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다가 취해서 밧줄 위를 걷는 사람처럼 두 팔을 벌리고서 난간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바람이 불어와 뻗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가장 힘든 시기였고, 가끔 난간의 시작부터 끝까지 걸어가보기도 했다. 그러다 반대편에 다다르면 밤하늘을 향해 웃어 보였다.
‘보여요? 나 여기 이 끝에서도 살아 있어요. 당신이 말한 대로 살고 있어요!’
나와 도시의 스카이라인, 어둠의 위로와 익명성, 그리고 이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덕분에 여기 올라오는 것은 나만의 비밀 습관이 됐다. 나는 고개를 들고 밤바람을 느끼며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병이 깨지는 소리, 도시로 들어가는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 마치 혈액이 공급되듯 끊임없이 도시로 흘러들어가는 자동차의 붉은 미등을 바라보았다. 술꾼들이 침대에 쓰러지고, 레스토랑의 셰프들이 작업복을 벗고, 펍이 문을 닫는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가 돼야 거리는 비교적 고요해진다. 야간에 돌아다니는 대형 트럭이나 거리에 들어서 있는 유태인 빵집이 문 여는 소리, 신문을 툭툭 던지는 신문 배달 트럭 소리에 그 시간의 적막도 간간이 방해를 받긴 했지만. 더 이상 깊이 잠들지 못하는 나는 도시의 아주 작은 움직임도 잘 알고 있다. --- p.14
고향의 활기찬 거리가 이제 낯설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작고 낡고 사소해 보였다. 나는 멀찍이서 분석하는 시선으로 고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윌이 사고를 당한 뒤 처음 고향에 돌아와서 이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우리 집이 있는 거리로 접어들자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이웃들과 예의를 차리는 대화를 하는 것도, 내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싫었다. 내가 한 일에 대해 비판 받고 싶지 않았다.
“괜찮니?” 내 머릿속을 짐작하는 것처럼 아빠가 물었다.
“네.”
“착하구나.” 아빠가 내 어깨를 잠시 잡아줬다.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엄마가 벌써 나와 있었다. 아빠는 가방 하나를 계단에 올려놓고 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며 다른 가방을 어깨에 멨다.
보도의 돌 위를 지팡이로 조심스레 짚고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등 뒤의 커튼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어머, 누가 왔는지 봐. 이젠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내 발이 갑자기 튀어 나가 어디론가 가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살피면서 나를 부축했다.
“괜찮니? 자, 서두르지 말고.” 아빠는 계속 물었다. 체크 셔츠와 파란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가 복도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벽지도 똑같다. 복도의 카펫도 똑같았다. 심지어 엄마가 아침에 청소기를 돌리면서 만들었을 자국도 여전했다. 옷걸이에는 내 낡은 점퍼가 걸려 있었다. 18개월 만이었지만, 10년 만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서두르지 마. 당신, 너무 빨리 걷잖아.” 엄마가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뛰는 것도 아닌데. 이보다 더 늦게 걷다가는 뒤로 가고 있을걸.”
“계단 조심해. 계단을 올라올 때는 애 뒤에 서야지. 뒤로 넘어질 수도 있잖아?”
“계단은 나도 알아요. 여기서 26년을 살았거든요.” 나는 이를 앙다물고 말했다.
“거기 발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 여보. 애가 반대쪽 골반도 부수면 어떡해.”
‘아, 제발. 윌, 당신도 이랬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 p.32~33
돌이켜보면 윌이 죽은 뒤 9개월 동안은 마치 안갯속을 헤맨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파리로 갔고, 자유와 윌이 일깨워준 욕구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엉망인 프랑스어가 상관없는, 외국인들이 모이는 바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일은 점점 능숙해졌다. 16구역의 중동 식당이 있는 건물 옥탑방을 하나 빌렸고, 밤늦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과 아침 일찍 배달하러 다니는 사람들 소리를 들으며 날마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다.
그 시절, 마치 나는 피부를 한 겹 잃어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웃거나 울었고, 원래 있던 필터가 사라진 것처럼 모든 것을 다시 보았다. 새로운 음식을 먹었고, 낯선 거리를 걸었으며, 내 것이 아닌 언어로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가끔은 마치 그 모든 것을 그의 눈으로 보는 듯했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저건 어떻게 생각해요, 클라크?’
‘당신이 이걸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요.’
‘먹어요! 시도해봐요! 어서!’
우리가 날마다 따르던 일과가 사라지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몇 주가 지나서야 겨우 그의 몸을 날마다 만질 수 없어도 손이 쓸모없이 느껴지지 않게 됐다. 단추를 채워주던 부드러운 셔츠, 가만히 씻어주던 따뜻한 손, 아직도 손끝에 감촉이 느껴질 것 같은 매끄러운 머리카락, 그의 목소리, 갑자기 터뜨리던 그의 드문 웃음, 내 손가락에 닿는 그의 입술, 잠들기 직전 그의 눈꺼풀이 내려앉던 모습이 그리웠다. 내가 한 일에 아직도 경악하고 있는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만, 그런 일을 저지른 루이자를 자기가 키운 딸이라고 여길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사랑한 남자와 가족을 동시에 잃어버리고 내 존재와 연결된 모든 것을 상실했다. 연결된 것 하나 없이 미지의 우주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 p.36~37
나는 윌의 이름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의 가족 관계 이야기, 30년 동안의 결혼생활 이야기, 함께 살며 아이들을 키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난 마치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 나는 6개월 동안 간병인 노릇을 했다. 윌을 사랑했고, 윌이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 6개월 동안 윌과 내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상대방의 짧은 농담과 직설적인 진실과 쓰라린 비밀을 이해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 내가 모든 것에 대해 느끼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가 내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아서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그런 생각이 드는데, 슬픔을 내내 다시 살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상처를 자꾸 뜯어서 낫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어떤 일에 가담했는지 알고 있었다. 내 역할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을 자꾸자꾸 곱씹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p.71~72
“당신이 이야기할 때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대화가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루이자 클라크.”
나도 재치 있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옳았고,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이랑 나, 우리 모두 뭔가 피하고 있어요.”
“굉장히 직설적이네요.”
“이제 나 때문에 불편해졌군요.”
“아뇨.” 그를 쳐다보았다. “음, 약간은 그럴지도 몰라요.”
뒤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이며 하늘로 요란하게 날아올랐다.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대신 마지막 남은 맥주를 마셨다.
“좋아요. 네,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죽은 사람을 잊는 데 얼마나 걸리는 것 같아요? 정말로 사랑한 사람 말이에요.”
왜 그에게 물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상황에 미루어 잔인할 정도로 무감각한 질문이었다. 어쩌면 그가 충동적으로 섹스를 할 기세라서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와, 음…….” 그는 자기 머그를 내려다보더니 어두워진 들판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르겠는데요.”
“그거 기쁘네요.”
“아뇨, 정말요.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이미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게 돼요. 살아 있지 않더라도, 더는 숨 쉬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계속 곁에 있으니까요. 처음에 느낀 것처럼 극심한 슬픔은 아니지만요. 압도될 것 같고, 아무 데서나 울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는데 아직 살아 있는 멍청이들을 보면 미친 듯이 화가 나는 것도 아니죠. 그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돼요. 구멍 주위에서 적응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글쎄요. 마치…… 빵 대신 도넛이 되는 그런 것이에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슬퍼 보여서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도넛이오?”
“멍청한 비유죠.” 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p.184~185
나는 미처 생각도 하기 전에 작은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손을 뻗어 샘의 머리를 잡고서 키스했다. 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앞으로 다가와 키스를 받아주었다. 그러다 누군가 와인 잔을 쓰러뜨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영원히 그와 키스하고 싶었다. 이것이 무엇이며, 무슨 의미인지, 앞으로 얼마나 일이 복잡해질지, 이런 생각은 모두 막아버렸다. ‘자, 어서. 인생을 살아.’ 나 자신에게 말했다. 온몸에서 이성이 흘러나가고 맥박만 남았다. 나는 샘에게 하고 싶은 것만을 바라는 존재가 됐다. --- p.233
그가 고개를 돌린다. 내 입술 바로 앞에 그의 입술이 다가온다. 따뜻하고 달콤한 숨결. “보고 싶었어요, 루이자 클라크.”
그러자 그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다고. 그를 원하지만 그를 원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나의 행복을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하는 것,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운에 기대는 것이 싫다.
나의 표정을 읽은 그가 말한다. “생각 그만해요.”
그가 나를 끌어안자 긴장이 풀린다. 이 남자는 날마다 생과 사의 다리 위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는 날 이해한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그의 손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보고,
그의 손바닥에 내 입술을 댔다. “그럼 그냥 살아요?” 내가 속삭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천천히, 오랫동안 달콤하게 키스했다. 내 몸이 휘어지며, 온통 바라고 원하고 열망할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내 귓전에 낮게 울렸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끌어들였다.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은 뭔가 소중한 것처럼 느껴졌다. --- p.314
갑자기 잘 닦은 안경을 쓴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면 거의 모두가 잃어버린 것이든 빼앗긴 것이든 그저 무덤으로 사라진 것이든, 사랑의 무자비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윌이 우리 모두에게 그런 상처를 남겼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살기를 거부함으로써 상처를 남겼다.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지만, 그 세상에 남아줄 만큼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던 남자를 나는 사랑했다.
--- p.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