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이양선은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와서 정박했고 광성진에 와 닿자마자 모두 닻을 내리고 광성진의 성을 향하여 대포를 마구 쏘아댔다. 조선군도 크고 작은 모든 대포를 일제히 쏘았다. 이 교전으로 조선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양선들은 다시 호도 앞바다에 가서 닻을 내렸다. (72p)
영토의 일부를 외적에 빼앗긴 다음 날 조정에서 고종과 우의정 홍순목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양이들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매우 통분할 노릇이다.”
“이 오랑캐들은 원래 사나운 만큼 그 수효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세는 미칠 듯 날뛰며 계속 불리한 형편에 처한 보고만 오니 더욱 통분합니다.”
“이 오랑캐들이 화친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예의의 나라로 이름난 우리가 어찌 금수 같은 놈들과 화친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몇 해 동안 서로 버티더라도 단연 거절하고야 말 것이다. 만일 화친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를 팔아먹은 율을 시행하라.” (74-75p)
최익현은 이 모든 이유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이라 주장하며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하며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라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이 가져간 도끼로 죽음을 내려달라고 하였다. (110p)
너희는 각기 두려움 없이 편안히 지내면서 선비들은 부지런히 공부하고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를 지으며, 다시는 ‘양(洋)’이니 ‘왜(倭)’니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소란하게 하지 말라. 각 항구와 가까운 곳에서는 비록 외국인이 한가로이 다니는 경우가 있더라도 마땅히 일상적인 일로 보아 넘기고 먼저 시비 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저들이 능멸하거나 학대하는 일이 있다면 응당 조약에 따라 처벌하여 결단코 우리 백성들을 억누르고 외국인을 보호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다. … 이미 서양과 수호를 맺은 이상 서울과 지방에 세워놓은 척양에 관한 비문들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 (136-137p)
고종 33년(1896)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대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에 이어하였다. 이 날 임금은 “8월의 변고(을미사변)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가 붕서하였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쩌다가 다행히 천벌이 내려 우두머리가 처단당한 결과 나라의 예법이 겨우 거행되고 나라의 체면이 조금 서게 되었다.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 사나운 돼지가 날치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게 된다는 경계를 갑절 더해야 할 것이다. 모든 신하와 백성은 이 명령 내용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을미년(1895) 8월 22일과 10월 10일의 조칙(민씨의 폐서인과 위호 회복 관련)은 모두 역적 무리가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237-238p)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에 고유제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와 사직의 신위판을 태사와 태직으로 고쳐 썼다. (258p)
고종 36년(1899) 5월 27일 임금은 “전차를 운행할 때 백성들 중 사상자가 많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내부에서 낱낱이 찾아내어 구휼금을 넉넉히 지급함으로써 조정에서 근심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라고 조령을 내렸다. 또 의정부에서는 전차를 운전할 때 반드시 사람들이 철길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살펴서, 다시는 차에 치어 다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해당 부서에 경계하였다. 이달 17일 한성전기회사에서 전차 개통식을 하고 운행을 시작하였는데, 26일 전차가 종로 거리를 질주할 때 다섯 살 난 아이가 치어 죽었다. 이에 여러 사람이 격노하여 차체를 파괴하고 기름을 뿌려 불태워버렸다. 또 전차가 전복되어 죽거나 다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런 사건 때문에 내려진 조령이다. (287-288p)
고종 41년(1904)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고종 37년(1900) 북청사변 후 러시아는 만주 일대에 군사를 체류시킨 채 기한이 되도록 철수하지 않았다. 일본·영국 양국 동맹과 미국이 항의하였지만 러시아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종 40년(1903) 4월에 이르러 군사를 출동시켜 멋대로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존망이 자신들의 안위와 관계된다고 여겨 몇 달을 절충하였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도리어 군사 장비를 늘리자, 고종 41년(1904) 2월 6일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9일 일본 함대가 러시아함을 공격하여 인천에서 두 척을 격파하자 러시아함은 퇴각하다가 인천항에서 자폭 침몰하였다.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일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나 러시아로 귀국하였다. 이에 이르러 국면이 크게 변하여 한일의정서를 다음과 같이 체결하게 된 것이다. (300-301p)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적이 어찌 누구나가 다 처단할 수 있는 역적이 아니겠으며 다섯 대의 수레에 몸을 찢어 돌린들 어찌 그 죄를 다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법이 시행되지 않고 권세가 서지 않으면 아무리 임금의 자리라 하더라도 죽은 것과 같고 종묘와 사직이 옮겨지지 않았더라도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미 다른 나라 사람이 통감부를 만들어서 군신과 백성들이 몽땅 사로잡혀 도마 위의 물고기 신세가 되는 참상을 당하게 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런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327p)
12월 1일에는 특진관 조병세가 한일조약에 분개해서 약을 먹고 죽었다. 고종 황제는 “… 짐은 큰집을 버텨주는 기둥과 대들보처럼 의지했었고 이 어려운 때에 직면하여서는 더욱 마음을 의탁했었는데 갑자기 이처럼 부고가 이르렀다. 굳은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정은 후세에 빛날 것이지만 짐의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라며 앞의 두 대신과 마찬가지로 후히 장례를 치러주도록 하는 조령을 내렸다. (333p)
아! 여러 역적을 처단하지 않고 강제로 체결된 조약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5백 년 종묘사직은 지금 멸망할 것이고 삼천리 강토는 오늘 없어질 것이며, 수백만 백성은 지금 멸망할 것이고 5천 년을 내려오던 도맥이 오늘 끊어질 것이니, 신이 오늘날 산다 한들 무엇하겠습니까? (352p)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