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사건들은 끔찍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많은 사건이 잘못된 증오, 행동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범인들이 모두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것은 사실을 제대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 일부만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불행한 결과를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분명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할 것이다. --- p.7
이 사건에서 법원은 피고인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해서 적극적으로 사실을 조사하였다. 물론 ‘공정한 재판’이라는 견지에서 바라보면 법원이 중립적인 심판자에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증거조사에 나서는 것은 한쪽 당사자에 치우친다는 인상을 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지만 변호인 제도가 미비하던 당시에는 피고인의 위치가 검사에 비해 매우 열악하였다. 그래서 법원이 후견인 역할을 자처해서 열악한 처지에 있는 피고인을 도운 것이다. --- p.23
김대두는 가난한 농부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초등학교를 마친 그를 대도시에 있는 중학교로 보내려 했지만, 그는 시험에 떨어졌다. 도시 생활을 하던 김대두는 어떻게든 큰 돈을 벌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초등학교만 졸업한 학력에 160cm 정도 되는 키와 작은 체격을 가진 그에게 사회의 벽은 의외로 높았다. 결국 무력감에 빠진 김대두는 범죄에 빠져 폭력 전과 2범이 되었고, 공장을 전전하며 일했지만 전과자란 낙인으로 인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갔다. --- p.60
김선자는 범행의 표적으로 이웃, 계원에서부터 부친, 여동생, 시누이까지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초기에 검거되지 않자 범행도 점차 대담해졌다. 당시 아시아 게임과 올림픽으로 인해 사건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는데, 언론보도만 제대로 되었어도 검거는 물론이고, 피해가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p.91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이 사라진 날이 하필 선거일이어서 경찰 인력이 투표소 관리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초동 대응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지역 언론보도에 따르면 아이들이 실종된 지 일주일 후인 1991년 4월 1일, 달서경찰서는 이 사건을 집단가출로 규정해서 소년계에서 처리했다. 그러나 다섯 아이들의 집안은 화목했고, 다섯 명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집단가출할 리는 없어 보이므로 이런 추정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 pp.118-119
경찰과 CID는 패터슨의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살해한 방식이 갱단과 비슷하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손에 갱단 마크가 있던 패터슨이 범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부검의 의견과 패터슨과 리의 친구의 진술을 토대로 리를 살인범으로 보아 기소했다. 부검의는 목에 난 상처가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고, 방어흔이 없는 걸로 보아 범인은 조 군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세다고 보았다. --- p.144
방화가 발생한 1079호 전동차보다 1080호 전동차에서 훨씬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결국 대구도시철도 측의 위기대응의 미흡, 기관사의 직업정신 부족, 객차에 불연재를 사용하지 않은 것 등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는 꽉 닫힌 객차 안에 갇히거나 객차에서 탈출했지만 출구를 찾지 못해 질식하거나 산화한 이가 많았다. --- pp.170-171
프랑스는 한국을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라 보고 과연 제대로 감정했겠냐고 의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감정해 보자 한국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가 정확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역량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준 사건이다. --- p.202
부산에는 이 사건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부산지방경찰청은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우범지역에 있는 치안센터를 지구대로 승격했다. 또한 폐가들을 조사해서 일부는 철거하고 남은 곳은 출입금지 팻말을 붙이는 등, 특별 방범구역으로 지정해서 관리하고 있다. 사건이 발발한 덕포동에서는 주거환경 개선작업이 시작되었다. 주민들이 적극 참여해서 벽화가 그려졌고, ‘김길태 마을’로 불리던 이 마을은 ‘덕포 희망디딤돌 마을’로 변신하였다. --- pp.233-234
사회와 개인 사이의 갈등 관계보다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이 좀 더 표면화되고 있다는 것은 경제가 발전하고, 정치가 민주화될수록 잠재되어 있던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해와 함께 우리 사회에 파급력이 컸던 사건들의 이면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사건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 pp.275-276