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모든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인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읽는다
현대화와 세계화가 환경·풍경·기후·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차이점 또한 자꾸 없애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잡한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언어·관습·음악·이야기 등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만들어주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것이 아직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석기시대부터 지구촌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모든 역사가 아직도 활발히 살아 숨쉬는 곳은 지구상에 인도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다._7~8쪽
-M130 유전자와 ‘어머니 인도’
마두라이 대학교의 유전학 교수인 (……) 피차판 교수는 이곳의 칼라르부족을 연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의 미토콘드리아 DNA와 Y염색체에서 인도의 가장 오래된 조상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피차판 교수의 연구팀은 우연히 비루만디라는 남자의 유전자를 검사하다가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현생인류가 갖고 있던 M130 유전자가 그에게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놀랍게도 비루만디의 마을 사람이 모두 M130 유전자를 갖고 있음이 밝혀졌다. 고립된 생활, 카스트제도의 구속, 족내혼이 유전자를 보존해준 덕분이었다. (……)
“(……) 물론 언어와 종족이 같은 건 아닙니다. 종족이 달라도 언어를 배워서 쓰기는 쉬우니까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습, 친족관계 등과 비교하면 종교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냥 신앙 체계에 지나지 않아요. 각자 자신이 속한 체제든 신이든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대상을 믿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그 때문에 인도가 인류의 다양성이 전부 모여 있는 소우주이면서도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피차판 교수는 심지어 그 최초의 떠돌이가 우리 모두의 유전적 기반이 되었다고까지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전 세계인이 여기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아담이 아프리카에서 왔다면, 이브는 인도에서 온 셈이죠.” 과연, 그래서 어머니 인도라고 하는 모양이다!_22~23쪽
-인더스 문명은 왜 붕괴했을까?
인더스 문명은 700년 동안 안정을 누리는 듯이 보이다가 기원전 1800년경에 붕괴했다. 도시에도 인적이 끊겼다. 인더스 문명이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커다란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멸망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 지금까지 여러 주장이 나왔다. 앞으로 보겠지만, 그중에는 외부 침략설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기후변화를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 전문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_54쪽
-산스크리트어는 어디서 생겨났는가
[산스크리트어가] 언어학적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물론이고 현대 서구 언어와 아주 흡사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는 pater인데, 산스크리트어로는 pitar다. ‘어머니’ 역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는 meter, 산스크리트어로는 matar다. 특히 ‘말(馬)’을 뜻하는 단어(산스크리트어로 asva)가 멀고 먼 발트해 바닷가의 리투아니아에서도 똑같이 쓰인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걸까? (……)
산스크리트어는 그 기원이 무엇이든 놀라운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스어보다 완벽하고, 라틴어보다 어휘가 풍부하며, 이 두 언어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으면서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이 두 언어와 매우 유사하다. 동사의 어근과 문법 면에서 모두 그렇다. 어찌나 유사한지, 어떤 학자든 이 세 언어를 조사하고 나면 그들이 같은 원천에서 생겨났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원천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
(……) 인도가 산스크리트어의 모국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이 언어가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믿게 되었다. 산스크리트어가 인도의 토착 언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바탕으로 19세기에 아리아인 도래설이 등장했다. 아리아인이라는 단어는 초창기에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 즉 『리그 베다』 시대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 시작했다. ‘고귀한 사람들’을 뜻하는 이 단어는 에이레나 이란 같은 이름과 언어학적인 뿌리가 같다. 이 이름들은 모두 ‘아리아인의 땅’을 뜻한다. 하지만 아리아인의 정체는 인도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97년 이후에는 힌두 민족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는 사태가 벌어졌다.
인도의 많은 학자와 논객은 아리아인이 인도의 토착 민족이며,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이 인도에서 유럽을 향해 서쪽으로 전파되었다는 예전 주장으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인과 산스크리트어의 문명이며, 아리아인이 지은 최초의 문헌이자 가장 신성한 문헌인 『리그 베다』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지만, 실력 있는 언어학자들이 한결같이 동의하는 점이 하나 있다. (……) 즉 문제의 언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도유럽어족의 ‘가계도’가 시간적으로 워낙 먼 과거까지 뻗어 있기 때문에 이 언어가 인도에서 기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산스크리트어는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생겨났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산스크리트어의 역사는 과연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 그리고 최초의 발상지는 어디일까? 이 언어가 인도에 전파된 것은 침략자나 여행자를 통해서였을까? 아니면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이것이 현재 인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 주제 중 하나다._61~63쪽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리그 베다』
“『리그 베다』는 약 1,000편의 찬가로 구성되어 있어요. 방랑 사제들이 신과 왕을 칭송하기 위해 부른 노래들이죠. 왕은 전차나 수레를 타고, 전투를 하고, 요새를 함락시키고, 신성한 ‘소마’를 마셔요. 소마는 신들이 마시는 음료라고 해요. 신은 대체로 오늘날의 신들과 달라요. 그들은 비·바람·불·천둥 같은 자연의 힘을 상징하죠. 그리스의 신과 아주 비슷해요. (……) 브라만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졌고, 지금도 그렇게 전해지고 있어요. 2,000년이 넘도록 이 시들은 구전으로 내려왔습니다. 야자수 이파리에 이 시들을 쓴 최초의 문헌이 만들어진 건 아마 중세에 들어와서였을 거예요. 나중에는 이 원고처럼 종이에 문헌이 만들어졌죠. 기적 같은 일 아닌가요?”
(……) 하지만 『리그 베다』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수수께끼처럼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지극히 고풍스러운 언어로 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유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연대를 정확히 알아내기는 불가능하지만, 1920년대에 대단히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북부 시리아의 미타니 왕국이 맺은 조약---기원전 1380년경으로 연대가 밝혀져 있다---에 열거된 통치자의 이름을 산스크리트어로 읽어도 완벽하게 해독할 수 있음을 학자들이 알아낸 것이다. (……)
전차와 말 조련에 관한, 미타니의 또 다른 문서는 미타니 통치자들이 사용하던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숫자와 기술적인 용어가 산스크리트어와 워낙 흡사해서 미타니와 아리아인의 언어가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미타니의 통치자는 십중팔구 기원전 1700년경에 시리아 북부에 나타나 지금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다스린 엘리트 전사였을 것이다. 이들이 남긴 문헌은 초기 『리그 베다』 찬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기원전 1400년경을 기점으로 그다지 오래지 않은 과거에 이 시들이 지어졌다는 얘기다.
다른 단서들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리그 베다』의 찬가는 청동기를 사용하는 세계를 묘사한다(인도에 철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기원전 1200년경). 이 시의 저자들은 모헨조다로 같은 위대한 도시들을 모르는 듯하다. 이들이 아는 것은 ‘불의 신 아그니에게 쫓겨’ 사람들이 달아나버린 폐허뿐이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면, 『리그 베다』에 수록된 많은 찬가는 인더스 문명 이후에 지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그 베다』의 찬가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좀 더 일찍부터 몇 세기 동안 널리 퍼져나갔을 가능성이 있다._65~67쪽
-도덕적 통치자… 아소카
마우리아 제국은 아소카가 죽은 뒤[기원전 233] 그리 오랫동안 살아남지 못했다. 이 제국의 종말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지만, 인도 북서부와 박트리아의 그리스 왕국들이 다시 살아나면서 마우리아 왕조를 압도해버렸음이 분명하다. (……)
하지만 아소카는 생각의 힘이 현실 속에서 작용하는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역사 속의 위대한 순간을 창조했다.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의 미래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갠지스평원에서 인도의 왕을 자처했던 통치자. 생각을 통해 정치의 도덕적 측면을 규정했던 통치자.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사상을 현재와 연관시키지 않은 채 순수하게 그 사상에만 감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소카의 법은 비록 불완전하게 시행되었다 하더라도 역사상 위대한 사상 중 하나였다. 「미국 독립선언서」나 『공산당선언』처럼 말이다.
아소카의 「칙령」은 지상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삶에 관해 가장 중요한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설득해서 선을 행하게 할 수 있는가? 아소카의 「칙령」은 생각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장을 가로지른 번개와 같다._156~157쪽
-문명 접촉의 매개체…후추
무역은 문명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문명은 무역을 통해 서로 접촉해서 자신의 사상을 남에게 전파하기도 하고 남의 사상을 시험해보기도 하면서 성장한다. 식민지 시대의 글과 역사 문헌 때문에 우리는 대개 인도에 대해 과거에 붙들려 시간이 멈춰버린 문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인도 문명은 지금까지 계속 다른 문명과 대화를 나누며 성장하고 변화해왔다. 인도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은 위대한 토박이 왕조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외국인 통치자도 만들어냈다. 그리고 외부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도인에게 항상 삶의 일부였다. 인도는 다른 문명과의 대화를 통해 수많은 위대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대화가 처음 시작된 것은 인도의 배가 걸프 지역과 교역에 나선 하라파 시대부터였다. 페르시아 제국과의 접촉은 기원전 500년부터 점점 더 빈번해졌지만, 지중해와 인도 반도 사이에 통상적인 뱃길이 열린 것은 기원전 마지막 몇백 년 동안의 일이었다.
지중해까지 향신료 무역로가 열리면서 로마와 인도 남부 여러 왕국 사이의 접촉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발달은 중국·유럽·인도 사이의 접촉을 더욱 넓혀주었다. (……)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이때가 세계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보았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이처럼 여러 문명이 서로 접촉하는 데 가장 커다란 동기를 제공한 것은 어떤 잡초의 열매, 즉 후추였다._162~163쪽
-통합과 다양성: 어떤 종교를 믿든 모두 인도인
“인도는 당신들이 우리를 부르는 이름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세요.” 언론인인 내 친구 라비가 (……) 말한다. 활기차고 유쾌한 표정이다. (……)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바라트(Bharat)입니다. 인도와는 아주 의미가 다른 단어죠. 인도에서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릅니다. 하지만 바라트의 시간은 둥근 원이고 신화적이에요. 이 두 가지 시간은 두 가지 사고방식을 상징합니다. 인도 사람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이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갑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수천 년 전부터 우리 역사의 일부였으니까요. 우리의 다양한 정체성은 고대와 현대에 모두 완벽하게 어울립니다. 핵물리학자가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샤 신을 섬겨도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 우린 우리 문화를 편안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도는 현대에 구축된 개념입니다. 원래 영국이 창조한 것이지만, 독립운동을 거치면서 정치적인 실체가 됐죠. 기본적으로 인도는 소수의 저명한 민족주의자들, 특히 모더니즘과 합리주의의 산물인 네루 같은 사람들이 꿈꾼 환상적이고, 대단히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이었습니다. 네루는 동서의 장엄한 융합을 인도의 미래로 보았습니다. 수천 년 동안 축적돼서 기억 속에 암호처럼 박힌 고대의 맹세들을 초월하고 싶어했죠. 그가 보기에 과거는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무지·미신·카스트제도·불가촉천민은 모두 지독한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었죠. 네루는 민주주의와 세속주의가 과거의 무게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여러 종파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나라가 분할됐어도 현실은 네루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세속주의가 새로운 충성심을 만들어낸 겁니다. 종교가 워낙 많고 신도 3,300만 명이나 되는 이 나라에서 세속주의는 인권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사실 종교가 곧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존재여야 할까요? 1991년에 실시된 인구조사에서 우리는 사상 처음으로 종교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어요. 힌두교도·이슬람교도·기독교인·자이나교도·파르시를 막론하고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어요. 어떤 종교를 믿든 인도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라면 인도인이라는 겁니다._398~400쪽
-맺는 말: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다
인도 역사는 믿기 힘든 드라마·위대한 발명·보기 드문 창의성·위대한 사상의 이야기다. 인도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힌두교 『경전』의 표현처럼 세속적인 부·미덕·사랑을 획득하기 위해 불완전하나마 노력을 기울이는 인류의 이야기를 보는 것과 같다. 만약 행운이 따른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뾰족탑 꼭대기에서 석양을 바라보니 점점 어두워지는 산의 옆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찌는 듯이 무덥던 1857년 여름, 이 도시에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러 온 영국군이 거쳐간 곳이다. 동쪽으로는 독립선언이 이루어진 붉은 요새가 마지막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발밑에서는 금요일 기도를 마친 사람들이 대규모 쇼핑가인 찬드니 초크에서 물결처럼 움직이고 있다.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인도아륙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언어와 혈통이 가장 풍요롭고 복잡한 곳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시대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는 미래를 눈앞에 둔 지금,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이렇게 뚜렷이 볼 수 있는 곳이 달리 또 어디 있을까._402~404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