욕구라는 점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라캉(Jacques-Marie-Emile Lacan)이 밝혔듯,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내면과 세계라는 이분법은 형이상학으로부터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는 케케묵은 논쟁이지만 그 누구도 명쾌한 답을 내어 놓은 적이 없다. 소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로부터 무관한 자아의 본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누구도 세계가 없던 시절의 그 본질을 자각하고 논증할 수는 없다. 소비사회로부터 무관한 자아를 찾기 위해 소위 ‘미개사회’로 들어가 본다고 한들, 더 이상 그런 사회는 지구상에 남아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을 관찰한 자 스스로가 서구사회의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관찰결과도 믿을 수 없다. 소비의 체계는 오로지 그 체계 스스로에게만 충성할 뿐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체계는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만 생산하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의 욕구라는 알리바이 뒤로 더욱더 철저하게 숨어버리는 것이다.”
90P
보르리야르가 소비사회를 비판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이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소비사회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그 열매를 따먹고 자란 우리가 어찌 소비사회와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성을 논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것을 본적도 없고, 심지어 그것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도 않다. 보드리야르 자신도 그 한계를 직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비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근원적 가치와 본성에 대하여 몇 가지 힌트를 유추했다. 그 힌트는 저자 특유의 역발상의 논리로 암시되며, 이 논리들을 진지하게 성찰할 때 우리 생각의 지평도 확장된다.
그렇다면 소비사회로부터 벗어나 소외를 바로잡고,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을 회복할 길은 없나? 보드리야르는 그런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소비사회에서 태어났고, 대안적 구조를 본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8혁명과 같은 변혁이 (이번에는 제대로) 일어나서 총체적으로 뒤엎지 않는 이상, 소비사회 이전의 인간성을 회복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보드리야르의 공헌은 대안을 모색하는데 있지 않았다. 구조를 직시하게 하는 것에서 그의 소명은 끝났다. 두 개의 선택지만 우리에게 남겨 놓은 셈이다. 이 책의 부제에 다시 부부제를 단다면, 이 선택지가 그것이 되어야 한다.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 알고 당할 것인가, 모르고 당할 것인가?」
“소외를 관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소외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외는 악마와의 거래의 구조 그 자체, 상품사회의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323P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소비의 사회’라고 지칭한다. 여타의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탈공업화의 사회’ ‘후기 자본주의 사회’ ‘스펙타클의 사회’ ‘테크놀로지의 사회’ 라고 부르는 것에 반해 저자는 소비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신자본주의의 전개와 더불어 변화하기 시작한 현대인의 일상을 상품의 소비, 공해, 여가, 섹스, 광고, 대중매체 등을 통해 그의 독특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의 독특한 이론적 분석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소쉬르 등의 이론을 선별적으로 흡수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학창시절에 배운 경제학 논리에 따르면 공급과 소비는 필요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보는 소비는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닌, 소비라는 하나의 관념을 취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현대 가정의 필수품인 세탁기와 냉장고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가 가져올 행복, 위세 등을 동반한다고 한다. 현대인은 그 위세와 그 제품이 가지고 있는 관념을 소비한다. 관념이란 그 제품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제품을 소비할 때 그 제품이 가진 사용가치보다 그 제품이 가진 이미지. 즉 관념을 기준으로 제품에 대한 구매를 결정한다. 기능상에 별 차이가 없지만 메이커를 보고 소비를 결정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럴 때 단순한 필요를 위한 소비가 아닌 제품을 대표하는 관념을 취득함으로써 그 제품의 관념이 소비자에게 전해주는 만족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용가치보다는 이미지를 취득하는 것이 현대인의 소비라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최근에 광고도 그런 관념을 증진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대인처럼 스스로의 육체에 관심이 많은 때도 없었다. 스스로 몸매를 관리하고 자신을 꾸미는데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한다. 보드리야르는 그 자체도 “해체된 육체와 분단된 성욕의 수준에서 수익을 올린다고 하는 경제적 과정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사물,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사물, 가장 귀중한 교환 재료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220쪽) ” 즉 자신의 몸을 하나의 관념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교환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단다. 몸을 가꾸는 것은 스스로의 만족이나 자기관리의 측면이 아닌 하나의 객관화된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 볼 때 요즘 젊은이들이 외적인 면에 너무 치중하고, 다이어트가 모든 국민의 하지못한 숙제처럼 남아있는 현실이 그 극단적인 경우일 것이다.
현대인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한가함은 죄악이다. 한가함은 능력없음의 다른 표현이다. “예전에는 ‘한가함’이 오랫동안 부유한 계급의 차이표시 기준이었지만 이제는 쓸데없는 시간의‘소비’가 되었다. (260)” 신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전통적인 시간의 개념도 달라졌다. 시간도 하나의 자본이고, 소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시간은 교환가치를 가진 물건이다. 시간 여유가 있다는 것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자본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것은 그만큼 교환가치를 가진 시간을 이용하여 충분히 자본과 바꿀 능력이 있다는 표현이다. 여기에 여가를 보내는 방법도 자신의 휴식을 위해서가 아닌 남에게 내세우기 위한 관념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며칠 안되는 휴가기관에도 해외로, 해외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회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의 교환대상으로 인지하고, 그 교환대상을 이용하여 소비라는 관념을 취득한다. 사용가치는 의미가 없다. 소비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 지닌 관념을 취득함으로 제품이 가지는 관념을 자신으로 형상화시킨다. 현대인이 명품소비에 열을 올리는 것도 명품을 소유함으로써 그 제품의 관념에 자신을 투영하는 행위의 일환일 뿐이다.
이처럼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의 일상이 된 상품의 소비, 공해, 여가, 섹스, 광고, 대중매체의 이면에 숨겨진 현대인의 심리를 들여다봄으로써 소비의 언설과 반언설을 애기한다. 풍요를 예찬하는 언설의 이면에는 소비사회의 폐해와 이 사회가 추구하는 물질적 만족을 경멸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물에 현혹되어 사물의 형식적 의례 속에 갇혀 본질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사물의 배후에는 텅 빈 인간관계가 있고 엄청난 규모로 동원된 생산력과 그 생산된 제품을 소모하기 위한 엄청난 광고는 이 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힘이 물상화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현대사회의 진짜 모습은 무엇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도구로서가 아니라 기호로써 조작되는 것임을 역설한다.
그러고 보니 현대사회는 모든 것을 존재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관념화 하여 받아들인다. 보드리야르의 시선은 단순히 물상에 있지 않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모든 것이 관념화 되어 있다고 말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대통령들 중 그들의 리더로서의 능력보다는 그들이 가진 관념으로 인식되고, 그 관념이 그들의 능력인양 오해되어 지도자로 선출됐다. 하지만 그 관념의 이면에 자리 잡은 진실한 모습이 보이는 순간 우리가 알던 관념 속에 인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가치가 아닌 관념의 허상화, 그로 인해 가치보다는 관념으로 평가되고 평가받는 사회. 이런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이다. 이런 시선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근원적인 원천이 아닐까. 작가의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다 본 지금의 사회는 마치 멋진 옷으로 한껏 자신을 덮고 있다가, 그 옷을 벗어버린 이면에 알몸으로 서있는 현대인의 추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시선이 부끄러웠다. 아니 어쩌면 내 시선조차도 그 관념의 페르소나에 둘러싸여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럼 그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쉽게도 보드리야르는 문제를 제기할 뿐 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우리들의 숙제인 것처럼.
“소비는 하나의 신화다. 현대사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말하는 방식, 그것이 소비다. 말하자면 소비에 관한 유일한 객관적 현실은 소비라는 관념뿐이다. (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