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소중하고 영원하며 신성하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는 한 경이로우며 온 세상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다. 누구 안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안에서든 피조물은 고통을 받으며, 누구 안에서든 구세주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다. --- p.8
물씬 그 시절의 향내가 풍겨와 아릿하면서도 기분 좋은 전율에 휩싸인다. 어두운 골목, 환한 집, 탑,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 사람들 얼굴, 쾌적함과 안온함이 은은하게 풍기는 방, 비밀과 유령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꽉 들어찬 방. 따뜻한 좁은 공간, 토끼 새끼와 하녀, 민간요법 약재와 말린 과일. 두 세계는 그곳에서 서로 뒤엉켜 요동쳤다. 두 양극에서 밤과 낮이 나왔다. --- p.11
어쨌든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성서나 다른 이야기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프란츠 크로머를 잊은 적도 없었다. 저녁 내내 몇 시간 동안 나는 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집에 와서 성서에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는지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었다. 여전히 짧고 분명한 이야기였으며, 거기서 특별히 비밀스러운 의미를 찾겠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 p.51
“……그러니까 나는 너를 좋아해. 또는 관심이 있어. 그래서 네 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어. 그러기 위해 이미 첫 단계를 마쳤어. 널 놀라게 만들었는데 잘 놀라는 습성이 있더라고. 즉 네가 두려움을 갖고 있거나 그렇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지. 그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만약 누군가가 두렵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자신을 조종할 힘을 내주었기 때문이야. 가령 어떤 나쁜 짓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안다고 해봐. 그럼 그는 너를 조종할 힘을 갖게 된 거야. 알아들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치?” --- p.62
아, 오늘날에야 나는 안다. 자기 자신을 향한 길을 가는 것만큼 사람들이 세상에서 힘겨워하는 건 없다는 걸 말이다! --- p.75
“그 얘기는 다음번에 더 나누자. 넌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정도보다 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넌 한 번도 네가 생각한 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거야. 그건 좋지 않아. 우리가 삶에서 구현할 수 있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넌 네게 ‘허락된 세계’가 세상의 절반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리고 두 번째 세계를 숨기려 했지. 신부님이나 선생님이 그러듯 말이야. 그게 잘 되진 않을걸! 그 누구도 잘 숨길 순 없을 거야. 일단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면 말이야.” --- p.101
우리는 품질이 미심쩍은 와인을 마시며 두꺼운 잔으로 건배했다. 처음에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새로운 일이었다. 곧 나는 말이 아주 많아졌다. 와인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마치 마음속 창문이 활짝 열려 세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오랫동안 나는 마음에 있는 얘기를 못 했나! 나는 온갖 얘기를 줄줄이 떠들었는데, 하이라이트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였다! --- p.114~115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p.146
그때 나는 특이한 피난처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우연’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우연이란 없다. 뭔가 꼭 필요한 누군가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뭔가를 발견한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그 자신이, 그 자신의 갈망과 필연성이 그를 그리로 이끈 것이다. --- p.156
모든 이에게 진정한 소명은 단 하나,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 소명은 시인으로, 미친 사람으로, 예언자 또는 범죄자로 끝날 수도 있다. 그것은 소명의 소관이 아니었으며 궁극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소명의 과제란 자신만의 운명을 찾는 것이었다. 자기 마음대로인 운명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그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이었다. 오롯이, 부단히 말이다. --- p.205
『데미안』에서 재현되는 전쟁터는 다만 파괴와 살육의 장소만은 아니게 된다. 또한 마냥 새로운 신 아브락사스를 좇는 장소도 아니다. 낡은 것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으며 열광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 새로운 신 아브락사스는 이미 싱클레어의 성숙한 내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 p.273~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