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9년 1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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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52쪽 | 349g | 148*210*20mm |
ISBN13 | 9788954609173 |
ISBN10 | 8954609171 |
발행일 | 2009년 1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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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52쪽 | 349g | 148*210*20mm |
ISBN13 | 9788954609173 |
ISBN10 | 8954609171 |
위대한 개츠비 해설 ㅣ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곳에 대하여 F. 스콧 피츠제럴드 연보 |
'위대한' 뒤편, '개츠비'라는 인물에 집중하기
몇 해 전 타 출판사의 출간본으로 이 책을 만났었다. 그러나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절반가량 읽다 멈추고 다시는 꺼내 들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제목이 전하는 Great에 큰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었다. 막상 펼쳐 든 소설에서 제목이 왜 위대한 개츠비인지, 그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얼개나 인물 개인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한 마디로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오독을 시작한 거였다. 한참을 잊고 있었던 개츠비를 다시 만난 이유는, 좋아하는 작가의 번역 때문이다. 김영하의 번역을 믿어보자(?)는 마음은 아니었고 그가 번역했다는 그 자체가 이 책을 다시 읽게끔 하는 동기 부여가 돼주었다. 정말 단순한 동기지만, 아무렴 어떤가. 개츠비라는 인물을, 『위대한 개츠비』라는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므로. 원서를 읽어보지도 못했고 타 출판사의 번역본을 다 만나본 것도 아니므로 이 책의 번역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것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느꼈던 좋은 점은 살짝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김영하 작가의 번역 그대로만 평하자면, 첫 번째 이점은 참 쉽게 읽힌다는 거다. 그의 번역 덕에 고전이 주는 중압감을 벗어나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피츠제럴드 본연의 색채는 뚜렷하게 느낄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자리하는 게 사실이다. 아쉬움 뒤의 좋은 점은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김영하의 색채가 덧입혀져서 감각적인 작품 하나가 탄생했다는 데 있다. 이도 어디까지나 김영하의 소설을 즐기는 사람들에 한해서겠지만 말이다.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문체로 탄생한 번역본이기 때문에 화자인 닉을 통해 개츠비의 고뇌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점이 아닌가 한다. 역자도 여느 번역본과 달리 인물 개인에 보다 초점을 맞춰서 번역하려 애썼다고 밝혔듯이 고전이 전하는 시대의 묵직함을 벗어나 소설이 주는 인물을 따라가는 재미에 중점을 두는 독자라면 큰 불만 없이 읽힐 번역본이다. 다짐하건대, 여느 고전 번역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책은 필히 타 번역자의 번역본도 읽어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같은 책, 다른 번역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작품이 위대한 개츠비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워낙에 번역에 대해 말들이 많아서~ 주절거려봤다. 분명히 밝히지만 예전에 내가 이 작품을 읽다가 중단한 이유는 절대 번역(타 출판사)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제목과 함께 '영미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라는 수식어는 독자에게 큰 기대를 품게 한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왜, 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첫 번째 개츠비 읽기에서 실패한 이유도 이와 유사하므로 일단 나는 제목과 엄청난 수식어를 배제하고 작품 자체에만 몰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비슷하게 중단한 부분까지 읽어나갔으나 큰 재미를 못 느꼈다. 하지만 중반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일단 이 소설은 개츠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를 관찰하고 1920년대 시대를 이야기하는 제3의 인물 닉 캐러웨이가 중심적인 인물이다. 닉을 통해 점점 수면 위로 두드러지는 개츠비의 삶, 사랑, 야망, 그 뒤에 본질적인 개츠비를 만나기까지는 조금 지루한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타인의 눈에 비춰지는 개인의 삶은 쉬이 동화되기 어려운 법이다. 객관적 사실(개츠비의 삶)에 주관적 견해(닉이 바라보는 개츠비)가 덧입혀진 상황을 하나씩 곱씹다 보면 어느새 『위대한 개츠비』의 진짜 개츠비를 만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The party is over...
개츠비는 가난한 젊은이에서 단 하나의 꿈 때문에 부정한 방법을 통해 벼락부자가 되는 인물이다. 물론 물질적 성공을 향한 이면에는 그의 쉼없는 노력이 있었고 '부'와 '명예'를 축적하게끔 한 꿈이자 목적이 있었다. 사랑, 그를 성공이라는 정상까지 쉬지 않고 달리게 했던 목적은 바로 사랑이었다. 언제 어느 시대나 인간을 미치게 하는 가장 큰 목적에 사랑이 빠질 수는 없나 보다. 개츠비라는 인물이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회자되나 했더니 결국 사랑이었다. 단지 사랑을 이루려는 꿈을 품고 달려간 남자의 삶에는 사랑만 보일 뿐 그 외에 다른 무엇도 없었다. 흔히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헤어진 남녀 사이에는 애달픔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도 한다. 하지만 개츠비의 사랑은 그런 애달픔과는 거리가 있다.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을 통해 개츠비라는 인물의 삶과 사랑을 통해 넓게는 1차 세계대전 뒤에 미국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부수적으로는 비약적인 발전과 물질주의의 팽배에 맞선 인간의 본질적 위선을 직시하고 있다. 그런 인물로 그려진 이가 개츠비를 위시해 그가 사랑한 상류층 여인 데이지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비극적 애달픔은 없다. 오직 개츠비의 사랑만이 비극적이다. 데이지라는 여인은 사랑보다 물질, 상류층의 삶, 자신의 자리에 더 집착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인임을 누구보다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 여인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인물이 개츠비다. 사랑은 위선으로 덧입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심장이 아닌 머리로 하는 사랑은 위선으로밖에 비칠 수밖에 없다. 언제든 자신의 편의대로 멈출수 있는 게 사랑이라면 이 땅의 수많은 로맨티스트는 모두 위선의 탈을 덮어쓴 거짓말쟁이들이 아닐까. 가난했던 젊은 청년이 5년이라는 지난한 세월, 도약 뒤에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새벽이 다 가도록 조명을 밝히고 파티를 열었던 건 모두 사랑을 얻기 위함이었다. 더는 그 시절에 비루하고 가난했던 젊은이가 아닌 핑크빛 정장으로 성장하고 많은 이들이 몰려드는 파티를 주최하는 부를 거머쥔 개츠비가 되었음을 밤하늘 위에서 빛을 발하는 별들에라도 고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어떤 것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따라오는 법이다. 개츠비의 사랑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이들의 사랑을 개츠비와 데이지가 아닌 개츠비의 사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데이지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개츠비를 기다리지 못하고 신분에 맞춰 결혼했던 그녀의 속물적 모습 때문도 아니고 다시 만난 개츠비에게 거짓 사랑을 속삭이고 그를 헌신짝처럼 방치해서도 아니고 종래에 도덕적 올가미를 개츠비에게 덮어씌워서도 아니다. 그녀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니까 말이다. 인간적 실망은 원래 사소한 것에서 기인하는 게 사실이지만 인간의 속물근성을 가장 바로 볼 수 있는 상황이 사랑이라는 그림자를 통해서가 아닐까 한다. 데이지가 이렇듯 통속적이고 속물적인 인물이었으므로 개츠비의 비극이 덜 비극적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혹자의 눈에는 개츠비의 마지막이 비참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후에 드러나는 개츠비 주변의 상황과 사랑했던 여인의 외면이 그를 "불쌍한 놈"(217쪽)으로 만들었을지언정.
이 작품 속 인물 중 누구 하나도 바르게 살아가는 인물은 드물다.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시대적 과도기에 걸맞게 허영과 오만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차치하고 화자인 닉만이 그럭저럭 반듯한 정신을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 아니 오히려 닉은 동부의 휘황찬란한 밤의 문화에 경멸에 찬 냉소를 보내는 인물이기 때문에 독자인 내 눈에 그리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츠비가 데이지라는 사랑, 꿈을 갖기 위해 롱아일랜드의 웨스트에그에 저택을 사들이고 만 건너 이스트에그에 위치한, 그녀의 보금자리를 아련히 바라보는 장면은 그래서 연민을 독촉한다. 아무리 부를 거머쥐어도 자신의 신분은 웨스트와 이스트라는 경계 안에서 신흥부자인 뉴머니일뿐 태생부터 권위 있고 명망 있는 가문의 올드머니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재확인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종결 후, 더군다나 세계적으로 위상이 드높아진 나라의 삶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물질 만능으로 점철된 온갖 추잡한 현실을 목도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저자인 피츠제럴드의 삶을 보면 그 또한 속물근성에 사로잡힌 현실적 인물이다. 끊임없이 파티를 쫓아다니고 아내의 허영에 발맞추다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개츠비와 닉 모두에게 자신을 투영한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싶다. 닉과 같이 관조적인 인물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사랑을 위해 부를 향해 나아가는 개츠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동일시 말이다. 하지만 흥청망청 즐기는 파티는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다. 파티의 불빛만을 쫓아 개츠비의 저택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한순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현실은 그를 입증한다. 부를 쫓아 사는 삶은 외양, 껍데기만 그럴듯한 채 내면은 텅텅 비어있는 진공 상태의 그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이란 파티에는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빠져버릴지도 모를 연쇄적 구멍이 산재해있음을 우리는 항상 뒤늦게 깨닫게 되지 않던가. 인간이란 물질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물질에 복속되지 않는 삶을 살고싶다. 이들이 밤이 새도록 즐겼던 파티는 끝났지만 대신 새로운 파티가 그들을 아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삶이라는 조명이 꺼지지 않는 파티...
이 파티를 즐기기 위해서는 휘황찬란한 조명도, 음악도, 만찬도, 드레스도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삶을 바로 보는 순간의 '필연성'이 필요할 뿐이다...
요즘 고전들을 하나하나 골라 읽는 재미에 빠져 사는데 그 중 눈에 띈 작품이다. 피츠제럴드의 작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읽을 당시 '위대한 개츠비'는 과연 어떤 작품일까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츠비가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다. 개츠비만큼 이상을 위해 헌식적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메리칸 드림'과 비교되는 그의 '꿈'의 좌절이 매우 안타깝다. 데이지는 왜 그를 다시 만났으며 그를 놓아주지 않은 걸까? 그녀의 태도에 정말 화가 났다. 그리고 개츠비가 열었던 파티에 왔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 그의 친구였던 '울프 샤임'. 그들의 냉랭한 태도또한 정말 화나지 않을 수가 없다. 캐러웨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할지 몰라도 이상주의자인 개츠비가 역시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개츠비는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추앙받을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 사실이 개츠비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한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지금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관심을 끌어 모은 것은 그의 작품이 최근 다시 영화화 되면서부터 인 듯하다. 허기야 개츠비 역으로 나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가진 매력은 어느 여성도 거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조차도 영화 속에서 이스트 에그의 반짝이는 녹색등을 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디키프리오의 뒷모습에 반했었다. 남자가 느끼는 가장 극적인 외로움,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처절하리만치 고통스러운 갈망을 보여주던 그의 뒷모습은 이제껏 어디서도 본적이 없었다. 그 뒷모습 하나로 가슴에 바위덩어리가 쿵하고 내려앉은 것 같이 무거웠다. 끝 간 데 없는 심연의 고독함을 껴안은 슬픔이 가슴으로 전해져와 눈가가 촉촉해졌다. 뒷모습 하나만으로도 그렇듯 가슴을 울리는 그의 연기는 남자인 내가 봐도 더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책으로 보기 전에 먼저 영화로 만났다. 좋은 원작이 영화화 되었을 때 감독이 가장 구현하기 힘든 부분이 원작에 표현된 감성적인 부분들이다.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느끼는 심적인 갈등은 영상으로 아무리 표현하려고 해도 문자가 주는 설득력을 따라올 순 없다. 그래서였던가. 영화를 보고 각인된 그 영상의 이미지에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감성의 골이 머릿속에서 오버랩되어 이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증진시켰다. 책과 영화 속 장면들이 합해져 머릿속에 새로운 작품이 그려진 것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쓰여진 것은 1925년이다. 1920년대는 미국사회의 대 변혁기이다. 1차 세계대전을 기반으로 한 전쟁특수로 미국의 경제는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유럽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미국은 1차 세계대전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여 건국 이래로 최고의 경제성장을 구가하였다. 미국이 지금과 같은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산업화의 지속적인 진행과 대량생산체계로 인해 물자는 차고 넘쳤고, 경제는 호황이었다. 이러한 경제발전의 효과로 미국의 다우지수는 연일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거기에 힘입어 전통 자본가가 아닌 신흥 자본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벤처의 열풍을 등에 업고 신흥 재력가들이 등장하던 우리의 1990년대처럼. 하지만 이렇듯 물자의 풍요로움과 급격한 경제발전은 역설적이게도 청교도적인 근면과 성실 정신에 입각한 미국사회의 근본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변혁기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훼손당하는 인간성의 근본에 대한 물음이 바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갖고 있는 결정적인 매력이다. 어찌 보면 『위대한 개츠비』의 내용은 단순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능력(돈)이 없다는 이유로 잃는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돈을 벌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돈을 벌어 여자 앞에 다시 나타난 개츠비.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한 개츠비는 그녀를 이혼시키고, 그녀와 다시 결합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걸 갖기를 원했다. 가정도, 연인도.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정적인 부도. 개츠비는 그녀를 위해 모든 걸 포기했지만, 그녀는 모든 걸 갖기를 원했다. 실망한 개츠비는 악의적인 오도에 의해 모든 걸 잃는다. 그의 생명까지도. 『위대한 개츠비』의 스토리가 어딘지 낯익지 않은가. 이런 스토리는 요즘도 TV채널을 돌리다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돈이 없어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한 남자가 온갖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돈을 벌어 보란 듯이 여자 앞에 나타나 복수하는 것, 그녀를 다시 차지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이야기, 이게 요즘 흔하디흔한 막장드라마의 대표적인 소재이다. 헌데 이런 막장드라마가 왜 고전이 된 것인가? 고전이란 무엇인가? 시대를 뛰어넘어 어느 시대에 적용해도 그 이야기가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고전으로서 기본 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1920년대에 써진 이 소설 속 얘기는 거의 100년을 뛰어넘은 바로 지금 이시대의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현재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물질문명에 이끌려 끝 간 데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아직도 허상뿐인 삶을 바라보며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내달리는, 갈수록 자본주의의 소비욕망과 그것이 주는 허상에 사로잡혀 어디를 가고 있는지, 무엇을 추종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불나방이다. 스스로가 그 불에 타서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 개츠비와 그녀의 연인 데이지, 그리고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너, 그의 정부 머털도 여기선 예외일수 없다. 머털의 남편인 윌슨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빼앗겼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나약한 서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있는 자들에게 이용당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소설은 극단적인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개츠비가 사는 웨스트 에그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편승에 돈을 번 신흥 자본가들이 사는 지역이다. 톰 뷰캐너가 사는 지역인 이스트 에그는 전통 귀족출신의 구 자본가들이 사는 지역이다. 또한 개츠비와 톰 뷰캐너는 신흥자본가와 구 자본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런 타고난 신분이 주는 한계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구 자본가들은 그들만의 리그에 절대 타인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개츠비의 부를 질타하는 톰 뷰캐너의 대사와 개츠비가 매일처럼 주최하는 화려한 파티에 초대받은 이들이 비록 그 파티는 즐기지만 개츠비에 대해서는 온갖 추문을 만들며 그를 흉본다. 있는 자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원한다. 그건 지금 이 땅의 우리네 모습이다. 있는 자들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자신만의 리그를 펼친다. 결혼도 그들만의 기준으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사람들과 한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의 환상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신분간의 계층을 넘나드는 결혼은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톰 뷰캐너의 정부로 몸을 이용해 신분상승과 자본주의의 단물을 마시고자 했던 머털은 버림받고 죽음을 당한다. 그게 현실이다. 그게 우리네 모습이다. 그리고 톰 뷰캐너는 진실을 왜곡해 윌슨이 개츠비를 살해하게 만든다. 이게 있는 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서민들은 기득권자에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그들을 위해 일한다. 행여나 그들이 흘린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라도 맛보기 싶은 욕망에서다. 개츠비는 이상을 택했지만 데이지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개츠비는 영원을 원했지만 데이지는 순간을 원했다. 개츠비는 모든 것을 원했지만 데이지는 현실의 쾌락만을 원했다. 개츠비에게 있어서 데이지는 그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였고 이상이었다. 삶의 안내자였고 피안의 세계였다. 욕망의 종착역이었다. 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데이지는 안개 낀 바닷길에서 그를 이끌던 등대였지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바다의 요정 세이렌의 노래 소리처럼 그를 파멸로 이끄는 허상이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은 허상일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어쩌면 작가는 우리의 삶이 환상으로 가득 찬 동굴임을 깨닫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동굴 벽에 투시되는 꼭두각시 인형놀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개츠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동굴 바깥의 빛 속으로 나와 허상이 아닌 삶의 진실을 마주하라고. 영화〈매트릭스〉의 레오가 스스로 느끼고 있는 삶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허상의 틀을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그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절대능력을 가진 것처럼. 그 허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어느 것에도 –심지어 중력까지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를 누렸던 것처럼. 마지막 순간, 데이지의 전화를 기다리다 죽음을 맞은 개츠비는 그가 생각하는 데이지가 단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우리가 바라는 이상은 단지 우리가 그려낸 허상이며,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여인도 그의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의 동굴 속에서,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이 그려낸 헛된 자화상이었음을 그는 묵도했을까. 그걸 모르고 맞이한 죽음이 그를 더 행복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가 꿈꾸던 데이지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의 삶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었으리라. 책을 덮으면서 개츠비의 죽음이 주는 슬픔보다 그가 제대로 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떠난 것에 한줄기 위로감이 들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그럼 난?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는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가.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희망하는 그것이, 꿈꾸고 달성하고자 하는 궁극의 그것이 허상인지 아닌지, 실제 삶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인지, 우리는 한번쯤 냉정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죽음에 순간에 다다라 우리가 추구해 오던 그 무엇이 현실이 아니라 허상이었음을, 그저 한바탕 꿈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일까. 삶의 파티가 끝나는 순간, 절정의 순간 맛보았던 쾌락은 추억 속에 남고, 남겨진 것은 술에 취한 몸뚱이와 쾌락의 뒤끝에 절망하고 마는 우리네 육신인 것을. 이 책의 제목처럼 개츠비는 위대한가? 한 여인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지고지순한 그만의 사랑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만 놓고 생각했을때는 그럴수 있다. 한 여인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져진 개츠비는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개츠비가 사랑한 것은 눈앞에 있는 데이지라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 속에 존재하는 허상으로서의 데이지, 녹색등이었다. 우리의 데이지, 그리고 당신의 데이지는 무엇인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듯 가까웠지만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욕망의 극단을 상징하는 녹색등. 만 건너의 녹색등을 보면서 자신을 다잡아가며 모든 것을 걸었던 개츠비의 삶은 허상을 바라보며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목말라하고,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소비논리에 현혹되어 그 화려함을 향해 쉬지 않고 질주하는 폭주기관차 같은 우리네 자화상은 아니었을까?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취해 죽음의 허망함을 향해 배를 몰던 뱃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