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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초상화를 통해서 본 쇼팽
2장 쇼팽의 손 3장 교육자 쇼팽 4장 쇼팽의 작품 5장 쇼팽이 프랑스에 진 빚 6장 쇼팽의 연주 무대 7장 쇼팽의 성격 옮긴이의 말 프레데리크 쇼팽 연보 찾아보기 |
알프레드 코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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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셸레스가 한 말이 간결하긴 해도 야상곡의 시인을 묘사한 수많은 표현 가운데 가장 예리하고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쇼팽은 어떻게 생겼나요?” “자기 음악처럼 생겼습니다.” --- p.19
나는 오랫동안 부단한 노력을 치르고서야 조각가 보비가 제작한 리스트 메달과 쇼팽 메달을 1837년에 나의 소장품에 추가할 수 있었다. 리스트 메달은 피사의 골동품 상점에서 관심도 없는 고철더미를 뒤져서 찾아낸 것으로 몇 리라밖에 들지 않았다. 쇼팽 메달은 파리에서 치열한 경매를 거쳐 손에 넣었다.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입찰자들의 신경전, 그 기세와 고집이 여간 아니었다. --- p.29 내가 보기에 크비아트코프스키가 1849년 10월 16일에서 17일로 넘어가는 밤에 쇼팽의 임종을 지키면서 그린 연필화 두 점은 그레플이 동일한 상황에서 남긴 글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이 그림들과 몇 편의 육필원고, 10여 통의 편지, 피아노 교수법 초안, 애달픈 머리칼 한 움큼―생명이 증발하듯 말라갔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흡사 병든 아이의 머리칼처럼 가늘고 힘없는 머리칼―으로 내가 소장한 쇼팽 유품은 완벽한 일습을 이루었다. 이 유품들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예술에 대한 숭배는 나를 결코 실망시킨 적이 없다. --- p.33 쇼팽은 그렇게까지 애를 먹지 않고도 놀라운 기교를 습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헬러는 쇼팽이 피아니스트치고는 손이 작은 편이었는데도 건반의 3분의 1을 한꺼번에 장악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쇼팽의 추종자가 한 말이니 과장이 다소 섞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쇼팽의 연주에 혀를 내두르며 “이 사람에게는 뱀의 손이 달렸구려!”라고 감탄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그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 p.40 쇼팽은 조르주 마티아스에게 베버의 「소나타 2번 A플랫 장조」 첫 악장을 칠 때는 군데군데서 “하늘을 날아가는 천사”를 상상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 소나타는 쇼팽이 특히 좋아했던 작품이다. 그는 또 연주자의 느낌과는 상반되지만 설득력 있는 감정을 전하는 연주가 있다고 말했다. “나라면 그렇게 연주하지 않겠지만 네 연주가 더 나을 거야.” 쇼팽은 제자들이 연주에 ‘혼을 다 쏟는’ 것을 중시했다. 한번은 이런 말을 의미심장하게 하기도 했다. “생각이 깔려 있지 않은 음악은 진정한 음악이 아니지.” --- p.51 그가 애국자의 영혼과 음악가의 감성으로 폴란드 민속 리듬에 부여했던 의미와 관련해서는 다음 대목을 주목할 만하다. 이 대목은 그가 바르샤바 음악 애호가 무리를 사로잡은 경박한 정신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는 증거다. 그는 이 편지를 끝맺으면서 가족들에게 말한다. “저의 마주르카들을 보내지는 않겠습니다. 아직 그 곡들을 베껴놓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그 마주르카들은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 아닙니다.”(이 마주르카들은 아마도 폰타나가 쇼팽 사후에 작품 68로 분류한 마주르카의 일부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50여 편의 걸작에 깃든 감성을 민족적 영광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의 박해받는 조국을 일시적으로 지배했던 차르는 이 작품들이 애국심에 불러일으킬 반향을 우려하여 폴란드 영토 전역에서 아예 금지시킬 생각까지 했다. 슈만은 나중에 마주르카를 “꽃무더기에 숨겨진 총”이라고 말할 것이다. --- pp.96-97 쇼팽의 천성은 모든 면에서 자연의 개화와 악상의 개화가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창조적 정신이 사철의 변화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것 같다고 할까. 희한하게도 기침이 잦아들고 숨쉬기가 편한 계절에는 곡 작업이 훨씬 순탄했다. 계절이라는 상징은 그의 재능과 아주 잘 들어맞는다. 실제로 쇼팽의 영감은 계절의 쇄신, 잘 영근 수확물, 만발하는 꽃, 사랑을 부르짖는 밤꾀꼬리의 울음과 보조를 맞추었으니까. 우리는 이 자연적인 본능을 허약한 음악가의 몇 가지 신체 현상, 몇 가지 물질적 조건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특징들은 일견 음악 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고인 물이 햇살의 온기를 머금듯 표 안 나게 음악에 배어든다. “반영들의 반영.” 쇼팽이 들라크루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 pp.117-118 쇼팽을 좋아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은 걸 보면, 그는 이해받지 못한 게 아니다. 쇼팽 작품을 제대로 해석할 단서, 작품에 깃든 영감의 기원을 알고 싶었던 혹자는 실망하겠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정신과 감정의 뚜렷한 반응들로 가득 찬 이데올로기적 질문을 작품에 던지기보다는 쇼팽이 야상곡 중 하나에 ‘「햄릿Hamlet」의 상연 후에’라는 제사를 붙이려다가 그 문구를 지우고 뭐라고 썼던가를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아니, 그들 스스로 생각해보게 하는 편이 낫다.” 그들 스스로, 다시 말해 청중 스스로, 연주자 스스로 말이다. --- p.121 쇼팽이 자주 접촉했던 사교계 인사들은 대부분 폴란드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으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조국애를 토로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폴란드에 적대적이거나 아무 관심이 없는 분위기 속에 고립된 기분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출생, 연애, 조국애라는 기본적인 세 가지 조건으로 그의 운명과 맺어졌다. 쇼팽은 이 신비한 영향에 지울 수 없는 인장을 찍기라도 하듯 이미 다 죽어가면서도 영국에서 프랑스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한 육체적 껍데기를 뉘일 곳으로 특별히 이 나라를 선택했고, 프랑스의 한 뙈기 땅은 그를 한 인간이자 천재 음악가로서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경배를 바치는 추모의 공간이 되었다. --- pp.128-129 훗날, 좀 더 연륜이 쌓이고 비평이 예술가로서의 위상에 타격을 입히지 못할 만큼 명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와중에도 쇼팽은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두려워진다고 리스트에게 고백한다. “나는 연주회에 적합한 사람이 못 된다네. 청중이 위협적으로 느껴지거든. 그들의 숨결에 질식할 것 같고,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경직되고, 그 낯선 얼굴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그러고는 빼어난 라이벌의 남다른 신체 조건에 대해서 반쯤은 농을 치듯, 반쯤은 씁쓸해하듯 말한다. “그렇지만 자네는 다르지. 자네는 연주회 체질이야. 자네는 청중을 사로잡지 못할 때조차도 그들을 꼼짝 못 하게 압도할 만해.” --- p.146 이러한 격찬을 멘델스존이 그 무렵에 쇼팽의 연주를 보고서 피력했던 견해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멘델스존은 아헨에서 쇼팽이 힐러와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고, 자기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재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최고는 쇼팽입니다. 그의 연주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때와도 같은 충격을 줍니다. 힐러도 우아함과 박력을 겸비한 비르투오소입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파리 음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쁜 버릇, 즉 절망에 빠진 척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들은 감정을 과장합니다. 그 때문에 템포와 리듬도 과장되게 마련이고요. 그렇지만 저는 그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지나친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호보완적인 음악가들입니다. 제가 딱딱한 현학자의 가면을 쓴다면, 그들은 멋이나 내는 한량의 가면을 쓰지요.” --- pp.191-192 어쩌면 쇼팽은 연주회장을 영원히 저버림으로써 예술가 인생의 황금기를 만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음악을 잘 모르는 청중에게 충격을 주거나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대에 설 필요가 없었다. 느리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작곡 작업, 부단한 자기의문, 꿈, 불안, 회한이 그에게 신비로운 피아노의 대가라는 영광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 영광은 빼어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을 초월할 터였다. 연주자로서의 영광은 비르투오소로서 사는 어려움들과 더 잘 맞서 싸울 수 있는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차지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으로 피아니스트들에게 빛나는 계시를 줄 것이고, 그로써 뭇사람의 가슴에 남는 이름이 되리라. --- pp.198-199 계속하라, 쇼팽! 계속 그렇게! 이 성공이 그대를 작정케 하기를. 이제 자기 생각만 하지 말고 그 눈부신 재능을 널리 공유해주기를. 예술가들의 분분한 논쟁을 이제 끝내주기를. 그리하여 혹자가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누구냐 묻거든, 탈베르크가 최고라는 둥 리스트가 최고라는 둥 하거든, 온 세상이 그대 연주를 들어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답하게 하라. 최고는 쇼팽이라고. --- p.205 5월 2일자 「라 프랑스 뮈지칼」에는 익명으로 작성된 기사가 실렸다. 기사 작성자는 아마 리스트만큼 권위 있는 인물이 아니었겠지만 기사의 논조는 리스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기사는 쇼팽을 슈베르트와 비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예리한 지적을 남긴다. “우리가 슈베르트를 언급한 이유는 그만큼 쇼팽과 천성이 흡사한 인물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슈베르트가 성악을 위해서 한 일을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했다.” 슈베르트가 자발성과 감정의 조화로운 결합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안다면 이 진술이 얼마나 타당하고 힘이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기사는 이렇게 덧붙인다. “쇼팽은 신념의 피아니스트다. 그는 자기를 위해 곡을 쓰고 자기를 위해 연주한다. 그가 쓰고 연주하는 것이 다 그러하다.” 조금 더 내려가면 이런 대목이 있다. “그의 음악은 그의 꿈을 보듯, 그의 울음을 듣듯, 그가 정감과 우수를 담아 부르는 노래를 듣듯 들어야 한다. 더없이 지극하고 애틋한 감정을 그는 얼마나 완벽하게 표현하는지! 쇼팽은 피아니스트 중의 피아니스트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쇼팽은 하나의 피아노 악파와 작곡 악파를 창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예술가가 건반을 어루만지는 그 가벼움, 그 섬세함에는 진정 견줄 것이 없다. 독창적이고 비범하며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의 작품들은 비할 데가 없다. 쇼팽은 아주 특별한 피아니스트이기에 아무하고도 비교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다.”(여기서도 두 번째 발라드와 「폴로네즈 C장조」 초연을 다루면서 오로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만 찬양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 pp.213-214 훗날 벨지오조소 공주는 이 젊은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쇼팽은 최고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아닐지도 몰라요. 쇼팽은 그 이상이지요. 그는 유일한 피아니스트예요.” 이 유일한 피아니스트는 어떤 스승도 사사하지 않은 독학자였다. 악기를 처음 접할 때는 누군가가 기초를 가르쳐주면 훨씬 수월하건만, 어린 쇼팽은 그런 기초를 혼자 익혔다. 피아노는 그가 특히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 좀 더 나중에 새로운 기법을 손에 익힐 때도 그는 혼자였고, 어쩌면 그 때문에 달리 경쟁 상대가 없을 만큼 특별한 시정을 표현하는 비르투오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 p.260 파리 사교계에서 쇼팽은 사람됨으로서나 재능으로서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프랑스 수도에 망명해 있던 폴란드 귀족들과의 친교도 그를 무척 기쁘게 했다. 쇼팽의 성년 이후 삶을 통틀어보아도 이렇게 기분 좋게 지낸 때는 별로 없다. 퀴스틴 후작이 한 말은 쇼팽을 둘러싼 독특한 성격의 호감을 딱 맞게 정의해준다. “우리는 단순히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를 통하여 서로를 좋아하는 겁니다.” --- pp.279-280 우리가 이미 언급했지만 한 번 더 말해두자면, 쇼팽은 파리에서 쌓는 명성보다 바르샤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바르샤바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바르샤바에서 그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바르샤바 언론에 그의 연주회 기사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생활방식, 의견, 원칙도 폴란드의 풍속과 관습에 해당하는 것은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대단히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이면서도 이론적 사색을 경계하는 태도, 단순하다 못해 고집스러운 선악 개념(조르주 상드가 “정신적 편협성”이라고 말했을 정도다)에서 우리는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열광과 혐오는 사변적 성찰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본능적 반응이었다. 그가 어떤 것을 못 견뎌했고 어떤 유별난 독단적 행동을 보였는지 이해하려면, 폴란드에서의 어린 시절이 그에게 평생 끼친 영향, 결코 뿌리 뽑을 수 없는 그 영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미 “저로 말하자면, 순수한 마조프셰 사람이지요”라는 자부심 넘치는 선언을 보지 않았던가. --- pp.335-336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이 전설적인 쇼팽이다. 그의 실제 생활에서의 흠결과 과오에 연연하지 않고 본질적인 진실의 핵심으로 들어가, 우리의 모든 열광적인 기대에 부응하는 쇼팽의 이미지를 귀히 간직해야 한다.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살았던 쇼팽, 환영 속에서의 삶이 유일한 삶이었던 쇼팽, 과거의 매혹을 소생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 바람도 없었던 쇼팽, 자기 자신 외에는 마음을 터놓을 이가 없었고 자신의 천재성을 쏟아냄으로써 자신은 물론, 헤아릴 수 없는 인류의 꿈과 향수에 영원성을 부여했던 바로 그 쇼팽을. --- p.337 이 책은 쇼팽 스페셜리스트가 쓴, 쇼팽 스페셜리스트를 위한 책이다. 누구나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알프레드 코르토가 진정한 ‘쇼팽빠’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코르토는 사재를 털어 쇼팽의 육필원고나 생존 당시의 그를 모델로 삼은 예술 작품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내가 소장한 쇼팽 유품은 완벽한 일습을 이루었다. 이 유품들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예술에 대한 숭배는 나를 결코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에게 이 물건들은 명실상부한 성유물聖遺物이었다. 쇼팽이 하나의 종교가 될 수 있다면 코르토는 그 종교의 사제 중 한 사람이다. 앞에서 코르토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언급했듯이, 그는 연습곡을 치다가 신비체험과도 같은 경험을 하면서 이 종교에 입문했고,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충실한 연주로 이 종교의 제의를 집전했다. 수도사가 신에 대하여 묵상하듯 쇼팽의 모든 ‘면모들(aspects)’을 깊이 살피기 원했고 이 책으로 그 결실을 이루었다. 그는 쇼팽에게 ‘주님의 착한 종’처럼 충직하게 온갖 잡일을 도맡아주는 친구나 비서나 제자가 늘 있었음에, 쇼팽이 비록 대중의 열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으나 소수의 신도들이 늘 있었음에 주목한다. 그는 자기를 비롯하여 뭇사람들에게 신심을 일으킨 이 폴란드 음악가의 모든 것을 알아내고 전하고자 했다. 신체적인 면모에서 성격적인 면모까지, 작곡가, 연주자, 교육자로서의 각기 다른 면모들까지. --- pp.344-345 |
쇼팽 스페셜리스트가 쓴 쇼팽의 모든 것
“어쩌면 쇼팽은 최고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아닐지도 몰라요. 쇼팽은 그 이상이지요. 그는 유일한 피아니스트예요.”(벨지오조소 공주의 말 인용) 지금껏 수많은 이들이 쇼팽을 찬양해 왔다. 이 책이 속한 ‘거장이 만난 거장’ 시리즈에서도 소설가 앙드레 지드,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가 쇼팽에 관한 애정 담긴 기록을 남겼고, 지금도 많은 음악가가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명예를 좇아 이 음악가만의 특별한 시정에 다다르고자 노력한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1877-1962)는 쇼팽 숭배의 원조 격으로 통한다. 그는 쇼팽의 마지막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에밀 데콩브를 사사하며 쇼팽의 가르침을 전수받았고, 쇼팽의 연습곡을 치다가 “갑자기 음악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쇼팽은 처음부터 그에게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다. 19세기 낭만파 피아노 음악과 즉흥 연주의 정신을 계승한 코르토는 당대를 대표하는 쇼팽 연주자였다. 그 역시 쇼팽을 좇아 테크닉보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더욱 중요시했고, 음악가를 넘어 시인, 화가와 같은 별명을 얻었다. 따라서 쇼팽을 연구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그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자 한 사람의 숭배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신성한 의무일 터였다. 『쇼팽을 찾아서 _ 비르투오소의 면모들(원제: Aspects de Chopin(쇼팽의 면모들)』은 이렇듯 쇼팽을 종교 삼은 그의 사제가 쇼팽의 모든 면면을 살펴보는 책이다. 세부적으로는 손과 손가락을 비롯한 쇼팽의 생김새와 성격부터, 작곡가, 연주자, 교육자로서의 면모까지 두루 살핀다. 쇼팽 스페셜리스트가 쓴 쇼팽 스페셜리스트를 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코르토는 오랜 세월 쇼팽에 천착했지만 피아니스트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휘자, 교수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하며 후대에 본이 되는 성취를 남겼다. 1919년에는 에콜 노르말 뒤 뮈지크를 설립해 클라라 하스킬, 디누 리파티, 상송 프랑수아 같은 이름난 피아니스트들이 그를 사사했고, 유럽뿐 아니라 일본에서까지 큰 인기를 누려 시모노세키에 그의 이름을 딴 섬(孤留島)이 있을 정도다. ‘거장’이야말로 그에게 어울리는 호칭이 아닐까. 저자가 수집한 쇼팽의 유품, 육필원고부터 경매로 획득한 메달까지 “역사학자 샤를 드 마자드의 소장품이었다가 나에게 넘어온 초상화가 한 점 있다. 이제 내게는 매일 들춰보는 경전이나 다름없는 초상화이다. (…) 이 초상화가 우리집에 있음으로써 나는 황홀과 우수가 넘치는 소리를 제공하는 지고의 인물과 일상을 함께한다는 감동적인 환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쇼팽을 향한 코르토의 감정이 숭배에 가깝다는 걸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코르토는 파리에서 치열한 경매를 거쳐 쇼팽 메달을 손에 넣는가 하면 육필원고, 편지 외에도 쇼팽의 머리칼마저 소장함으로써 유품의 완벽한 일습을 이루었다며 흡족해한다. 그는 알아보기 힘든 쇼팽의 육필원고를 한 글자씩 짚어가며 해독하고, 쇼팽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600쪽이 넘는 편지 모음을 프랑스판, 독일어판을 오가며 꼼꼼히 살핀다. 저자가 수집한 이들 유품의 일부를 책에서 도판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교육자로서의 쇼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저자는 피아노 선생 노릇을 하는 쇼팽의 모습에서 전설의 아우라가 스러진다 얘기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제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쇼팽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쇼팽의 가르침에는 이렇다 할 빛이 비치지 않았다. 비록 그 자신은 “밤꾀꼬리 같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지만, 쇼팽의 제자들 가운데 스승의 평판을 높여줄 만한 이는 극소수였다. 코르토는 또한 쇼팽의 교수법의 원칙들이 그리 독창적이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작품 해석의 표현력을 강조한 점들은 짚고 넘어간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상주의’라 불러도 좋으며, “생각이 깔려 있는 음악”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이 장에는 특별히 쇼팽의 육필원고 전문이 실려 있다. 쇼팽은 생전 음악 이론 전체를 다루는 저작을 기획했지만 실행하지 못했고, 미완성 작품과 유고가 소각되는 와중에도 이 원고들만은 남아 지금까지 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퍼즐을 풀 듯 해독한 육필원고는 다소 실망스럽고 상투적인 내용이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육필원고 중 두 장의 사진이 도판으로 수록되었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예정에 없던 파리에서 18년을 체류하게 된 쇼팽을 두고 프랑스가 쇼팽에게 빚을 졌다는 얘기는 두루 들린다. 하지만 저자는 5장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서 반대로 쇼팽이 프랑스에 진 빚은 없을까 질문하고 규명해본다. 세련의 극치를 달리던 파리 사교계로 인해 감각과 관념을 쇄신하고, 가장 오랜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의 비상한 두뇌 활동에 자극받아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외젠 들라크루아, 발자크 등 탁월한 인물들과의 지적인 교류가 영감에 자극을 주고 쇼팽을 더욱 성숙하게 해주었을 거라는 가설은 저자의 우려와는 달리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6장에서는 명성에 비해 살아생전 단 30여 회밖에 갖지 않은 쇼팽의 연주 무대를 하나하나 짚어본다. 각각의 연주회에 대해 쇼팽이 서신을 통해 친구들과 나눈 대화, 당시 여러 매체의 기사와 평 들이 실려 있어 그 당시 쇼팽의 감정, 쇼팽 음악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시끄러운 열광이 아닌 섬세한 공감을 추구했던 그의 연주는 처음에 청중과 평론가 들에게 낯설게 다가오며 분분한 논쟁을 유발했지만, 곧 대체할 수 없는 경지로 올라선다. 그것은 매번 거론되던 소위 ‘박력’에 대한 세간의 진부한 편견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었다. 마지막으로 쇼팽의 성격에 대한 장이 이 책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거장 코르토는 마치 신앙과도 같았던 쇼팽의 행동방식 하나하나까지 모두 알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조숙하고 명랑한 아이였던 쇼팽에서부터 이제 막 눈뜬 감수성으로 생을 발견한 청소년 쇼팽, 그다음에는 하루가 다르게 심해져 가는 병과 싸우면서도 천재성을 발휘했던 쇼팽의 삶의 단계들을 하나씩 거치며 그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간다. 가족 안에서, 친구와 연인들에게, 그리고 폴란드라는 국적을 배경으로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서술은 쇼팽을 더 입체적으로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쇼팽에 이르는 다리, 충실하고 오랫동안 사랑받는 저작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쇼팽 노트』가 쇼팽 작품의 해석에 관한 문제를 다루며 다소 전문적으로 읽힌다면, 『쇼팽을 찾아서』는 한층 수월하고 더욱 폭넓게 쇼팽의 다양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책에는 당시 쇼팽의 벗이자 경쟁자였던 리스트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리스트가 자신의 이름으로 매체에 쓴 기사도 일부 등장하는데,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쇼팽을 지켜봤던 이답게 상당히 날카로우면서도 예술적인 글이다. 쇼팽에 대한 리스트의 견해가 더 궁금한 독자라면 『내 친구 쇼팽』으로 갈증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각기 다른 시대의 거장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쇼팽과 그의 작품을 기념해 왔다. 21세기에 다시 나온 이 책의 프랑스어 판본에는 유명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의 서문이 실려 있다. 1949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이 쇼팽과 피아노를 숭배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지금도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코르토가 편집한 악보 판본으로 쇼팽 음악을 연주하고 해석하며, 코르토의 본격 쇼팽 연구서라 할 이 책을 통해 그 시절 쇼팽을 더욱 가깝게 느낀다. 코르토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쇼팽의 다채로운 모습은 얼마쯤 부족했을 것이다. 코르토라는 이름은 쇼팽에 맞닿아 있다. 쇼팽을 종교 삼은 이 사제는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보인다. ‘거장이 만난 거장’ 시리즈 『쇼팽을 찾아서 _ 비르투오소의 면모들』은 음악전문출판사 포노가 선보이는 ‘거장이 만난 거장’ 시리즈의 네 번째 권입니다. 이따금 얄궂은 예외도 없지 않지만, 대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제목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등대’와 같이 등장했던 한 거장이 다른 거장을 만나 그를 통해 어떻게 세계와 예술을 이해했는지 직접 그 거장의 글로 만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